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5화
헬라르본. 귀족 출신이라 본명은 더 길 테지만, 성직자들은 신의 품 안에 모두 평등하다는 원칙대로 짤막한 이름만을 사용한다. 그렇기에 그는 본래의 이름 대신 주교 헬라르본으로 불렸다.
이전에도 스치듯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리 인상적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그럴 가치가 없는 자라고 여겼기에 굳이 그 이름과 얼굴을 따로 기억해두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군터는 투명할 정도로 흐릿하게 남은 기억 속의 일을 거론하며 친밀감을 형성하려는 헬라르본의 노력을 외면하고 칼같이 그의 말을 잘랐다.
“그래서, 용건이 뭔가.”
“아…….”
억지로 웃고 있던 헬라르본의 표정이 끝내 굳었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장군.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역할이 있습니다. 주께서 부여하신 운명이지요. 장군께서 보시기에 저 젊은이들이 부족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주께서 부여하신 운명과 힘이 있습니다. 아직은 미숙할지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족함을 채워가겠지요.”
“얼치기가 많은 목숨을 책임지게 되면 그 끝은 대개 비극이지. 내가 원하는 것은 군인이다. 수십 수백을 죽음으로 내몰 얼치기가 아니라.”
“그들이 얼치기인지 아닌지 어찌 아십니까. 지금까지 그들은 제 역할을 잘 해왔습니다.”
“이제부터 마주해야 할 일들은 지금까지처럼 쉽지 않을 거다. 그때 가서 확인하면 이미 때는 늦다.”
단호한 군터의 말이 이어질수록 헬라르본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장군께서는…….”
“나는 알 수 있다. 그런 놈들을 한두 번 봐온 게 아니니까. 병졸이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봐왔지.”
경험론을 들먹이는 군터에게, 헬라르본도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주교인 그도 이 사내의 경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한미한 출신이지만 맨몸뚱이 하나로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도 이만한 경력을 지닌 이는 드물 것이다.
대개 이런 인물들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과 주관이 확고하여,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타협하려 들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 사내, 군터 크렘보르는 황자의 총신이 아닌가. 황자가 장차 제국의 주인이 된다면, 군터 크렘보르는 공신으로서 더욱 높은 자리에 앉게 될 터였다.
‘후우. 정말이지…….’
헬라르본이 말없이 속을 태웠다. 다른 이라면 이렇게까지 저자세를 보일 필요도 없다. 교단의 주교라는 지위는 제국 어디를 가더라도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이 사내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교단의 주교라고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아마 이자는 황도, 즉 본단의 주교가 오더라도 같은 태도를 보일 것이다.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오만함과 고집스러움은 근래에 본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 불쾌하고 까다로운 성정이 본인의 능력에 기반한다는 것.
‘어쩔 수 없는가.’
‘선택받은 자’들로 하여금 교단의 위세를 높이려 했지만, 그렇다 해도 군터 크렘보르의 비위를 거스를 수는 없다. 어떤 이들은 성직자들을 가리켜 세상 물정에 어두운 꽉 막힌 인사들이라 혀를 차지만, 정말 그렇게 어리석었다면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겠는가. 갓 성직에 몸을 담은 햇병아리라면 몰라도, 주교 정도 되는 위치에까지 오른 성직자들은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노련한 장사치 이상으로 셈에 능했다. 헬라르본 역시 그런 이 중 하나였다.
그는 순진한, 혹은 어리석은 몇몇 동료들처럼 선택받은 자들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주리라 믿지는 않았다. 분명 그들이 주의 축복을 받은 것은 감격해 마땅한 일이나, 헬라르본은 알고 있었다. 주께서는 결코 과실을 온전하게 내려주시는 일이 없다는 것을.
‘주의 은혜는 항상 시험을 동반하지.’
