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0화
창 한 자루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다. 아무리 오랫동안 창을 다뤄온 달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찌르거나 베는 것.
사람 하나를 찌르고 벨 수 있다. 혹은 그보다 조금 더 대단한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창 한 자루로 산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 산이 아무리 작은 산이라고 해도.
군터도 당연히 그것을 알았다. 그는 창 한 자루로 열 명, 아니 백 명도 해치울 수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할 줄 알았다. 고개를 최대한 뒤로 꺾어야 간신히 눈을 마주칠 수 있을까 말까 한 거대한 괴물을 창 한 자루로 어찌하는 것은 그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실 세상에서라면 말이다.
그래. 현실 세상에서라면 불가능한 일. 그러나 이곳은 현실 세상이 아니다. 이곳은 현실과 그 너머 또 다른 세상의 경계 같은 곳. 시계마저 일그러지고 뒤섞이는 혼란스러운 세상.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라면,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현실에서의 군터 크렘보르는 보통 사람보다 조금 더 강한 몸과 조금은 특별한 힘을 지닌 한 사람에 불과했다. 속에 아무리 강대한 본질을 품고 있다 한들, 결국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신의 한계는 명확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다르다. 이 기괴한 공간에서, 군터는 오히려 더 자유로워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착각일까? 아니면.
[후우.]
* * *
산처럼 거대해진 인마가 마물과 격돌한다. 산마저 꿰뚫을 수 있을 것 같이 크고 날카로운 창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뻗어 나가, 그대로 마물을 찔렀다.
기적.
그것은 기적이었다. 적어도 보울룬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아! 그런 것인가.’
헬라르본님께서는 우리의 존재가, 우리에게 내린 축복이야말로 신께서 이 땅을 굽어보시는 증거라고 하셨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에게 선택받은 그분의 첨병으로서 부끄럼 없이 용기 있고 당당하게 싸워나가야 한다고 하셨다.
의심하지 않았다. 감히 어찌 의심하겠는가. 이 은혜가, 이 기회가 나에게 왔음에 전율하며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다섯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피나는 노력 덕이었다.
‘내가 아니야. 우리가 아니다.’
주교께서도 미처 보지 못하셨던 것이다. 주교라고 해도 그분 역시 수많은 신의 종 중 하나에 불과했기에. 인간의 눈과 마음을 가진 어리석은 이 가운데 조금 덜 어리석은 종 중 하나에 불과했기에.
‘그래.’
마물의 몸이 기운다. 벼락이 쳐도, 하늘이 무너져도 그 자리에 몸을 세우고 있었을 것 같은 거대한 뱀이 비명을 지르며 무너진다.
‘저분. 저분이야말로.’
확신한다. 그 옛날, 황제께서 처음 계시를 받고 세상에 나오셨을 때. 그분을 뵙고 곧장 무릎을 꿇었다는 추종자들도 분명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전능하신 주께서는 이미 한참 전부터 안배해두셨던 거다. 단지 어리석은 이들이 그분의 안배를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악!”
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비명이 보울룬의 상념을 깼다. 그제야 보울룬은 자신이 아직 전장에 있음을, 쓰러지지 않은 마물이 아직 다섯이나 남아있음을 깨달았다.
“산….”
조금 전까지 입이 부르트도록 외쳤던 말을 다시 이어가려던 순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왼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몸이 기운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말이 쓰러지고 있는 것인가? 아니. 그 또한 아니다. 말은 동요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오히나!’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던 정령이 곧장 보울룬을 감쌌다. 보울룬은 그를 감싸는 허상의 뱀으로부터 영적인 안도감을 느끼며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냉철하게 살폈다.
‘감각이 흔들린다. 적어도 이 주변에서는 나만 영향을 받고 있어. 이것 또한 영적인 감각에 따른 차이인가?’
아무리 복잡한 눈속임이라고 해도 맹인에게는 소용이 없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감각의 뒤틀림도 감각이 예민한 이가 아니면 영향을 받지 않거나 받더라도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만다. 처음 보울룬이 마물의 기운에 탈진하다시피 했던 것과 같은 이치였다.
