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1화
불쾌함을 넘어선 본능적인 꺼림칙함이 강하게 풍기는 어두운 웅덩이. 병사들은 홀린 듯 그곳으로 다가갔다. 걸어가는 이들도 있었고 기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또 아예 숨 가쁘게 달리거나 몸을 날리는 이들도 있었다.
흔한 광인들처럼 눈이 풀려 있지도 않았다. 불길한 웅덩이 속으로 몸을 날린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들은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웅덩이 속으로 사라진 병사들은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 작게는 몇 명, 많게는 수십을 집어삼킨 웅덩이들이 어느 순간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열기도 없이 끓어오르는 오물(같아 보이는 것)들은 가라앉은 병사들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숨결 같기도 했다.
그런 웅덩이들을 중심으로 다시 뒤틀림이 퍼져 나갔다. 마치 종이에 번지는 잉크처럼. 병사들이 더 많이 웅덩이 속으로 뛰어들수록 그 속도는 빨라졌다.
“으아앗!”
불빛에 이끌린 부나방처럼, 그들은 들끓는 뒤틀림 속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몇몇은 웅덩이로 향하는 병사들을 향해 소리치며 만류하기도 했고, 아예 직접 힘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상술했듯 그들은 소수였고, 사방에 퍼진 웅덩이로 다가가는 병사들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이대로는 안 돼.’
아무리 소리쳐도 저들은 듣지 않는다. 그에 보울룬은 직접 웅덩이를 없애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가만히 앉아 병사들이 사라지기를 지켜보고만 있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오히나. 저들을 막아!’
보울룬은 말을 달리면서 정령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의 지시를 받은 뱀 정령은 홀연히 사라지더니 구덩이를 향해 달리던 병사 대여섯의 앞에 나타났다.
쉬익-!
거대한 뱀의 꼬리가 병사들을 감싸듯 후려쳤다. 앞만 보고 가던 병사들이 일제히 벌러덩 넘어지자, 뱀 정령은 다시 한번 꼬리를 휘둘러 그들을 내리찍었다. 그 과격한 일 처리를 본 보울룬은 눈살을 찌푸렸으나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 그의 정령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흥분하고 있음을, 더 정확히는 분노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 상태에서 이 정도만 해도 그의 정령은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었다.
‘오히나. 힘을 아껴라. 감정도 아껴. 그것들을 풀어낼 상대는 따로 있지 않으냐.’
스스로에게 되뇌듯 속삭이며, 보울룬은 점점 가까워지는 웅덩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들끓고 있는 웅덩이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정체 모를 불길함이 더 강하게 심장을 옥죄었다. 그것을 견디며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심력이 고갈되는 느낌이었다.
“후우.”
정령의 힘은 막강하지만, 그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릇이 필요하다. 활과 화살의 관계와 흡사하다. 화살을 더 강하게, 더 멀리 날리기 위해서는 더 튼튼한 활이 필요하지 않은가.
‘오히나.’
웅덩이가 가까워졌다. 지시만 기다리고 있던 뱀이 몸집을 부풀렸다. 두 배, 세 배, 아니 그 이상.
이제는 뱀보다는 괴물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게 된 정령이 입을 크게 벌렸다. 찢어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쩍 벌린 입에서 스산함이 감도는 녹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뱀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는 흩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처음 나온 그대로 빠르게 구덩이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것이 끓어오르는 구덩이의 지척까지 다다른 순간.
“■■■-!”
섬뜩한 괴성과 함께 구덩이가 폭발했다. 그리고 일순간 거대한 그늘이 보울룬을 뒤덮었다. 보울룬이 무언가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음을 알아차린 순간, 또 하나의 거대한 형체가 그의 시야를 가렸다.
콰득!
“오히나!”
뱀의 것이라기에는 너무 크고 날카로운, 흡사 들개의 그것과 같은 이빨. 그것이 보울룬에게 떨어져 내리던 부정형의 무언가를 물어뜯었다. 보울룬은 찢어지는 괴성에 몸을 떨면서도 여전히 그것이 무엇인지는 볼 수 없었다. 보고자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오히나와 자신을 하나라고 되뇌었다. 마음에서부터 정령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이 자기 최면에 가까운 마음가짐이야말로 신전에서 배운 거의 모든 것이었다.
콰득!
오히나가 날뛰면 날뛸수록 보울룬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정령이 발휘하는 힘만큼 몸에 부담이 가고 있지만, 지금 보올룬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자신의 눈에 핏발이 서고, 코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는 이제 인간의 두 눈이 아닌 정령의 눈으로 마물의 부정한 편린을 보고 있었다.
샤아-!
정령, 오히나가 물어뜯은 무언가를 거칠게 내뱉었다. 피인지, 오물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검은 물인지 모를 것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 * *
콰직!
사람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저 두 팔 달린 괴물인 것 같기도 한, 거대한 석상이 주먹을 내리쳤다. 벼락처럼 떨어진 주먹은 괴성을 토하던 구덩이, 그 속에 존재하던 정체 모를 존재를 단번에 으깨버렸다.
“허억…허억…….”
로센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언제부터 났는지 모를 피눈물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 외에 코와 입에도 제법 굵직한 붉은 선이 굳은 채 뻗어 있었고.
한계다. 아마 조금만 더 몰입 상태를 이어갔다면 피만 쏟는 선에서 끝나지는 않았을 터. 로센은 떨리는 손으로 연신 땅을 밀었다. 어떻게든 일어서려고 용을 써봐도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았다.
“로센 공.”
