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8화
성수. 얼핏 들으면 보물이라도 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사제들이 손을 담그고 기도한 물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하지만…글쎄. 신앙심이 깊지 않은 이들이 보면 사기꾼의 말장난과 다를 바 없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수의 판매는 오랜 세월 교단의 주 수입원 중 하나였다. 아무리 교단의 위세가 드높다고 해도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을 그렇게 꾸준히 팔아올 수 있었겠는가. 어느 정도는 효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의 힘이 담겼는지, 성직자의 믿음이 담겼는지는 몰라도 성수는 확실히 신비로운 힘을 갖고 있다. 물에 희석해서 마시면 몸의 피로가 풀리고 가벼운 병증이 완화되기도 하며, 장복하면 잔병치레는 신경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건강해진다. 이 정도만 해도 일반 백성들이 여윳돈이 남으면 신전으로 걸음하기에 충분한데, 성수에는 이 밖에도 온갖 효능이 더 있다. 아는 이들 사이에서는 성수를 만드는 성직자들조차 성수의 효능을 다 알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였다.
“들이붓지 말고 손으로 묻혀서 발라라! 많이 쓴다고 효과가 더 뛰어난 것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나!”
미리 언질을 받은 장교들이 급박한 와중에도 병사들을 다그쳤다. 성수는 귀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흔한 물건도 아니다. 성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성직자들이 정신을 집중해서 기도해야 하기에 단시간에 많은 물량을 만들어낼 수가 없다. 그렇기에 하잘의 거의 모든 성수를 긁어오다시피 했음에도 확보한 양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단숨에 끝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싸움이 얼마나 길어질지도 모르니 처음부터 마구잡이로 써댈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많이 쓴다고 해서 반드시 효과가 더 좋은 것도 아니고.
“성수에 적신 칼날은 모든 부정한 것들을 벨 수 있다! 화살도 마찬가지!”
사람은 약하다. 짐승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육신도 그렇지만 그들의 마음, 즉 정신은 더 약하다. 그렇기에 그들은 늘, 자신들은 인지하지 못할지라도 의지할 대상을 찾는다.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아니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엇이든 간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군터는 성수의 신비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누가 알려줘서 안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알게 된 것이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관련 지식이 어느 정도 있는 이들이라면 아마 확신하지는 못하더라도 의심이나 추측 정도는 하고 있을 터였다.
성수는,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어느 정도는 사람이 바라는 바를 이루어준다. 건강해지기를 바란다면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땅이 비옥해지기를 바란다면 어느 정도는 그렇게 만들어준다. 이렇게만 들으면 전능한 힘을 지닌 것 같지만,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까지만 그렇다. 성수의 힘은 어디까지나 미미한 수준으로, 단번에 기적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엄밀히 따지면 성수의 기적은 사용자들이 만들어낸 환상에 가깝다. 감기에 걸려 골골대던 사람이 성수를 복용하고 몸이 조금 나아진 후에 성수의 힘으로 몸이 나았다고 여기며 신전에 기부금을 내는 것처럼. 하지만 사실 그의 몸이 자연적으로 회복한 것인지, 성수의 힘 덕분에 회복한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게 믿기에 그런 것처럼 여겨질 뿐이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
화살 비가 쏟아져도 꿈쩍하지 않으며 맹렬히 다가오는 마물에게 손에 쥔 작은 칼 한 자루가 통하리라는 믿음. 그 믿음이 칼을 적신 물에 깃들고, 그럼으로써 자그마한 기적을 행사하는 것이다.
저 힘을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만약 저것이 신의 힘이라면, 제국이 숭배하는 원신이라는 존재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존재이리라.
하지만…글쎄.
신의 기적이라는 것을 앞에 두고도, 군터는 여전히 신을 믿지 않았다.
* * *
화살촉 끝부분에 성수를 살짝 묻힌 화살이 다시 한번 비가 되어 쏟아졌을 때, 마물의 맹렬하던 기세도 아주 잠깐이지만 주춤했다. 그리고 동시에 뿔 나팔 소리 같은, 웅장하다는 생각까지 드는 굉음이 마물에게서 터져나왔다.
