973화
판니른 총독 운바소르 아실은 마물을 토벌하고 귀환하는 군대를 성문 밖까지 나와 환한 얼굴로 맞이했다. 당연하지만, 그런 그의 옆에는 헬라르본을 위시한 주교들도 있었다.
군터는 장황하게 길어지려는 그들의 말을 칼 같이 자르고 필요한 것들을 요구했다.
“앞으로의 싸움을 위해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법구들이 필요하오.”
“장군. 법구라는 것이 그리 흔한 물건이 아니…….”
“따로 들으면 알게 될 테지만, 이번 싸움에서 대다수 병력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소. 짐짝이 따로 없었지. 앞으로의 싸움에서 필요한 것은 머릿수가 아니라 소수라도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전력이오.”
그런 이야기를 이런 자리에서 해야 하나? 아니. 그보다 이게 대화는 맞는가? 제 할 말만 툭 던지고 몸을 돌리는 이런 것이, 대화라고 할 수 있나? 운바소르 아실은 당황한 와중에도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보는 눈이 많다. 그 어떤 추태도, 추태로 보일 만한 모습도 보여서는 안 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지요.”
“곧장 준비하시오.”
그나마 주변에 사람이 많다고 총독 대우는 해주는 것인가. 하지만 말투는 부드러울지언정 그 내용은 여전히 거침없었다. 배려나 예의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그나마 다른 이들도 바보처럼 어색하게 웃고 있다는 것이 위안거리라면 위안거리였다.
* * *
마물을 토벌하고 하잘에 돌아온 첫날. 군터는 주교 헬라르본의 방문을 받았다.
짐작했던 바였다. 그가 늘어놓을 이야기도 짐작이 갔고.
“장군.”
헬라르본은 역시나 군터가 이번에 사령술을 사용한 것을 조심스럽게 지적했다. 그러나 데카람의 그 완고한 주교처럼 공격적인 투는 아니었다. 그의 말에서는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사실 헬라르본은 사령술이니 금기니 하는 것에 대해서는 추궁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열성적으로 지적하고, 혹은 경고한다 해도 눈앞의 상대가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기도 했고.
“그나저나…우습군.”
“예?”
“줄카도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대들은 이렇게나 유난을 떠는 것이 우습다는 말이다.”
“…….”
머리가 새하얘졌다. 줄카? 줄카라고? 설마 내가 아는 그 줄카인가? 동명이인의 가능성을 억지로 쥐어 짜봤으나 부질없는 현실도피임을 곧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름을 이렇게 함부로 입에 담다니? 게다가 이 자가 그분과 이 정도로 교분이 있던가? 어째서? 어떻게?
헬라르본이 공황 상태에 빠져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군터가 태연히 말을 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지.”
“…….”
상황이 우습게 되었다. 추궁하는 쪽과 추궁당하는 쪽이 뒤바뀐 모양새가 아닌가.
‘하아.’
오고 싶지 않았다. 가만히 마주하고만 있어도 숨이 막히는 자를 상대로 추궁이라니.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헬라르본은 판니른 교구를 대표하는 주교였다. 명목상으로나마 판니른이라는 거대한 교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성직자라는 말이다. 말할 것 없이 명예로운 지위였다. 총독조차 그를 대면할 때면 깍듯이 예의를 차려야 했다. 그 외의 권력자들도 마찬가지. 그런 힘 있는 자들이 공손함을 보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어깨가 으쓱거리곤 했다.
그러나 자리에는 그에 맞는 책무가 따르는 법. 다른 주교들을 대표하기 위해서, 그는 그들이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해줄 필요가 있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줄카 전하께서 넘기신 부분에 대해 저희가 떠들어대는 것은 우습지요.”
동료 주교들이 들었다면 무슨 헛소리냐며 노했을 말. 그러나 그들은 지금 이곳에 없다.
“허나 장군께서도 이 사람의 입장을 헤아려주시리라 믿습니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하지만 가슴을 누르던 중압감이 조금은 옅어진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말씀하셨던 법구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착각이 아니었다. 헬라르본은 괜스레 타는 목에 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성물은 내줄 수 없다며 고집을 부리는 동료 주교들을 어떻게 해서든 설득해야겠다고.
* * *
군터 크렘보르는 성과를 냈다. 이번 마물 토벌에 함께했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거의 그 홀로 마물을 상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 과정에서 사령술이 쓰였다고 해도, 그가 이룩한 성과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공을 세운 자의 말에는 힘이 실리는 법. 따라서 그가 앞으로의 싸움을 위한 전폭적인 협조 요청에 딴지를 걸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얼토당토않은 것이라면 모를까, 명분도 합당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쩔 수 없이, 혹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도 자기가 손해 보는 것을 달가워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하물며 교단은 그런 쪽으로는 가장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집단이었다. 그들은 신의 이름을 내세워 무언가를 받아내는 것에 익숙하지, 내어주는 것에 익숙한 이들이 아니었다. 교단이 저자세를 보이는 상대는 오직 황제가 유일했고, 그 황제는 이제 이 세상에 없었다.