주께서 이 땅에 보내신 사도였던 황제 폐하조차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난적을 꺾어가며 이 대제국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에 비교할 바는 아니라고 해도, 어찌 별 고난도 없이 성업을 이루겠는가. 선택받은 자들은 고난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어쩌면 그 고난 앞에서 좌절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 사내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미지수인 선택받은 자들과 달리, 이미 그 능력을 몇 번이나 증명한 자. 오직 그 능력만으로 황자의 총애를 얻은 자.
그의 명성은 거짓이 아니다. 오만과 고집은 능력의 증명이며, 이 무지막지한 위압감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그들 가운데 장군의 눈에 차는 이는 없었습니까.”
“없었다. 하지만 둘 정도는 조금 더 지켜볼 만하더군.”
헬라르본은 그 둘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그 대신 그나마 둘이라도 이 사내의 눈에 들었음에 안도했다.
‘그나마 다행이군.’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스웠다. 분명 그의 몇몇 순진한 동료들은 얼굴을 붉혀가며 이 ‘오만한 무부’에 대해 규탄할 테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들은 그 어리석음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어리석지만, 다행스럽게도 용기는 지니지 못했으니까. 늘 그랬던 것처럼 적당히 좋은 말로 달래주면 못 이기는 척 화를 삭이겠지. 그 과정에서 피곤해지는 것은 자신과 같은 이들일 뿐.
숨 막히던 회담을 마치고 돌아 나오는 길. 헬라르본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 * *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놈들을 얼치기라고 평했고, 그게 사실이기도 했으나 그들이 지닌 단 한 가지 장점만은 군터로서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신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상징성이었다. 이미 선택받은 자들의 소문은 하잘 전체에 퍼져 있었다. 신전과 총독의 노력으로 만든 성과였다. 그들은 신이 이 땅을 굽어살피고 있음을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상징 그 자체였다.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시민들은, 나아가 병사들은 이 땅을 뒤덮은 재앙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군터는 그 용기를 굳이 나서서 꺾을 필요가 없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니, 요식행위라도 그것들을 써먹기는 해야 합니다.”
시어문드가 드물게 열변을 토했다. 이렇게 열성적으로 설득하지 않는다면 그의 무심한 상관이 ‘시민들의 생각 따위는 중요치 않다.’ 말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의 상관은 동의한다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시어문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습니다. 그래도 보울룬과, 그…로센이라는 녀석은 눈빛이 꽤 괜찮지 않았습니까?”
“글쎄.”
끈기, 혹은 독기가 있다고 해서 좋은 재목이라고는 할 수 없다. 물론 그마저도 못한 얼치기 녀석들보다는 낫겠지만.
불어오는 바람 앞에 뿌리째 뽑혀나가는가, 아니면 흔들릴지언정 버텨내는가. 그건 바람이 불어와야 알 수 있는 법이다. 뿌리를 땅속 깊숙이 단단하게 내렸다면 버틸 수 있을까? 그것도 모를 일이다. 불어오는 바람이 단순히 거센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폭풍이라면 수십 년을 버텨온 고목이라도 버틸 수 없을지 모른다. 반면, 간지러운 미풍 정도라면 이제 막 싹을 틔운 들풀이라도 너끈히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두 녀석이 쓸만한 재목일까? 그건 군터도 알지 못했다. 사실 궁금하지도 않았다. 쓸만한 녀석들이라면 어떻게 두더라도 알아서 두각을 나타낼 테고, 반대라면 신경 써준다고 해도 결국 변변찮게 스러져갈 테니.
“그래도 따로 신경 써줄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어쨌거나 지금까지 천부장으로서 일을 해왔으니까 말입니다.”
거창하게 소탕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실상 그들이 한 일은 전투라기보다는 사냥에 가까웠다. 압도적인 머릿수가 있으니 어지간한 괴물들을 잡아 죽이거나 밀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본인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시어문드가 보기에 그들의 싸움은 소꿉장난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웃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왜 그러겠나. 그들은 그들 나름의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 싸워온 것뿐이다.
