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64화 (964/1,064)

964화

“보울룬.”

담당 주교에게 보고를 마치고 신전을 나서던 중.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보울룬은 걸음을 멈췄다.

“로센.”

“크렘보르 장군을 만났다지?”

윤기가 흐르는 금발. 준수한 외모와 훤칠한 키. 한눈에 보기에도 좋은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 외관. 그래서인지 그의 걸음걸이에서는 힘과 자신감이 느껴졌다.

사내의 이름은 로센. 귀족은 아니지만 유서 깊은 유지 가문의 자식이며, 보울룬과 같은 ‘선택받은 자’였다. 신전에서 함께 교육바도 수행을 한 동기이기도 했고.

“…그렇네만.”

보울룬은 이 잘난 동기가 어색했다. 소작농의 아들과 유지 가문의 자식이라는 신분의 차이 때문일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려웠고, 천부장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떻던가?”

“어땠냐니. 그게 무슨 말인가.”

“하늘 위의 별 같은 분이 아닌가. 이런저런 소문이야 전부터 질리도록 들었지만, 소문과 실제는 늘 다른 법이니까.”

“만났다고 해봐야 말도 거의 못 섞어 봤네. 자네도 곧 뵙게 될 텐데, 내게서 듣는 것보다는 자네가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하긴. 그도 그렇군.”

군터 크렘보르가 돌아왔지만, 그의 군대는 서부 전선에 배치됐다. 친위대를 거느리고 왔다지만 실상 몸만 온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뛰어난 장군이라도 군대 없이는 힘을 쓸 수 없는 법이니, 총독은 하잘의 병력을 그에게 맡기려고 할 터. 그렇다면 자신들이 중용 받을 수밖에 없다. 로센과 보울룬을 포함한 모든 ‘선택받은 자’들이 그리 생각했다.

* * *

선택받은 자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천부장의 직위를 받고 활동 중인 이들은 다섯밖에 되지 않았는데, 사실 축복을 받은 이들은 더 많았다. 그들조차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함께 교육을 받았던 동기들이 못해도 열은 넘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은 얼굴을 보지 못하는 동기들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뜻이리라. 그들은 아마 지금도 신전에서 교육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 녀석들은 축복은 받았을지언정, 진정으로 선택받지는 못했다는 뜻이지.’

시시한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있는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은 좋지만 장남은커녕, 차남도 아닌 삼남. 위의 두 형제와는 나이 차이도 꽤 나는 탓에 나름 머리가 굵어졌을 무렵에는 이미 집안의 대소사가 두 형의 손에 돌아가고 있었다.

부족함 없이 자랐으나 그뿐. 귀여운 늦둥이 삼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허락되지 않았다. 무엇 하나 꿈꿀 수 없는 삶에 혈기왕성한 청년은 금세 염증을 느꼈다.

기적은 그러던 차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내게는 신께서 안배하신 운명이 있었던 거야.’

악취 풍기는 흙을 뒤집어엎는 것보다 훨씬 더 고귀한 운명. 신께서 자신을 위해 손수 준비해놓으신 영광스러운 길. 로센은 자신의 미래가 훨씬 더 거대한 세상에 닿아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땅에 드리운 재앙의 그림자 역시도 찬란한 미래로 향하는 밑거름에 지나지 않으리라.

주교께서도 그리 말씀하시지 않았나. 신의 안배가 그대들을 기다리고 있노라고. 형제들은 물론, 부친조차 감히 고개를 들어 쳐다볼 수조차 없는 존귀한 분께서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직접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주셨다. 그 순간 로센은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군터 크렘보르와의 조우는 특별한 존재가 된 자신의 또 다른 증명이었다. 신전의 존귀하신 분들과는 다른 의미의, 이전까지는 그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어야 했던 높으신 분 아닌가. 그런 이의 앞에서 당당히 어깨를 펴고 선다는 것. 상상만으로도 짜릿해지는 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 자신감이 충만했다. 몸과 마음에 힘이 넘쳤다. 그 어떤 과장도 없이, 새로 태어난 느낌이었다.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그러니까.

“으읍!”

“일어나! 적이, 아니 괴물들이 너희가 숨 다 돌리고 정신이 말똥말똥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줄 것 같나!”

이런 상황을 상상해본 적은 없다. 주인에게 매 맞는 개새끼마냥 땅을 구르고, 숨을 헐떡대면서 말 한마디 못하고 휘둘리는 이런 상황은.

‘뭐지?’

이해할 수가 없다. 믿을 수도 없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분명 동기들과 함께 군터 크렘보르의 부름을 받았고, 그와 처음 정식으로 마주한 자리에서 잔뜩 위축되어 그가 하는 말을 가만히 서서 들었다. 뭐라고 했었지? 한 번 시험해보겠다 했던가?

시험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자존심이 상했다. 반발심이 일기도 했다. 신께서 이미 나를 택하셨거늘, 아무리 무명을 날렸다고는 하지만 일개 무장주제에 우리를 시험하겠다고? 그렇다면 좋다. 보란 듯이 증명해주겠다. 우리는 당신이 오만하게 내려다 봐도 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커흑!”

보울룬이 옆을 구른다. 변변찮은 집안에서 나고 자란 것이 분명한 녀석. 하지만 멍청한 녀석은 아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자신에게 내려온 기회를 단단히 붙들고 버틸 수 있을 만큼의 독기도 지녔다. 표현한 적은 없지만, 로센은 처음부터 보울룬에게 묘한 경쟁심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도 그렇지만, 보울룬은 특히 더 신경이 쓰였다. 척 보기에도 가진 것 하나 없는 녀석이 악착같이 버티는 모습이 왜인지 모르게 시선을 끌었다.

