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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66화 (966/1,064)

966화

운바소르 아실은 겁쟁이일지언정 얼간이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겁쟁이이기 때문에 주변의 위협요소들을 어떻게든 파악해두려고 노력했다.

“‘검은 강의 용’은 그 특징 덕에 위치를 파악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아마 장군도 놈이 가까이 다가오면 어렵지 않게 놈의 접근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겁니다.”

“용?”

“놈을 직접 본 병사가 붙인 이름입니다. 놈이 진짜 용인지, 아니면 용을 닮은 무언가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운바소르 아실에게서 전해 들은 마물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검은 강의 용’이라 이름이 붙은 마물은 검은 강 같은 것을 소환한다고 했다. 놈은 오직 그 강 위에서만 움직이며, 때문인지 놈의 주변은 자욱한 안개가 깔린다고 했다. 그 안개는 마물과 가까워질수록 시야를 완전히 가릴 정도까지 심해진다던가. 어쩌면 마물에게 접근해 살필 용기가 없었던 병사들이 둘러댄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참고할 만한 부분이었다.

“작은 성만 한 크기라니.”

시어문드가 혀를 찼다. 어이없다는 듯 쓰게 웃은 그가 말했다.

“강을 소환한다? 몸을 숨기는 것만이 아니라 강물로 적을 쓸어버릴 수도 있겠군요. 그런 괴물이 실존한다면 그런 놈을 어떻게 잡는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시어문드는 정찰병들의 두려움, 혹은 영악함으로 인한 과장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으리라 확신하는 듯했다. 군터도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과장이 섞여 있을 것이다. 운바소르 아실이 한 이야기를 그대로 믿는다면, 그런 괴물이 어찌하여 갇혀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패배자들일 뿐이다.’

마물이니 뭐니, 아무리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한들 결국 패배하여 신주에 갇혀있던 것들에 불과하다. 군터가 별 고민 없이 마물을 사냥하겠노라 선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물이든 뭐든, 어차피 거인왕에 의해 한번 쓰러진 것들이다. 그가 할 수 있다면 자신도 할 수 있으리라.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군터에게 있어 이것은 스스로에 대한 시험이었다. 강대한 상대를 가늠하고, 또 그와 자신 간의 거리를 가늠하기 위한.

* * *

사냥이든 전투든 이름만 다를 뿐 그 본질은 다르지 않다. 결국은 상대와 내가 생사를 두고 다투는 싸움일 뿐. 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해야 하는 노력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상대를 파악하고, 상대의 장점을 최대한 없앤다. 동시에 이쪽의 장점을 최대한 높인다.

“개방된 지형으로 유인하는 것이 최선일 듯합니다. 미리 불을 준비해야겠고, 바람이 부는 곳이면 더 좋겠군요.”

정보는 많지 않다. 그나마 강 같은 것을 소환한다는 것. 그리고 그 때문인지 안개가 낀다는 것까지.

“그 강…이라는 것은 역시 술법 같은 힘이겠지요?”

“아마도.”

“그렇다면 술사들이 놈을 억제할 수 있기를 바라야겠군요.”

“글쎄.”

강을, 혹은 강처럼 보일 만큼 많은 물을 소환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 마물이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군터는 마물의 힘에 감탄하기보다는 굳이 그런 식으로 거창하게 힘을 뽐낸다는 점에 의구심을 가졌다.

강을 소환하고 속에 몸을 숨긴다. 과시가 아니라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리하는 것일 터.

“모을 수 있는 한 최대한 끌어모으겠습니다. 강하게 나가도 되겠습니까?”

“물론.”

군터의 허락을 얻은 시어문드는 그 말 그대로, 강압적이다 못해 폭압적이라고 보일 만큼 거침없이 술사들을 끌어모았다. 하잘의 유력 가문에 속해있는 술사들조차 실력이 괜찮다는 평만 있으면 전시라는 명목으로 모두 소집했다. 그 과정에서 시어문드는 꼼꼼하게, 그리고 정중하게 서신을 보냈으나 그 내용은 고압적이고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말이 소집이지 실상 징집이나 다름없었다.