‘단순히 감각만 흔드는 것이라면…괜찮아.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단언컨대 보울룬은 그의 평생에 이렇게 짧은 순간에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가능하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이게 그, 위기의 순간에만 간혹 나타난다는 초인적인 능력인 걸까.
‘아니. 그게 아니야.’
깨달음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낭비이며, 굳이 그런 낭비를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행할 필요가 없다는 추리에 기반했다.
‘실제로 기울고 있는 거다.’
조금 전까지는 흐릿해도 단단했던 땅이 지금은 균형을 잡기 힘들 정도로 흐물흐물해졌다. 그것도 그런 변화를 의식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언제부터? 아니. 어디까지지?’
보울룬은 깨닫자마자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즉각 몸을 낮추며 균형을 잡았다. 그의 그런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주변 병사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했지만 역시였다. 이미 저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의심 없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건…너무 말도 안 되는 괴물이 아닌가.’
이곳에 모인 병력만 해도 수천이 훌쩍 넘는다. 그만한 대병력을 한순간에 바보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이 속임수가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테지만, 중요한 것은 한순간이라도 이만한 병력이 무력화됐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래도…전부는 아니야.’
당장 자신만 해도 불완전하게나마 사태를 파악하고 반응하지 않았나. 아마 자신의 동료들 역시 그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쿵!
지축을 울리는 굉음. 완전히 쓰러진 거체. 그 앞에서 돌아서는 한 쌍의 인마.
뒤틀리고 기운 세상 속에서도 그들의 모습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그 굳건함은 보울룬의 눈에는 마치 신전의 기둥처럼 강하고 신성해 보였다.
‘오히나.’
평생 높은 곳은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무지렁이가 기회를 잡았다. 그것도 신께서 내려준 기회를.
두려움을 모르는 자는 둘 중 하나다. 바보거나 미치광이거나. 그리고 보울룬은 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두려움을 아는 지극히 평범한 사내였다. 기회의 줄을 잡고 오르면서도 혹여 어느 순간 갑작스레 떨어지지는 않을지, 줄이 끊어지지는 않을지 항상 걱정하고 두려워했다.
그가 지금까지 미칠 것 같은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품은 열망과 신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끝 모를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둘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 달래왔음에도,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는 또 다른 중압감에 시달려왔던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은, 심지어 주교께서도 선택받은 자라며 치켜세워주시지만 보울룬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렇게나 특별한 존재인가? 아니. 그렇지 않다.
그런 의심을 품는 자체가, 보울룬 자신이 그런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한다.
만인이 경외하는 특별한 존재란 바로 저런 것이다. 폭풍 앞에 홀로 서 있더라도 당당히 우뚝 설 수 있는 자.
‘우리는 성전의 최전선에 나와 있는 거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확신한 이 순간. 우습게도 보울룬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가벼워졌다. 그렇게 가벼워진 마음은 곧 전신에 힘을 불어넣었고.
‘그러니 이곳에서…우리를 증명하자.’
뱀 정령의 시선이 뒤틀린 공간을 꿰뚫었다. 그와 동시에 보울룬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그의 영혼에 똬리를 튼 정령은 이미 형제처럼 친숙한 존재지만, 그렇다 해도 감각의 합일은 여전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어지간해서는 시도하지 않지만, 지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어디지?’
하나였던 것이 여섯으로 나뉘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본래 하나였던 존재가 개별적인 여섯이 된 것인가? 아니면 여섯으로 나뉘었더라도 여전히 하나인 것인가?
자그마한 의심이었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이 두 눈으로.
‘어디냐.’
정령의 눈으로 바라보자 바로 알 수 있었다. 지상에 보이는 여섯 마리 뱀은 마물의 본체가 아니었다. 아니, 본체가 맞긴 하지만 일부에 불과했다. 보이지 않는 더 큰 부분이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가지를 보고 이어지는 줄기를, 본체와 뿌리를 짐작하듯이.
보울룬의 눈길이 이곳저곳을 훑었다. 그러나 자신감과 힘으로 충만하던 두 눈에 곧 의혹이 깃들었다.
‘보이지 않는다. 어째서?’
아무리 집중해서 살펴보아도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설마 잘못 짚은 것일까? 하지만 그의 본능은 지금도 틀리지 않았다고 강변하고 있었다.
쾅!
