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9화
안개 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더 진하고, 불쾌하며, 찐득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안개 속에.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가 흐릿하게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감각의 교란. 마물의 의도는 아닐 것이다. 이 공간 자체가 몸의 감각을 흐트러뜨리고 있다.
‘묘하군.’
갑작스레 다른 세상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이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몇 번 해본 적이 있지만, 정신만 흘러 들어간 것이 아니라 몸까지 같이 옮겨왔다는 점이 다르다.
시계(視界)가 뒤엉킨다. 흐릿하지만 분명한 형태를 갖췄던 것들이 어느 순간 기이하게 일그러지고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기이하고 기괴했지만 자연스러웠다. 물웅덩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휘휘 젓는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이 일그러졌으나 앞으로 내달리는 이들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의 사고가 그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 기괴한 세상, 혹은 공간과 뒤섞인 탓이다. 아니, 뒤섞였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잠식됐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정면에서 부딪치지 마라! 둘로 나뉘어 좌우로 긁고 지나간다!”
그런 상황에서 군터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터져 나왔다. 그 일갈에는 혼탁해지기 시작한 정신을 일깨우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 * *
마물은 거대했다. 아직 병사들은 보지 못했지만, 군터는 그 형체를 뚜렷하게 직시할 수 있었다.
여섯 개의 머리. 길쭉한 목에서 뻗어나온 여섯 개의 촉수. 군터는 그것이 꼬리 같다고 생각했다. 모가지에 꼬리가 달려있다는 것이 아무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촉수일 것이라 추측했었지만.
‘이미 말이 안 되는 것 투성이가 아닌가.’
전장에 선 것을 자각한 순간부터 군터의 머릿속은 한 순간도 쉼없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보이는 모든 것을 머릿속에 담았고, 분석했으며, 추측했다.
저놈의 전투방식은 어떨까. 덩치가 크니 육체적인 힘으로 밀어붙일까? 하지만 이 기괴한 공간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공간은 분명 놈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어쩌면 놈의 힘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역시…….
“가깝다! 이제 놈의 모습이 드러날 거다! 긴장을 늦추지 마!”
“걱정할 것 없다! 신께서 함께 하신다! 믿음은 가장 어두운 순간에 가장 밝게 빛나는 법! 의심하지 마라! 용기를 가져라!”
문득, 두 명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거의 모든 소리가 흐릿하게 흩어지는 이곳에서 분명한 소리를 낸다는 것은 이 두 명의 목소리에 그만한 힘이 실려있다는 뜻이다.
군터는 잠깐 이 귀에 익은 듯하면서도 낯선 목소리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했고, 곧 두 명의 애송이를 떠올렸다. 오면서 봤던 놈과, 하잘에서 봤던 놈. 제 영혼에 각기 손님을 하나씩 두고 있던 놈들.
예상외로 쓸만할 것인가? 작은 기대가 피어올랐다.
우-우우!
놈들의 말대로, 곧 마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뒤틀린 공간 속에서, 놈은 모습을 온전히 내놓고 있었다. 점액 덩어리 같은 몸뚱이. 여섯 개의 머리. 몸뚱이와 머리를 잇는 목에 달린 촉수들이 다리처럼, 혹은 기둥처럼 땅을 짚고 있었다.
‘어디.’
습관적으로 활에 손을 가져가던 군터가 곧 멈칫했다. 아무리 봐도 저 거대한 놈이 화살 몇 대 맞는다고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일 것 같지 않았다. 급소를 맞춘다면 또 모르지만, 글쎄.
“창.”
바로 뒤에서 달리던 병사가 창을 던졌다. 군터는 보지도 않고 그것을 낚아챘다. 그리고 깊게 숨을 한번 들이쉰 후, 역동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한번 보자.’
말 위에 앉은 상태에서 낼 수 있는 전력. 거기에 그의 혼에 깃든 죽음까지 듬뿍 실었다. 나무로 된 창대에 순간 가느다란 금 몇 개가 생겨났다.
부웅!
바람이 갈라진다. 길쭉한 선이 군터와 마물 사이를 한 순간 이었다. 군터의 손을 떠난 한 자루 창은 가장 앞, 한가운데에서 좌우로 흔들거리던 머리의 정중앙에 박혀들어갔다. 그리고.
“■■■■-!”
뭔가가 터져나왔다. 어떤 이들에게는 뭔가 스쳤나 싶은 미풍이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영혼까지 뽑혀나가는 것 같은 광포한 폭풍이었다.