‘실패해서는 안 되니까. 혹여 금이라도 갈까 애지중지 아낀 것이겠지.’
하잘의 시민들에게 있어 그들은 신의 은총이자 구원의 상징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실패하고 꺾이는 순간, 시민들이 품었던 희망은 그 이상의 절망이 되어 그들 모두를 집어삼킬 테니.
“분부대로 최대한 알아보았습니다만, 별다른 정보는 없었습니다. 송구합니다.”
“괜찮다.”
처음부터 별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 거대한 도시는 난리가 벌어진 직후부터 눈과 귀가 먼 것이나 다름없었다. 총독조차도 그러했으니, 시어문드가 최대한 노력한다고 해도 뭘 얻을 수 있었겠는가.
‘주교 녀석들도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거인왕이 이 땅에 온 것은 확실하다. 신주에 손을 쓰고 뭔가 일을 벌이고 있는 것 또한 확실하다. 그리고, 그 행사는 역시 상당히 비밀스럽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장군.”
“음?”
“하잘의 군대가 장군의 지휘하에 들어왔지만, 아직 그들을 완전히 손에 넣으셨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총독과 유력 가문들의 입김이 미치는 것도 그렇지만, 그보다 군심이 아직…….”
“무슨 말인지 알겠다.”
본래 하잘의 군대는 주 방위군에 속하지 않는다. 즉, 군터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독자적인 군대라는 뜻이다.
총독이 직접 나서서 지휘를 맡겼으니 명령을 내리면 따르긴 할 테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군터가 원하는 것은 그가 명령하면 불길에라도 거침없이 뛰어들 수 있는, 말 그대로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복종하는 군대였다.
“장군의 위명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남의 입을 통해 들은 것과 직접 보는 것은 다르지요. 군심을 얻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실적이 필요합니다.”
“그렇군.”
“예?”
“마침 생각나는 것이 있다.”
시어문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 *
“이건 아니야.”
보울룬은 먹구름이 잔뜩 낀 동료의 목소리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그의 동료는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제 할 말만 계속 이어갔다.
“총독 각하께서 그토록 당부하시지 않았나. 마물들과 충돌하는 것은 마지막까지 삼가야 한다고.”
“자네 혹시 겁먹었나?”
“겁은 무슨! 내 말은…….”
겁먹었구만.
로센은 언성을 높이려는 동료를 대충 달랜 뒤 오늘 떨어진 명령을 생각했다.
총독의 위임을 받아 하잘의 군대를 지휘하게 된 군터 크렘보르는 볼가이엔을 수복하겠다고 선언했다. 마치 시장에 가서 물건 하나를 사오겠다는 듯이 가볍게 말이다.
볼가이엔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아는 이들은 안다. 한순간 신의 축복이라는 것을 받아 마음에 날개가 돋아난 선택받은 자들도 군대가 주둔한 성을 소리소문없이 무너뜨린 강력한 괴물은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제 막 하잘에, 그것도 군대도 없이 달랑 호위 병력 일부만 대동한 채 온 자가 대뜸 볼가이엔을 수복하겠다니? 마물의 존재를 그도 알고 있을 테니, 반쯤 무너진 성의 터밖에 남지 않은 볼가이엔을 수복하겠다는 것은 곧 볼가이엔을 무너뜨린 마물을 상대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그의 볼가기엔 수복 선언은,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무모한 모험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 말. 직접 가서 해보지 그랬나.”
“조롱하는 건가?”
잔뜩 흥분한 동료가 으르렁거리기 시작하자 로센은 슬그머니 입을 닫았다. 입만 산 녀석이 한심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진심으로 비아냥거릴 생각은 없었다. 사실은 그 자신 역시 심정이 싱숭생숭하여 괜히 말장난을 친 것뿐이었다.
마물. 마물이라.
가슴이 뛴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