“그에게 협조해야 한다는 부분에는 동의합니다만, 성물까지 내어놓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한 주교가 마땅찮다는 기색을 풀풀 풍기며 말했다. 헬라르본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그러나 속으로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물음에 답했다.
“볼가이엔을 무너뜨린 마물을 이번에 성공적으로 토벌하면서 군의 기세가 크게 올랐소이다. 시민들도 그러하고. 이럴 때 교단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이는 편이 좋지 않겠소?”
“말씀에는 동의합니다만, 그렇다 해도 굳이 성물까지 내어놓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런. 어쩌다 보니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는군요.”
가벼운 손짓으로 괜찮다는 표시를 한 헬라르본이 이 고집스러운 자들을 어찌 설득해야 할지 다시 한번 고민했다.
성물, 성물 하지만 사실 성물이라는 것이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면 그저 법구에 불과했다. 다만 교단이 보유하고 있으며, 나름의 이야기 혹은 역사가 있다는 점이 차이였다. 즉, 성물이란 교단이 보유한 조금 유명한 법구였다. 그 힘만 놓고 보면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이들이 성물을 내놓기를 주저하는 까닭은 간단했다. 그저 교단의 보물을 보물고에서 꺼내는 것이 꺼림칙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 찾자면 금기를 대놓고 범하면서도 굽히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무도한 무부에게 자존심을 세우기 위함…정도일까.
“여러분. 군터 크렘보르. 그자가 이렇게 무도하게 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 것 같소.”
“그야…황자 전하의 총애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자가 전하의 총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으니.”
“그것도 있지. 하지만 여러분. 혹 그자가 줄카 전하와 교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오?”
“예에?”
“그 무슨…….”
놀라는 것을 넘어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당연한 일이다. 군주의 이름은 무겁다. 특히 성직자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용살자의 위명이 자자하게 퍼진 서부 교구에서는 그를 신의 두 번째 사도로서 섬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북부에서야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렇다 해도 군주의 이름 앞에 고개부터 숙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겠지요. 허나 여러분도 그분께서 헤이모라에 와 계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을 겁니다. 그리고 군터 크렘보르는 황자 전하의 명을 받아 헤이모라를 통제했지요. 아마 그 와중에 그분과 교분을 맺지 않았나 싶습니다.”
“으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줄카 전하께서도 금기에 관한 일로 그를 추궁하지는 않으셨다는 겁니다. 어찌 보면 그냥 넘기셨다고 볼 수도 있지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어흠.”
월권이 다른 것이 아니다. 윗사람이 넘긴 일을 아랫사람이 지적하면 그것이 곧 월권이 아니겠는가. 물론 군주와 교단의 관계가 뚜렷한 상하관계로 맺어진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주교들의 표정은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댄 것도 아니고,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힘을 실어달라 요청한 것뿐이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가 미적대는 모습을 보인다면…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라도 후에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말로는 그럴 리 없다고 했으나 방금까지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이들이 표정이 어두워지고,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었다. 군주의 이름이 가진 힘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자들 같으니.’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동료들을 보며 헬라르본은 내심 혀를 찼다.
성직자들은 대개 순진하다. 하는 일이라고는 경전을 읽거나 신자들을 맞이하는 것뿐인 데다, 인생의 상당 부분을 신전이나 신전 주변에서 보내는 자들이니 순진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교 정도 되는 이들이라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나마 주교 정도 되는 고위직에 오른 이들은 정치적인 감각도 갖췄다지만, 그것도 교단 안에서나 그렇다는 것이지 신전 밖의 교활한 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 역시 그 오만한 자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의심이 가기도 하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가 능력 있는 자임은 분명하고, 대의에 비하면 흠결 있는 그자도 사소한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니 대의를 위해, 우리도 감수해야 할 부분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직자들은 순진하다. 또한 오만하다. 그 어떤 존재보다 위대한 조물주를 섬긴다는, 그분의 종이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때때로 고집스럽고 유치하게 보이기도 한다. 헬라르본은 그런 부분을 이용할 줄 알았고, 그것이 그가 판니른 교구의 얼굴이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약간의 부침이 있었지만, 결국 그는 동료 주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하잘의 대신전에서 보관하고 있던 성물 일부를 군터 크렘보르에게 전달했다. 귀족들이 그들의 법구를 가져오고서 얼추 하루가 지난 시점이었다.
* * *
“앞으로의 싸움에서 너희의 힘이 필요하다. 따르겠나?”
다섯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군터 크레보르는 앞뒤 없이 그 한 마디만을 말했다. 넷이 당황하는 가운데, 한 명만은 기다렸다는 듯 힘 있게 즉답했다.
“물론 따르겠습니다. 주께서 길을 안배해주셨으니,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보울룬은 동료들의 황당함 섞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