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2화
검고 탁한 무언가가 들끓던 자리에 남은 것은 흙구덩이뿐. 비죽 튀어나온 팔과 다리 등이 그 안에 사람이, 혹은 사람의 몸뚱이가 묻혀있음을 알렸다.
“이, 이봐…….”
영문도 모른 채 정신을 잃고, 또 영문도 모른 채 정신을 차린 병사가 뒤늦게 그것을 보고서 다가갔다. 그는 미세하지만, 분명히 꿈틀거린 팔 쪽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땅을 팠다. 흙더미는 모래처럼 부드러워 파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이!”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 누군지는 모른다. 눈에 익은 얼굴도 아니다. 그러나 병사는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다급하게 눈 감은 이를 깨웠다.
“정신 차려. 어이!”
어깨를 흔들고, 뺨을 몇 번 치자 표정 없이 창백하기만 하던 얼굴이 슬쩍 찌푸려졌다. 병사는 반색하며 더 힘껏 동료를 깨웠다.
동료. 그래. 동료다. 이름은 모르고, 얼굴은 지금 처음 봤지만 그래도 동료다. 이 뭔지 모를 곳에서 함께 싸운 동료.
“커흑!”
새파랗게 질린 입이 열리는가 싶더니 거무튀튀한 뭔가가 튀어나왔다. 피인가? 병사가 볼에 살짝 튄 그것을 손등으로 닦아내려던 순간. 동료가 눈을 떴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
눈이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콰득!
방금까지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던 동료가 순식간에 그의 얼굴을 물어뜯었다.
* * *
흙더미에 파묻혀 있던 병사들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주변의 ‘멀쩡한’ 병사들에게 마구잡이로 달려들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리고 상황파악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아군이 눈을 뒤집고 달려드니 어어 하다가 그대로 휩쓸리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마물의 힘에 정신이 오염된 거다! 물러나!”
몇몇 술사들이 다급히 경고했으나, 그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즈음에는 이미 병사들 상당수가 서로 뒤엉킨 후였다.
“어, 어찌합니까?!”
적대해야 하는가? 눈 뒤집힌 짐승처럼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이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깨를 나란히 하던 동료였다. 병사들 대부분은 갈피를 잡지 못했고, 그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할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촌극이군.’
군터는 잠시 숨을 고르며 그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그의 육안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뒹구는 병사들을 훑었지만, 영적인 시선은 마물이 흩뿌리고 간 환영에 머물러 있었다. 동시에 두 가지를 보고 있었으나 그의 정신에 혼란은 없었다. 군터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촌극보다는 마물이 뿌리고 간 사념에 집중했다. 그러자 다소 흐릿하고 산만하게 지나가던 것들이 조금 더 뚜렷하게 보이고 들리기 시작했다.
두려움.
땅 위를 뛰어다니던 그것은 하늘 위에 떠 있는 거대한 눈을 보며 전율했다. 대지를 내려다보는 그 시선에 사각은 없었다. 어떻게 움직여도, 어디로 도망쳐도 그것은 벗어날 수 없었다.
군터는 그것, 이제는 마물이라 불리는 존재의 시각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저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절대적인 시선. 그는 저것을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아는 자들 사이에서는 워낙 유명하기도 했고.
‘룬차이.’
전장에서 맞섰던 상대이기도 했다. 비록 직접 얼굴을 본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하나가 아니었군.’
보아하니 이 마물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이는 룬차이였던 모양이다. 아간투스베록과 그가 함께 이 땅을 정벌했던 것인가. 어쩌면 둘이 아니라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
초조함. 마물은 사방에서 자신을 조여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의 군대. 그것은 촘촘한 그물처럼 조여왔다.
천적의 울음 같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고동 소리를 들으며 마물은 최후를 직감했다. 그리고 그즈음, 군터는 눈을 감았다.
* * *
“일단은…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술사들도 그리 말하고, 조금 더 시간을 두고 봐야겠습니다만…현재까지는 부상당한 병사들에게서도 특별한 징후는 보이지 없습니다.”