또 한 번의 굉음. 또 한 마리의 뱀이 쓰러졌다.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번에는 아예 머리가 댕강 잘린 흉측한 몸뚱이가 땅에 달라붙어 꿈틀대고 있었다. 잘린 머리는 그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멍하니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바라보던 보울룬은 또 하나의 깨달음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래. 변하지 않아.’
여섯이었던 것이 다섯이 되었고, 이제 넷이 되었다. 그런데도 이 주변을 뒤덮은 기괴한 뒤틀림은 조금도 걷히지 않았다. 이 뒤틀림은 마물에게서 기인한 것이 확실하니, 마물에게 이상이 생긴다면 자연히 뒤틀림 역시 어떤 식으로든 반응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 어떤 반응도 없다. 어째서?
* * *
“…….”
두 번째 뱀을 쓰러뜨린 후. 군터는 멈춰 섰다.
보울룬이 느낀 것을 그가 느끼지 못할 리 없다. 그가 위화감을 느낀 것은 첫 번째 뱀을 찌르고 난 직후였다.
‘잡초 같군.’
깊이 뿌리를 내린 잡초는 몇 번 짓밟는다고 해도 곧 언제 밟혔냐는 듯 다시 고개를 든다. 눈에 보이는 부분을 베어낸다고 해도 마찬가지. 잡초를 진정으로 없애기 위해서는 땅속에 파고든 뿌리를 뽑아야 한다.
그런데 그 뿌리는 어디 있는가. 애초에 존재하기는 하는가?
여섯 마리 뱀에게 머물던 시선이 조금 더 멀리, 넓게 옮겨갔다. 이제는 본래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을 정도로 뒤틀린 시계. 처음에는 마물의 존재와 그 힘 때문에 현실과 이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으로 추측했지만, 의심을 품고 보니 조금 달라 보였다.
경계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 것인가? 마물의 힘이, 그 존재감이 이 정도로 대단한가? 아니다. 피부에, 영혼에 닿는 느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
군터가 창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갑옷처럼 둘렀던 전의는 사라지고 탐구자의 차분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래. 알겠군.’
답은 금방 나왔다. 허무할 만큼 간단히. 그런데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사고의 폭이 좁아졌기 때문이다. 적을 앞에 두었으니 쓰러뜨려야겠다는 마음이 앞섰고, 그렇게 마음을 정한 이상 다른 모든 것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착각하고 있었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음에도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런 방식으로 보는 데 익숙했기 때문이다.
‘신기하군.’
한 가지 더 변명하자면, 몰랐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깨져라.]
작은 대상을 향해 창을 겨누는 대신, 크게 드리운 장막을 걷어내기 위해 팔을 뻗었다. 하늘에서 땅까지, 모든 것을 뒤덮은 암막을 걷어낸다.
[■■■■■――!]
뱀 두 마리를 쓰러뜨릴 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격렬한 반응. 육체보다 영혼이 먼저 떨리며 반응하지만, 그런 반응이 오히려 제대로 짚었음을 알려주었다. 뒤틀림만이 가득했던 세상에 다시 한번 거대한 의지가 파고들었다.
얼룩이 씻겨나가듯, 뒤틀림이 사라져갔다. 그 변화는 어두운 새벽에 막 고개를 들기 시작한 태양보다도 극적이었다.
두터운 장막 뒤. 마침내 드러난 마물의 본모습. 그를 본 군터의 입매가 뒤틀렸다.
허공에 둥실 떠 있는 거뭇한 구덩이. 허공에 어떻게 구덩이가 떠 있을 수 있겠냐마는, 그 외에는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어디로 파고든 것인지, 혹은 이어진 것인지 알 수 없는 구덩이. 그 입구는 족히 작은 연못 크기 정도는 됐고, 안을 살필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입구에서는 오물 같은 것이 간헐적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마치 생물이 침을 뱉는 것처럼.
구덩이의 입구가 상식 밖으로 거대하다 보니,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오물 같은 것의 양도 상당했다. 한 번 튀어나온 오물이 땅에 닿으면 그 자체로 커다란 웅덩이가 될 정도로.
지금까지 신물 날 정도로 경험했던 뒤틀림은 바로 그 웅덩이에서 느껴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