서신을 받은 유력 가문들, 그리고 그마저도 받지 못하고 끌려오다시피 동원된 술사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그들은 감히 군터 크렘보르를 찾아가지는 못하고 그나마 말이 통하는 총독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총독조차 그들을 도와주지 못했다.

“군사(軍事)에 있어서만큼은 그 고집을 꺾을 자가 없소. 전임 총독도 그러하셨고, 심지어 전하께서도 군사에서는 최대한 그의 뜻을 들어주시는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런데 바로 얼마 전에 그에게 군권을 맡긴 내가 지금 그에게 싫은 소리를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남의 이름을 파는 것은 당면한 문제를 회피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물론 그렇게 문제를 회피한다고 해도 그 뒷감당을 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 이번만은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다.

‘이럴 때는 또 도움이 되는군.’

군터 크렘보르. 여러모로 대단한 인물이다. 황자마저 총애할 수밖에 없는 군재도 그렇지만, 사람 자체의 존재감 또한 엄청나다. 마주하고 있으면 감히 그의 말에 딴지를 걸 엄두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이자들이 자신에게 달려온 것 아니겠는가. 감히 그의 앞에서 불만을 늘어놓을 배짱이 없어서 말이다.

따지고 보면 만만한 사람이 된 것이지만, 운바소르 아실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군터 크렘보르에게 군권을 맡길 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짐작한 그였다. 물론 이렇게까지 빨리 일어날 줄은 몰랐지만.

‘익숙함은 많은 것을 속이는 법이지.’

운바소르 아실은 그간 제법 만만한 총독으로 여겨져 왔다. 물론 전임 총독, 그러니까 캄브라이 가문의 후광을 지닌 그를 우습게 보는 이들은 없었지만 운바소르 아실이라는 개인은 뒷배만 대단한 허수아비 총독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운바소르 아실 또한 그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 인식을 고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몇 차례 한 것은 사실이나, 그 과정에서 그는 늘 자신의 뒷배를 은연중 내세우곤 했다. 그편이 편리하기도 할뿐더러,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움. 그것이야말로 운바소르 아실이 처신의 근간으로 삼은 방식이었다.

그의 지위는 어디까지나 전임 총독 로드니 캄브라이의 신임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이는 바꿔 말하면 로드니 캄브라이의 신임이 사라지는 순간 그의 지위도 불안정해진다는 뜻. 물론 운바소르 아실은 로드니 캄브라이의 가신이나 다름없었고, 총독이 된 지금도 캄브라이의 후광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지 않겠나.

총독의 측근이었던 때와 총독이 된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 아무리 허수아비라도 총독쯤 되면 다루는 쪽에서도 어느 정도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허수아비라도 가볍게 들었다 내려놨다 할 수 있는 크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윗사람들은 의심이 많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선 자리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달라지듯, 높은 자리에 올라 여러 사람을 부리다 보면 자연스레 의심이 늘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낮에 해가 뜨고 밤에 달이 뜨는 것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운바소르 아실은 그 이치를 잘 알았다.

아무리 자신이 변함없는 충성을 보이더라도 그의 주인은 안심하지 못할 것이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의심의 씨앗을 키우다가, 언젠가는 어떠한 계기로 싹을 틔울지도 모른다. 그 계기는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심각한 것일 수도 있다.

‘지금뿐이다.’

자신을 질시하거나 견제하려는 이름 모를 잡것의 모함. 혹은 총독이라는 자리에 보다 가까운, 예를 들면 혈육을 앉혀놓고 싶다는 욕심. 혹은 그저 머리가 커 조금은 부담스러워진 수하를 치워내고 싶다는 단순한 변덕. 뭐가 됐든, 자신의 주인이 그런 마음을 품는 순간 자신의 지위는 위태로워진다. 단순히 총독 자리를 내려놓는 것에서 그치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나, 그럴 일은 없다. 자신의 주인이 무려 총독 자리를 잃고서 불만을 품었을 것이 분명한 옛 심복을 얌전히 놔둘까? 설령 자신이 불만을 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의심하지 않을까?