공. 아직도 낯설지만 기분 좋은 호칭. 로센은 눈앞에 나타난 손을 붙들었다. 주름졌지만 매끈한 손. 전사의 손은 아니다. 하지만 이 손의 주인이 없었더라면 피를 쏟는 대신 그냥 핏덩이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대단한 힘입니다.”
“신께서 내려주신 힘이니까요.”
대답이 없다. 주름진 입매가 슬쩍 비틀린 것을 대답으로 봐도 될까? 불쾌하지 않다면 거짓이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은 없다. 게다가, 이 중년의 술사와 그의 동료들에게는 도움까지 받지 않았나. 사소한 이견쯤은 묻어둬도 괜찮으리라.
‘바르둑. 더는 안 된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거대하고 무뚝뚝한 정령의 마음이 느껴진다. 바르둑이라 이름 붙인 그의 정령은 이곳에 있는 모든 뒤틀림을 일소하기 전까지는 멈추고 싶지 않아 한다. 하지만 로센은 바르둑이 원하는 대로 계속 싸움을 이어나갔다가는 목숨이 두어 개쯤 된다고 해도 무사하지 못할 것을 확신했다.
쿵!
아무게나 들리지 않는 굉음. 바르둑이 신경질적으로 땅을 내리쳤다. 분노의 표현임과 동시에 수긍의 표현이었다. 뒤틀린 것들에 대한 바르둑의 분노는 불처럼 맹렬하지만, 그보다는 그와 영혼을 공유하는 로센의 안위를 선택한 것이다. 바르둑의 분노를 느끼며, 로센은 안도하는 동시에 만족했다. 바르둑의 우선순위가 적이 아닌 자신임을 확인했기에. 유치하다면 유치한 감정이지만, 로센에게는 그런 확인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더는 힘들 것 같군요.”
“예. 한계입니다.”
로센만큼은 아니지만, 술사들도 몰골이 만만치 않게 망가진 상태였다. 몸과 정신의 상태는 보이는 것보다도 더 심각했고. 그들은 이제껏 총 네 개의 구덩이를 없앴다. 하지만 아직도 구덩이는 적잖이 남아 있었다. 그들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필사적으로 활약했음을 고려하면 암담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구덩이가 더 늘어나지는 않는다는 점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지만.
“슬슬 저쪽에 합류해야 할 듯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고개를 힘겹게 끄덕인 로센이 중년 술사가 말한 ‘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괴이한 존재. 지금까지 처리한 구덩이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거대하며 어둡다. 그리고 무엇보다 허공에 떠있다. 마치 허공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모양새. 저 안, 혹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처리하지 못한 다른 구덩이들에서 검은 물 같은 것이 역류하듯 저 거대한 구덩이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누가 지시를 내린 것도 아니건만 몇몇 이들이 힘겹게 그것들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중에는 보울룬을 비롯한 동료들도 있었고.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로센의 의문 가득한 시선이 보울룬을 비롯한 동료들의 뒤편. 허공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구덩이로 향했다. 더 정확히는 그 앞에 우두커니 선 채 미동도 않는 군터 크렘보르에게로.
* * *
단숨에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비틀림의 근원과 마주한 순간, 그의 정신은 또 다른 곳으로 빨려들어갔다. 그것을 의식했을 때, 그는 이미 새로운 세상의 한복판에 있었다.
조용한 초원. 푸르다못해 윤기가 흐르는 초목과 그 위를 노니는 온갖 생물들. 평화로움을 한 장면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바로 이럴 것 같은 광경. 누구라도 보는 순간 마음이 평온해질 법한 광경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누군가는 이 광경을 보고 신의 땅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터는 혀를 찼다.
이 모든 것이 환상이라서? 아니다. 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지독한 미련과 분노 같은, 감정의 찌꺼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찌꺼기가 자아내는 악취 또한.
기억이다. 심상이다. 아마도 과거의 어느 시점. 몰락하기 이전의.
‘관심 없다.’
구구절절한 사연 따위 궁금하지 않다. 어차피 뻔한 것 아닌가. 이 마물 역시 예전에는 신으로,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패했고 몰락해서 지금에 이르렀겠지. 뻔하다. 주인 없이 땅을 뒹구는 부러진 창칼 만큼이나.
궁금하지 않다. 공감할 생각도 없다. 승자는 우뚝 서고 패자는 쓰러진다. 어쩌면 그 또한 순환이 아니겠는가. 패했으면서도, 쓰러졌으면서도 되도 않는 미련을 품고 버티는 이놈은 그 자체로 하나의 비틀림이다.
[네 울부짖음은 그저 공허할 뿐이다]
군터의 발 밑에서 파문이 일었다. 그의 발치에서 시작된 파장이 퍼져나가자 푸르름만이 가득하던 세상이 그 파장을 따라 회색으로 물들어갔다. 군터는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는 힘을 쓰지 않았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이 모든 허상을 비웃고 부정한 것이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이 낙원 같은 세상은 붕괴했다.
잿더미 위에 지어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연약한 거짓을 지탱한 것은 알량한 소망과 믿음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부정했으니 기둥이 사라진 건물처럼 무너져버린 것이다.
* * *
푸스스-
보울룬은 코앞까지 다가왔던 검은 촉수가 흩어지듯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두 흩어지고, 종국에는 땅 위로 가라앉고 나서야 보울룬은 멈췄던 숨을 내쉬었다.
‘풀? 아니, 가지인가?’
방금까지 생사를 다투던 적.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재가 되어버렸다. 아니, 그 재마저도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에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부서질 것처럼 말라비틀어진 잎이며 줄기 같은 것들뿐이었다. 아주 작고, 메마른.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