우우우-!
일부는 귀를 틀어막았고, 일부는 있는 대로 인상을 찡그리면서 온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것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 안에 깃든 힘은 소리에 닿는 모든 이에게 크고 작은 타격을 주었다. 또한 특히 기감이 예민한 이들일수록 더 크게 영향을 받았다.
“아악!”
보울룬이 새된 비명을 토하며 말 위에 쓰러지듯 몸을 움츠렸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고, 심장은 누가 양손으로 쥐고 쥐어짜는 것처럼 답답하고 고통스러웠다. 주변 병사들의 시선이 모두 쏠린 와중에, 보울룬이 덜덜 떨면서 간신히 몸을 세웠다. 핏발 선 두 눈에서 피가 살짝 섞인 눈물이 줄줄 흘렀으나 그는 그런 것을 의식조차 할 수 없었다.
‘미치겠군.’
억지로 몸을 일으켰지만 말 그대로 억지로였다. 조금만 긴장을 푼다면 이번에는 아예 낙마해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이 지휘하는 병사들 앞에서 추태를 보일 수는 없다는 위기의식이 약해지려는 정신을 강하게 붙들었다.
‘오히나! 오히나! 정신 차려라!’
그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뱀의 모습을 한 정령 역시 충격을 받았는지 눈에 띄게 희미해진 채 연신 비틀거리고 있었다. 보울룬은 그런 정령의 이름을 몇 번이고 속으로 외쳤다. 그게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비틀거리던 뱀이 천천히 머리를 들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보울룬은 그 시선에 조용하지만 강렬한 분노가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차라리 분노해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솔직히 조금은 가볍게 생각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물이라는 존재가 엄청나게 위험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받아들이면서도, 내심 이 정도 군세라면 어렵지 않게 토벌할 수 있으리라 낙관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안일한 마음을 기저에 깔고, 기회라고 여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깨달았다. 이것은 기회임과 동시에 위기라는 것을. 미래를 내다보기 전에 이 순간의 승리와 생존을 위해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것을.
말 그대로 생사를 건 싸움. 보울룬은 점점 몸에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불안해하는 말의 목 뒤를 위로하듯 부드럽게 쓸었다.
“물러나라! 언덕까지 물러나! 빨리!”
성수를 묻힌 화살 비에 조금 주춤하기는 했지만, 마물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은지라 일단 언덕까지 물러나려는 듯했다. 이는 미리 준비해둔 계획이라 군은 별문제 없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물의 포효 때문에 몸이 굳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병사들은 별로 크게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그렇군.’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방금의 포효는, 영적으로 트인 이들에게 강하게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반대로 말하면, 영적인 감각이 거의 없다시피 한 이들에게는 별 영향을 주지 못한 것이다.
‘노린 건가? 아무튼,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필시 다른 동료들 역시 자신과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자신과 비슷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겠지.
신전의 모든 가르침을 받고 관직을 받은 이는 모두 다섯. 후에 더 많은 ‘선택받은 자’가 신전을 나설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들 다섯이 전부다. 그들은 동류이며, 동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경쟁자이기도 했다. 아무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그들 모두 자연스럽게 그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꿈도 꾸지 못했던 출세의 길. 처음에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정도로 얼떨떨했고, 모든 것이 어렵기만 했으나 이제는 안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다. 당장 지금도 말 위에서 이렇게 많은 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지 않은가.
‘오히나. 잘 부탁한다.’
처음에는 두려웠고, 다음에는 낯설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함께였던 친구인 것처럼 친숙하고 믿음직스럽다. 꿈도 꾸지 못했던 출셋길을 열어줬기 때문일까? 아니. 분명 그것만은 아니다.
“준비는 다 마쳤나?”
“예. 그런데…괜찮으십니까?”