정신이 오염된 병사들(술사들의 표현에 의하면)은 무기를 들고 설치지는 않았다. 짐승처럼 이빨로 물어뜯거나 손톱으로 할퀴고 들었을 뿐. 그렇기에 당황한 상태에서 초기에 휩쓸린 일부를 제외하면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보다는 제압이 문제였다. 적이라면 가차 없이 찌르고 베면 그만이지만,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이들은 조금 전까지 함께 싸우던 동료였다. 최대한 죽이지 않고 제압하려 하니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정신이 오염된 병사들은 사지를 전부 결박해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지 않는 한 어떻게든 물어뜯으려 들었으니까 말이다.
군터가 나선 것은 슬슬 시어문드가 어쩔 수 없는 결정을 진지하게 고려하게 됐을 즈음이었다.
[해결할 수 있겠나.]
[글쎄. 확답은 못하겠으나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군.]
이가로프가 여유롭게 답했다. 확답하지 못하겠다고 했으나 그는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그의 자신감을 고스란히 느낀 군터는 유령들을 풀어놓았다.
[짧은 자유로군!]
환호하듯 기합을 내지른 이가로프가 유령마를 타고 가장 먼저 달려나갔다. 그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이를 드러내던 병사에게 스며들었다. 그러자 뒤집혀 있던 병사의 눈이 순간 빛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 빛은 정상적인 사람의 눈에서 날 법한 빛은 아니었다.
[역시.]
곧 공격당하리라 짐작하고 잔뜩 굳어있던 맞은편의 병사를 무시한 채, 이가로프는 지저분하게 오염된 영혼을 살폈다. 가뜩이나 연약하던 인간의 정신은 초월적인 존재의 힘과 마지막 숨결에 본래의 색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이가로프는 그 스스로가 육신이 없는 영체이기에 이러한 영적인 현상을 보다 면밀하게 살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회복된다고 해도……. 흠.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그가 받은 명령은 어디까지나 발광하는 병사들을 잠잠하게 만드는 것. 그러니 그 이후의 일 따위는 신경 쓸 필요 없다.
오염됐다고 해도 그 기반은 평범한 인간의 영혼. 영체로서 긴 세월을, 그것도 원한이라는 독을 품은 채 버텨온 그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자그마한 존재에 불과했다. 이가로프의 영혼이 육신에 똬리를 틀며 가볍게 찍어누른 것만으로도 병사의 오염된 영혼은 죽은 듯 가라앉아버렸다.
[쉽군.]
몸을 옮겨 탈 때마다 하나씩 해결하는 셈이었다. 인간의 오염된 영혼은 감히 그에게 저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만약 몸을 옮겨 탈 때마다 밀려오는 약간의 부담감만 아니었더라면 그 혼자 모든 오염된 영혼을 제압할 수 있었으리라.
[이것도 점점 능숙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살아있는 육체에 깃드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익숙해지고 있는 건가. 아니면.]
군터 크렘보르의 깊은 곳에 자리한 감옥. 그곳과 이어진 구속, 혹은 결속력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보이지 않게 이어진 끈은 이가로프에게 안정감과 힘을 주었다. 이 변화를 기뻐해야 하는가.
처음에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는 관계 정도로 여겼다. 군터 크렘보르는 그에게 있어 협력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가로프의 영혼은 자연스럽게 그를 그 이상의 존재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은밀하고도 자연스러운 변화가 섬뜩하기도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복수. 그것이 그에게 남은 전부다. 그리고 복수의 순간은 분명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발광하던 병사 하나가 시체처럼 축 늘어지고, 가까운 곳에 있던 또 한 명의 병사가 얌전해졌다. 술사들은 섬뜩한 존재들이 이리저리 날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나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 * *
이번 싸움으로 확실해졌다. 일반적이지 않은, 아니 초월적인 적을 상대로 평범한 사람의 힘은 아무 쓸모가 없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마물이라고는 해도 고작 하나의 적을 상대로 수천의 병력이 부담스러운 애물단지가 되지 않았나. 실질적으로 제 몫을 한 것은 술사들과 몇몇 특출난 영혼과 정신력을 지닌 병사들뿐. 그나마도 제 몫 정도만 한 것이지 활약을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별 기대도 하지 않았던 애송이(선택받은 자)들이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그들은 마물에게 홀려 미치광이가 되지도 않았을뿐더러, 마물이 한창 위세를 부리며 현실을 뒤틀고 있을 때도 적절하게 군터를 보조하기까지 했다. 그들의 그런 활약은 군터에게도 꽤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경험, 정신력. 모두 부질없다.’
