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7화
삭풍이 불어오는 계절.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갑옷 위에 덧대 입은 털가죽을 움켜잡으며 이를 악물어야 했건만, 지금은 그런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이마 위에서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갑자기 하늘 위의 태양이 힘을 쓰고 있는가? 아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더위도 더위지만, 그보다는 어느 순간부터 공기가 엄청나게 습해졌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어도 몸이 흠뻑 젖을 만큼.
‘가까워지고 있군.’
시어문드가 땀을 훔치며 바싹 마른 수림을 보았다.
앙상하게 헐벗은 나무들. 황량한 겨울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저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한창 비가 올 때보다도 더 눅눅했다. 이 기이함이 자아내는 불길함은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굵어질수록 덩달아 강해졌다.
“이래서야 불이 제대로 붙을지 모르겠습니다.”
수하가 혀를 차며 걱정하자 시어문드는 저 뒤쪽에 저들끼리 뭉쳐있는 술사들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이 도울 테니 그런 것은 걱정할 필요 없다.”
“괜찮은 것 맞습니까? 저 치들, 아까부터 영 상태가 안 좋습니다만.”
수하의 말대로, 조금 전부터 술사들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안색이 썩은 과일처럼 변한 것은 물론이고, 괜히 몸을 떨거나 혼자서 작게 중얼대는 등 정신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들이 눈에 밟혔으나 굳이 그 부분에 대해 지적하지는 않았다. 술사라는 자들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더 크게 영향을 받는다.
‘거의 다 온 거다.’
저들은 마물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저들의 불안증세가 심해졌다는 것은 마물이 상당히 가까워졌다는 뜻일 테고.
“준비하시오.”
군터의 지시가 있기도 전에 시어문드가 그들에게 언질을 주었다. 술사들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기는커녕, 그의 상관이 해준 말에 따르면 평범한 수준에도 못 미치는 기감을 지닌 시어문드였다. 그런 그가 술사들에게 그리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문외한인 그가 보기에도 눈앞의 광경이 심상치 않은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름끼치는군.’
적막.
조용한 수준을 넘어선 완전한 고요. 새들의 지저귐은커녕,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섬뜩한 침묵.
이곳까지 오는 길에 적잖은 괴물들과 마주쳤다. 군대를 앞에 두고도 그것들은 흉성을 억누르지 못했다. 사람을 향해 이빨을 들이대는 것만이 삶의 목적인 것처럼, 놈들은 불에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앞뒤 없이 덤벼들었다.
그런데 지금 그것들은 어디 갔는가. 그 흔한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뒷덜미가 묘하게 간질거림과 동시에 확신이 들었다. 이곳에는 아무도, 무엇도 없다는 확신이.
“불을 준비해라.”
제법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크지 않은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 * *
깡마른 산야에 불길이 번졌다. 물기를 머금은 풀과 나무에 불을 놓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술사들이 나서니 순식간에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아름답군.’
평소였다면 이런 시답잖은 감상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묘하다 못해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적막 속에 붉게 타오르는 산야를 눈에 담고 있으니 여태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모를 감성적인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놈이 반응할까요?”
시어문드는 그렇게 물으면서도 그런 물음 자체가 우습다고 생각했다. 불은 바람을 타고 빠르게 번지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시야가 닿는 모든 곳을 뒤덮을 기세였다. 그렇다면 저 어딘가에 있을 마물도 당연히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대로 타죽을 것이 아니라면.
“물론.”
아무런 부연 설명도 없지만, 그 어떤 긴말보다 더 믿음이 간다. 언제나 그랬듯이.
믿고 따르면 그뿐이다. 그러면 불분명하던 것이 분명해지고, 어렵던 것이 쉬워진다.
“준비는?”
“완벽합니다. 이제 놈이 나오기만 하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울림이 전신을 쓸고 지나갔다. 아니, 몸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숙한…….
영혼의 떨림 그 생경한 경험에 시어문드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러나 굳은 와중에도 그의 눈은 뜨여 있었고, 그렇기에 불타오르는 세상 속에서 일렁이는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온다.”
나직한 한마디. 시어문드의 사고는 그 말이 들리고 조금 뒤에야 정상적으로 기능했다.