부관이 걱정과 꺼림칙함이 섞인 얼굴로 물었다. 보울룬은 그제야 눈 아래로 굳은 붉은 얼룩을 닦아냈다.
“괜찮다. 신께서 주신 힘이 마물의 사악한 힘에 반응한 것일 뿐이야.”
“아아.”
대충 둘러댄 말에 불과했으나 부관은 감탄하며 납득했다. 보울룬을 비롯한 선택받은 자들은 군 경력이 전혀 없는 신출내기였기에, 그 휘하의 장교들은 능력은 물론이고 그 심성,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신앙심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검증받은 이들로 이루어졌다. 보울룬도 그것을 알았기에 까다로운 상황이 생길 때마다 신의 이름을 팔곤 했다. 처음에는 그것에 대해 죄의식도 가졌었으나,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제껏 몇 번이나 그런 일을 반복했음에도 신벌이 내리지 않았으니, 신께서도 이 정도는 용서해주시는 것이라 여겼다.
“대장님께서는…….”
“난 괜찮다.”
보울룬이 허리춤에 찬 검을 두드리며 답했다. 어차피 이 검을 직접 휘둘러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성수가 문제가 아닐 것이다.
“산개! 산개하라!”
모든 병력이 언덕 위에 자리를 잡았다. 마물은 여전히 사납고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놈은 험한 지형도 평지를 달리는 것처럼 움직였다. ‘검은 강’이 끝없이 뻗어 나오며 모든 것을 뒤덮었고, 거대한 마물이 그 위를 부드럽고 빠르게 이동했다. 그것을 본 순간, 보울룬은 이 고지(高地)도 저것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전군에 명령을 내리고 있는 지휘관도 마찬가지였는지, 곧 산개 명령이 떨어졌다. 본격적인 전투가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알리는 지시였다.
* * *
평범한, 달리 말하면 무지한 사람들은 술사라고 하면 신비를 탐구하고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는, 반쯤은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생각과는 달리, 대부분의 술사는 신기한 재주를 한두 개 정도 지닌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물론 그 신기한 재주 한두 개만으로도 세상에서 대접받기에는 충분하지만, 실용적인 면에서 그들 개개인의 힘은 그리 대단한 수준이 아니다. 대규모 병력이 맞붙는 전투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하지만 개개인이 아닌 다수의 술사가, 하나의 목적을 위해 힘을 합친다면 그들은 정말 반쯤은 신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바로 지금처럼.
“지금이오!”
쿠구구-
땅이 일어났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흙먼지가 거세게 일며 대량의 토사가 크게 솟구치더니 언덕의 경사를 따라 내달렸다. 마치 설산에서 일어난 눈사태처럼, 시야를 가리는 자욱한 흙먼지와 함께 쏟아져 내렸다.
우-우우우!
마물도 이 작은 재해는 무시할 수 없었는지, 끝도 없이 뻗어 나오던 검은 물결도 잠시 주춤했다. 그리고 시어문드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신께서 지켜보고 계신다! 용감히 싸워라!”
그의 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단의 기마가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그러나 시어문드는 당황하지 않았다. 당연히 이럴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부러질 듯 거칠게 흩날리는 대장기. 가장 앞에 유독 눈에 띄는 한 쌍의 인마(人馬).
“장군께서 앞장서신다!”
늘 그렇듯, 용맹한 대장은 전군의 사기를 끌어 올린다. 그가 결코 패하지도, 도망치지도, 쓰러지지도 않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장군을 따르라!”
대장기를 휘날리는 일단의 기마는 검은 물결 속에서 내달렸다. 눈으로 보면서도 이것이 현실인가 의심이 될 정도로 기이한 광경이었다. 분명 사람과 말은 검은 물에 가려 보이지 않는데, 그 위로 깃발이 툭 튀어나와 빠르게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보라! 저 검은 강은 허상에 불과하다! 두려워하지 말고 달려라!”
와아아-!
그제야 완전히 용기를 얻은 병사들이 함성을 토하며 힘껏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