본질의 문제다. 아무리 단련하고 경험을 쌓는다 해도 범인(凡人)은 범인에 불과하다. 토끼가 아무리 날카롭게 이빨을 간다고 해도 사자가 될 수는 없는 것처럼, 평범한 사람이 발휘 할 수 있는 힘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일정한 수준 이상의, 초월적인 존재를 상대로 하는 싸움에서는 그 한계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지금까지의 싸움은 아슬아슬했다. 사나운 짐승 정도 수준의 괴물들에게는 훈련받은 병사의 창칼이 통했지만, 이번에 상대한 마물 같은 경우에는 수천의 병력이 오히려 짐이 됐다. 군터는 앞으로의 싸움도 이번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으리라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이 병사들이 더 무거운 짐이 된다는 뜻이다.
“…….”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머리가 좋은 이들은 대부분 눈도 좋다. 뛰어난 통찰은 꼼꼼한 관찰에서 비롯된다 하지 않던가. 같은 의미에서, 시어문드는 뛰어난 눈썰미와 눈치를 갖춘 사내였다. 그는 자신의 상관이 무언가 고민하고 있음을 꿰뚫어 보았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 고민이 상당히 무거운 것이라는 것도 짐작했다.
“대단한 녀석은 아니었다.”
“…그렇습니까?”
시어문드가 쓰게 웃었다. 늘 그랬지만, 이 사람의 기준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갔다. 언제부터인가는 따라가기가 버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평범한 병사들은 도움이 안 돼. 오히려 짐일 뿐이지.”
“…….”
“이번에 처지지 않았던 술사들을 추려라. 그리고 하잘로 돌아가면 쓸만한 법구를 모두 모아.”
“병력을 추리실 생각입니까?”
“그러는 편이 낫다.”
시어문드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이 생길까 싶어 성수도 구할 수 있는 만큼 구해오는 등, 나름 짧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대비는 다 했던 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걸로도 한참 부족했다.
‘미쳐 돌아가는군.’
낯선 전장이다. 점점 더 낯설어지고 있다. 자신이 이런 얼간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건만.
“예.”
습관적으로 나오는 대답. 그러나 그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힘이 빠져 있었다.
* * *
“…….”
로센은 조심스럽게 지휘부를 곁눈질했다. 정확히는 그의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듯한 군터 크렘보르의 모습을.
‘분명해. 그건 분명히 유령이었다.’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고, 충격이 가신 뒤에는 예전에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그리고 광인들이 대부분 쓰러질 즈음에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유령들을 보며 전율했다.
“어이. 보울룬.”
“음?”
“놀랍지 않은가?”
“뭐가 말인가.”
피로에 젖은,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면 평소와 같이 담담한 모습. 로센은 도통 말귀를 못 알아듣는 보울룬의 모습에 답답함을 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크렘보르 장군 말이야. 자네도 봤겠지. 그건 분명 유령들이었어. 그리고 그것들은 크렘보르 장군에게서 나왔고, 그에게로 돌아갔지.”
사령술. 그 힘은 제국의 금기였다. 그리고 제국의 금기라는 말은 곧 교단의 금기라는 말과 같았다. 즉, 신께서 허락하지 않은 힘이라는 뜻이다.
“나도 봤네.”
“그래. 그렇다면 그게 뭘 의미하는지도 알겠지.”
“살인은 죄지. 하지만 전장에서의 살인은 공이야. 그렇지 않나?”
“뭐?”
보울룬이 여전히 피로에 쩌든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착각이었을까? 로센은 그 모습이 마치 더 말을 섞기 싫다는 것처럼 보였다.
“의심하지 말게. 우리는 평범한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지쳤다는 것을 증명하듯 잔뜩 처지는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묘한 힘이 실려 있었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어리숙한 촌놈의 단호한 모습에 로센은 할 말을 잊고 눈만 깜빡거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