“온다! 마물이 온다! 물러나! 서둘러라!”
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놈이 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술사들이 느끼는 감각일까? 하지만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터무니없는 무언가가 밀려오고 있다는 실감만 할 뿐.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시어문드는 저것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저 물결에 휩쓸리면 대단히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확신과도 같은 예감에 휩싸였다.
“장군?”
병사들을 뒤로 물리며 본인도 말머리를 돌리던 시어문드는 문득 그의 상관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먼저 가라.”
“예? 그게 무슨.”
“난 보고 가겠다.”
입술을 깨문 시어문드가 망설임 없이 말을 달렸다. 늘 그랬듯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콰콰콰-!
불타오르던 거목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형편없이 으스러진다.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부수고 으깨며 전진하고 있으나,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 맹렬한 돌진에서 막대한 분노가, 힘이 느껴진다.
“…….”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검은 강의 용’이라던가. 너무 거창한 이름 아닌가.
군터는 용이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다. 그가 아는 것은 용이 한때 무지한 야만인들에게 신으로 숭배받았을 만큼 강대한 존재이며, 그중 하나가 줄카에게 목숨을 잃었다는 것 정도였다.
‘비슷한가.’
아직은 너무 먼 데다, 불길에 가리기까지 했으나 군터는 그것의 형태를 그럭저럭 확인할 수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그마저도 다 제각각이기는 했지만)에 따르면 용은 일반적인 종(種)처럼 정해진 형태를 지닌 생물이 아니었다. 용이라는 종을 결정짓는 것은 육신의 외형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영혼으로, 용의 영혼만 지니고 있다면 새의 육신을 지녔어도 용이고 벌레의 육신을 졌어도 용이다. 다 제각각인 이야기 중, 그나마 가장 유명하고 인정받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저 마물이 정말 용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면 기괴한 외관은 제쳐둬도 좋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혼. 그렇기에 군터는 기괴하고 거대한 몸뚱이 안에 깃든 마물의 영혼을 주시했다.
‘…….’
그는 용의 영혼을 접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줄카의 영혼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줄카. 그 이름 앞에 붙는 이명은 용살자다. 그냥 붙은 이름이 아니다. 그 이름대로 그는 용을 살해했으며, 살해한 용의 모든 것을 취했다. 뼈, 살, 피. 그리고 영혼까지도.
언젠가 군터는 그에게 그와 자신이 왜 다른가에 대해 물었다. 군터가 보기에 줄카는 자신보다 훨씬 더 오래전에 초월자가 되었음에도 자신보다 역동적이었다. 때문에 군터는 잠시나마 그가 평범한 사람 같은 감정을 지녔다고 오해하기도 했었다.
‘용의 영혼이라.’
줄카는 그 물음에 웃으며, 그와 자신이 다른 것은 영혼의 차이 때문이라고 했다. 영혼은 모든 존재의 본질이니, 같은 초월자라고 해도 본질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사람이 저마다 다르듯 초월자라고 해도 사소한 부분에서의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다. 뭉뚱그려 초월자라고 칭하지만 그들도 분명히 서로 다른 존재이니 당연한 것이다. 거기에, 줄카는 특별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영혼에는 온갖 것들이 뒤섞였다. 자세히 묻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얼추 짐작이 갔다.
콰콰콰-!
저 마물에게서, 정확히는 저 마물의 영혼에는 줄카와 비슷한 구석이 전혀 없었다. 즉, 저것은 용이 아니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세상사가 그렇듯, 저 마물의 이름 역시 무지하고 약한 이들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용은 아니라고 해도 저것의 힘만큼은 진짜였다. 어쩌면 용에 버금갈지도 모른다. 군터는 진심으로 그렇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나마 가늠해볼 수 있을 테니까.
“장군!”
벌써 꽤 멀리 물러난 시어문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슬슬 물러나 달라는 나름의 의사표시고 부탁이다. 무시해도 상관없지만, 군터는 이번에도 기우는 마음을 외면했다. 이런 사소한 본능의 부정이 쌓이고 쌓여 언젠가는 올 ‘그때’를 최대한 늦춰준다는 것을 줄카로부터 배운 그였다.
게다가, 어차피 잠시 미뤄두는 것뿐이다.