운바소르 아실은 총독이 되었을 때부터, 정확히는 자신이 총독 자리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 때부터 줄곧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을 궁리해왔다.

그러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허수아비 총독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그나마 그의 주인이 전선으로 가 있기에 숨통이 트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의 목 뒤에는 주인의 손과 연결된 실이 달려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은 그에게 있어 기회였다. 아마도 주 전체가 외부와 단절되었을 것이고, 사방에 위협이 산재해 있는 이 순간이야말로.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그 무도함이 실로…….”

“어쩌겠소. 지금은 그의 능력이 필요하오.”

동조하는 척을 해주면서도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한다. 실질적으로 취하는 조치는 아무것도 없으나 입만 몇 번 뻥긋해준 것만으로도 상대는 그럭저럭 위안을 얻고 돌아간다.

무도하고 난폭한 무장과 너그러운 총독. 극명하고도 아름다운 대비가 아닌가.

군터 크렘보르가 그의 악명을 높이 세우면 세울수록, 그 그늘에 선 자신의 이름은 더욱 따뜻하게 빛난다.

판니른의 총독으로서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는 역시 판니른의 유력자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그들의 태도는 다소 미온적이었다. 물론 이쪽에서도 멀리 있는 주인의 눈치를 살피느라 조심스럽게 행동하기는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잘만 해도 기반이 도시 밖에 있던, 예를 들면 대농장을 지니고 있던 농주라던지 광산 채굴업을 주업으로 삼고 있던 몇몇 귀족 가문들은 그들의 사업 기반을 송두리째 날린 것으로도 모자라 식솔들을 대거 잃고 반쯤 몰락해버렸다. 비교적 피해가 적은 것으로 추정되는 하잘이 이럴진대 다른 곳은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하잘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권력은 공백을 용납하지 않는다. 부 역시 마찬가지. 늦든 빠르든, 이 혼란이 잦아들면 빈자리에 눈이 돌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을 터. 다른 의미로 눈이 돌아간 이들이 다 무너진 집을 가리키며 내 것이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힘을 잃은 그들의 목소리는 그리 멀리 뻗지 못할 것이다.

분명 지금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있을 터. 운바소르 아실은 이미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서서히 변해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 * *

볼가이엔. 이제는 볼가이엔이었던, 무너진 성터가 되어버린 곳에 군터와 그의 군대가 다다랐다.

“깔끔하게 무너졌군요.”

볼가이엔의 성벽은 그럭저럭 멀쩡했다. 서쪽 성벽을 제외하고.

“한쪽에서 들이쳤고, 그대로 속절없이 밀린 모양입니다.”

멀쩡한 나머지 성벽들과 달리, 서쪽 성벽은 완전히 허물어져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렇게 통째로 무너질 수 있을지 궁금할 정도였다.

“요사스러운 기운이 남아있습니다.”

“그 마물이…‘검은 강의 용’이 날뛴 것이 분명합니다.”

술사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들은 볼가이엔의 성터에 다다를 즈음부터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전에도 그리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들은 볼가이엔의 성터에 다다르자마자 무너진 서쪽 성벽에서 강렬한 기운의 잔향을 감지했고, 그것을 그대로 보고했다.

“그렇군.”

그들이 느낀 것을 군터가 느끼지 못했을까. 그는 진작부터 마물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볼가이엔의 성벽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놈의 위치는?”

“계속 주시하고 있습니다.”

마물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솔롬의 병사들로 구성된 정찰대는 한참 전부터 마물의 위치를 추적했고, 어렵지 않게 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을 보니, 영역을 구축한 모양입니다.”

괴물의 생리는 모른다. 하물며 마물은 더더욱.

그러나 어찌 됐든, 놈이 얌전히 한 자리에서 머물러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바로 시작하시겠습니까.”

“길게 끌 이유가 없지.”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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