“…….”
군터에게는 굳이 따지자면 후자였지만, 그는 몰아치는 감정과 힘의 물결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몸부림치는 마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다시 한번 외쳤다.
“창!”
먹혔는가? 그런 것 같다. 하지만 크지는 않다. 지금 놈이 저렇게 날뛰는 것은 익숙하지 않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분노 때문이다. 실질적인 피해는 그리 대단치 않다. 창은 박히긴 했지만 꿰뚫지 못했으며, 동물으로 치면 이마 한가운데에 파고들었음에도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먹히기는 했다.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간단명료하다. 저 빳빳한 모가지가 꺾일 때까지, 놈이 더 울부짖을 수 없게 될 때까지 공격하는 거다.
부웅-!
두 번째 창이 손을 떠났다.
* * *
‘커헉!’
입은 벌렸으나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목소리를 낼 수도 없을 만큼 큰 충격, 고통이었기에.
이번의 충격은 확실히 엄청났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정도는 덜할지라도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인지 보울룬은 빠르게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건가.’
거세게 몸부림치는 마물이 보인다. 정확히는 이리저리 흔들리는 여섯 개의 머리들만이 보일 뿐이지만, 그렇다 해도 꽤나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왼쪽이다! 신호하면 즉시 왼쪽으로 트는 거다!”
그리 외치며, 보울룬 자신도 앞쪽에서 전해질 신호를 기다렸다.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며 긴장을 달래던 그는 깃발 하나가 불쑥 올라간 것을 보자마자 고삐를 당겼다.
“지금이다!”
빠르게 방향을 틀고 마물과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미리 빼들고 있던 창을 던졌다. 정확히 보고 던진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반쯤은 어디에든 맞으라는 심정으로 손을 비운 후, 보울룬은 얄팍한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런!”
슬쩍 고개를 뒤로 돌린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뒤따라오는 머릿수가 처음보다 조금 줄어 있었다. 설마 그 짧은 순간에 마물에게 당한 것은 아닐 테니, 저들끼리 뒤엉켜 낙오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도 외쳐댔건만 자신의 목소리가 제대로 닿지 않은 것일까. 보울룬은 쓰린 속을 외면하며 다시 마물에게 시선을 돌렸다.
불에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멀찍이 거리를 벌리고 있는 자신들과 달리, 마물과 붙다시피 한 상태에서 방향만 틀고 있는 일단의 병력이 보였다.
저들이 누구인지 안다. 크렘보르 장군을 따라온 자들. 솔롬의 병사들이다. 당연히 그들을 이끌 고 있는 이는 크렘보르 장군이고.
‘한 몸처럼 움직이는군.’
마치 한 마리 뱀 같았다. 가장 앞에 선 기수가 머리라고 하면 뒤따르는 이들은 몸통과 꼬리. 머리가 아무리 역동적으로 움직여도 몸과 꼬리는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른다. 그들이 마물의 주변을 스치듯 지나칠 때마다 점액 덩어리가 크게 출렁거렸다. 그들은 창을 던지는 대신에 활을 쏴대고 있었는데, 화살 대부분이 점액 속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저 거대한 적을 상대로 화살이라. 마물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아하니 그래도 효과는 있는 것 같았다.
‘정말…비교되는군.’
보울룬은 뒤따르는 병사들이 낙오하지는 않았는지 눈대중으로 확인하며 다시 방향을 틀었다.
공명심이야 충만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눈이 멀지는 않았다. 자신과 자신의 병사들은 저렇게는 못한다. 마상궁술은 시도해본 적도 없고, 저렇게 지근거리에서 민첩하게 움직일 자신도 없다. 하지만, 어설프더라도 어설픈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겠나.
‘명령 받은대로.’
무리하지 않는다. 겁먹고 움츠러들지도 않는다.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다.
“자! 우리도 다시 간다!”
마물의 주의는 거의 붙다시피 한 채 주변을 맴도는 크렘보르 장군과 그의 병사들에게 쏠려 있다. 이쪽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 보울룬은 힘차게 외치며 병사들을 이끌었다. 그런데 그 순간.
“■-■■■■!”
여섯 개의 머리가 일제히 하늘을 보며 울부짖었다. 그러더니 마물의 몸체, 점액 덩어리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 * *
“물러나라!”