군터는 불의 장벽 너머에서 흐릿하게 비치기 시작한 거대한 형체를 일견하고 시어문드의 목소리를 쫓았다.
* * *
쾅! 쾅!
굉음이 연달아,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그에 맞춰 땅까지 울려대니, 누구라도 저 너머에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심각한 무언가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도.
“저게 뭐야…….”
누군가의 얼빠진 목소리는 대다수의 마음을 대변하는 한마디였다. 판니른에 재앙이 닥친 후 이야기 속에서나 접했던, 혹은 거기서도 접하지 못했던 기괴한 것들을 눈으로 보고 직접 상대해보기도 했지만 단언컨대 그중 무엇도 저만큼 기괴하지는 않았다.
‘검은 강의 용’이라고 했던가? 확신하건대 저것에 대해 보고한 정찰병들은 저것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자신들의 상상을 섞어 보고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것에게 그런 얼토당토않은 이름이 붙었을 리 없다.
그것은 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진흙에 가까웠다. 시커먼 오물이 범람하는 강처럼 땅을 뒤덮으며 밀려왔다.
“이런 건 계획에 없었는데…….”
시어문드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군터가 입을 열었다.
“진짜가 아니다.”
“옛?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말이 잘못 됐군.”
보다 적합한 표현을 찾기 위해 잠시 뜸을 들이던 군터는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느릿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넘어온 것이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억지로 모습을 드러낸 것뿐이다. 어떤 면에서는 유령과 비슷하지.”
시어문드는 군터의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군터가 저 강, 아니 오물의 물결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시커먼 것에 휩쓸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십니까?”
“익사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다른 쪽으로 영향을 받겠지.
뒷말은 삼켰다. 시어문드는 저 오물에 휩쓸려도 익사하지는 않는다는 말에 안도했는지, 크게 한숨을 쉬고는 저것은 환영일 뿐이라며 병사들을 다독이기 시작했다. 술사들도 창백한 얼굴로 그에 동조하며 불안을 잠재우는 데 조력했다.
“…….”
뒤쪽이 한창 시끄러워진 사이. 군터는 밀려오는 오물 속에서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마물을 눈에 담았다.
머리는 넷, 다섯. 아니 여섯. 여섯이다. 전체적으로는 뱀을 닮았다. 길게 뻗은 목에는 꼬리인지 촉수인지 모를 길쭉한 것이 여섯 개가 달려있다. 여섯 개의 목에 그런 것이 여섯 개씩 달려 있으니 총 서른 여섯 개. 여섯 개의 머리가 연결된 몸통은 전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간혹 드러나는 부분도 흐릿해서 형태를 살피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오물 속을 유영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감췄다를 반복했다. 한번 가라앉고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놈의 모습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
마치 물속의 물고기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마물을 보며 군터는 놈이 경계에 걸쳐있는 존재임을 알아차렸다. 놈이 깔고 앉은 오물처럼, 놈 역시도 물질적인 형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다리와 몸은 문 밖에 둔 채로 머리만 문턱너머로 들이민 상태라고 할까.
‘까다롭겠군.’
이제 보니 금방 시어문드에게 횡설수설 댄 비유가 꽤 그럴듯했다. 저놈은 유령과 비슷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 말은 일반적인 수단으로는 상대하기가 굉장히 까다로운 존재라는 뜻이고.
“쏴라!”
이곳에 오기 전. 군터는 시어문드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군대가 주둔한 성을 무너뜨렸을 정도로 위험한 마물이락고 하니, 온전히 싸움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슈슈슝!
옳은 판단이었다. 세상을 너덜너덜하게 찢어놓을 기세로 쏟아진 화살비가 땅에 닿은 빗물처럼 스며들 듯 사라지고, 뒤이어 날아간 불화살들도 똑같이 증발해버렸다. 그러자 시어문드도 당황했는지 곧바로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시어문드는 시어문드였다. 당황한 와중에도 그는 궁리했고, 나름의 답을 찾아냈다.
“성수(聖水)! 성수를 꺼내라!”
걱정할 것 없겠군.
기민하게 돌아가는 등 뒤의 사정에서 신경을 끈 군터가 이제 거의 다다른 검은 물결에 다시 시선을 던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