먼저 외친 것은 뒤따르는 병사들이 반응할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다.
마물이 하늘을 보며 포효한 것은 말머리를 튼 직후였다. 군터와 병사들은 빠르게 마물로부터 거리를 벌렸고, 그러면서 마물의 변화를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점액으로 가린 마물의 몸뚱이 외에, 겉으로 드러난 머리와 목 등에는 창과 화살 등이 상당수 박혀 있었다. 만신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몰골. 그러나 수십, 수백 개의 상처에서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군터는 여섯 개의 머리가 갑자기 몸뚱이에서 뛰쳐나오는 것을 보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아니, 뛰쳐나온 것이 맞나?
“저, 저게……!”
기겁하는 목소리들. 군터는 다시 한번 입을 열어 그 모든 혼란을 단번에 가라앉혔다.
“동요하지 마라! 애초에 여섯 마리였을 뿐이다!”
몰랐다. 솔직히 놀랍기도 하다. 그러나 그뿐이다.
마물의 기운은 변하지 않았다. 감정도, 힘도 그대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 저것은 하나이면서 여섯이며, 여섯이면서 하나다. 하나의 몸뚱이가 여섯으로 나뉘는 것이, 그러고도 멀쩡히 움직이는 것이 가능한가? 글쎄. 아무래도 가능한 모양이다. 당장 저 마물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
뱀. 아니, 도바뱀인가? 허공에서 머리부터 떨어져내린 그것들은 땅에 닿는 순간 빗물처럼 땅으로 스며들었다. 말 그대로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본 그 누구도 마물이 진정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두근거리는 가슴이, 떨리는 몸이, 그것이 아직 이곳에 도사리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개!”
갑작스러운 명령. 즉시 반응한 것은 소수에 불과했다. 재빠르게 움직인 이들은 지척에서, 혹은 멀리에서 튀어나온 여섯 마리의 뱀을 볼 수 있었다.
떨어질 때도 머리부터 떨어졌고, 다시 튀어나올 때도 머리부터 튀어나왔다.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쩍 벌린 입. 그것들은 아무것도 없던 땅속에서, 말 그대로 불쑥 나타났다. 검게 변하고, 환영처럼 일렁이는 땅에 반쯤 몸을 감춘 채.
“아아악-!”
여섯으로 나뉘었다고 해도 마물의 덩치는 여전히 거대했다. 기이할 정도로 크게 벌린 놈의 입은 한번에 장정 서넛을 삼키고도 남았다. 놈은, 놈들은 미처 흩어지지 못한 무리를 베어 물었다. 놈에게 물린 병사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놈의 입 속으로 사라졌고 놈의 거체에 부딪치고 깔린 이들은 처절한 비명을 토했다.
* * *
‘이 공간 자체가 문제다.’
방심하지 않았다. 단지 간과했을 뿐.
놈은 특별하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괴물. 경계에 걸터 선 채 제 뜻대로 안과 밖을 오간다. 여섯으로 나뉜 것도, 땅속에 스며들 듯 사라진 것도 모두 그 덕에 가능한 일일 터.
작정하고 숨고자 한다면 잡을 수 없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도가 없다. 그러니, 지금 잡아야 한다. 놈이 ‘이쪽’으로 건너온 지금.
[후우.]
긴장은 하지 않는다. 이미 최고조에 오른 집중력을 한번 더 가다듬는 것뿐.
콱!
늘 그래왔다. 마지막 순간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이 손에 쥔 창 한 자루. 그 자신감과 믿음은 단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
쿵!
저 커다란 놈을 이 작은 창 한 자루로 어찌할 수 있는가?
쿠웅!
물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래.]
속에서 흘러나오는 자그마한 속삭임, 아니 독백.
군터는 그것을 듣지 못했다. 그의 온 정신은 뻗아나가는 창 끝에, 그리고 그 창끝이 향하는 목적지에 쏠려 있었기에.
[역시, 그대는 그들과 같다. 동류야.]
* * *
착각인가?
두 눈을 부릅 뜨고 보고 있으면서도, 보울룬은 스스로를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물에 비하면 너무나 작아보이던 한쌍의 인마가, 한 순간 마물보다도 더욱 거대해졌다.
“어?”
혼란. 의심. 보울룬이 한번 눈을 깜빡였을 때, 산처럼 거대해졌던 인마는 다시 정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섯으로 나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작은 동산만한 마물을 향해, 홀로 달려들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