믿을 구석 하나 없는 녀석이기 때문이었을까. 보울룬은 여간해서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어수룩함 속에 굳건한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그런 녀석이 지금, 자신과 똑같이 형편없이 땅을 구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정신없는 와중에도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일어나라! 다리 한쪽이 잘려나간 게 아닌 이상 절대 누워있지 마!”

봉을 들고 인정사정없이 후려쳐대는 몰아붙이는 녀석들도 마음에 안 들지만, 뒤에서 입만 나불대는 저놈은 할 수만 있으면 씹어 먹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웠다. 시어문드라고 했던가?

선택받은 자라는 신분을 내려놓고, 그저 한 사람의 군인으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췄는지 시험하겠다고 했다.

군인. 군인이라. 이렇게 땅을 뒹구는 게 군인의 자질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거지? 설마하니 괴물들과 직접 드잡이질이라도 하라는 건가? 그런 일은 병사들이 할 일이지, 우리가 할 일이 아니지 않나.

신전에서 교육을 받을 때도 이런 몸 쓰는 법 따위는 배운 적 없다. 그런데 어째서.

“으으…!”

두 다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로센은 일어섰다. 오기. 그리고 분노. 어떻게든 저 낯짝들에 한 방은 먹여주리라 다짐하며.

* * *

‘형편없군.’

사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보울룬이라는 녀석을 처음 봤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저 얼치기들은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술사로서 행세하겠다면 지금으로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저놈들은 천부장씩이나 되는 군인이 아닌가. 스스로도 군인이며, 적게는 수백에서 많으면 천에 이르는 병사들을 거느린 고위 장교이기도 하다.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기한 재주 한두 가지로는 부족하다.

이 우스운 짓은 두 가지를 시험한다.

첫째는 제 한 목숨 지킬 실력은 되는지. 아무리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제때 휘두를 줄 모르면 다 무슨 소용인가. 병사들과 함께 호흡해야 하는 장교는 언제나 목에 칼이 들어올 수 있고, 그 칼을 막기 위해 제 한 몸 지킬 정도의 실력은 갖춰야 한다.

둘째는 정신력. 한계까지 몰렸을 때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지를 봐야 한다. 여유가 있을 때 잘난 척하는 것이야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궁지에 몰렸을 때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것은 아무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못해도 수백 명을 이끄는 자가 ‘아무나’여서는 곤란하다.

그런 면에서 저 헛바람만 잔뜩 든 놈들은 한참 기준미달이었다. 단련은 둘째 치고, 제 몸뚱이 하나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놈이 없었다. 이런 부류를 잘 안다. 머릿속이 꽃밭으로 가득 찬 놈들.

‘그나마 둘 정도인가.’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면서도 눈이 죽지 않는 녀석이 둘. 하나는 올 때 보았던 보울룬이고, 한 명은 곱상하게 생긴 녀석이다.

“제 몸뚱이 하나 제대로 못 가누는 녀석들이 무슨 병사들을 지휘한다는 건가?”

엄밀히 따지면 개인의 전투 능력과 지휘 능력은 관계가 없다. 물론 지휘관이 잘 싸우기까지 한다면 좋기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별 상관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저들의 지휘 능력을 어찌 알아볼 것인가. 이 무의미해 보이는 시험의 목적은 저들의 바닥을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바로 지금처럼.

“후욱!”

보울룬이 숨을 고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세 명의 병사가 달려들어 그를 쓰러뜨렸다. 정신을 집중할 틈을 주지 않는 거다. 병사들은 그들이 시험하는 천부장들에게 술사와 흡사한 능력이 있음을 미리 전달받아 알고 있었다.

“크악!”

결국 ‘선택받은 자’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은 날이 저물어갈 즈음이 되어서야 처참한 몰골로 비틀거리며 떠나갔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가득했던 자존심과 자부심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충격과 혼란, 그리고 두려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건 말도 안 돼! 아무리 그 군터 크렘보르라고 해도 우리에게 이럴 수는 없어!”

말쑥한 인상의 사내가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로센은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슬쩍 곁눈질로 보울룬을 살피니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 멍하니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항의해야 하네. 주교님들께도 말씀을 드려야겠지. 우리는 신께 선택받았어. 아무리 그자가 명성이 높다 한들 감히…….”

그 말을 왜 아까는 하지 못하고 이제야 큰소리를 치는가. 로센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도로 삼켰다. 저 한심한 녀석에게 동료애 같은 것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대립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무엇보다, 사실 그는 저 녀석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의 앞에서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겠지. 입을 열기는커녕,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 역시 그러했으니.

‘범상치 않은 자이리란 것은 짐작했지만, 설마하니.’

신의 축복을 받아 정령을 받아들인 몸. 덕분에 영적인 눈이 뜨인 그는 평범한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보울룬을 보면 그의 안에 똬리를 튼 뱀 한 마리가 보인다. 지금 시끄럽게 구는 녀석을 보면 머리가 두 개인 개가 보이고.

하지만 군터 크렘보르에게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까마득하게 깊고 어두운 낭떠러지 위에 선 것 같은 아찔함만이 느껴졌다. 어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 아찔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로센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저 녀석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가지. 우리가 함께 목소리를 낸다면 그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네.”

“하아. 나는 빼주게.”

로센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런 사소한 일로 그분들께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아.”

“사소한 일이라고?”

“우리는 지금 군인이네. 그리고 크렘보르 장군은 우리의 상관이지. 좋든 싫든 받아들여야 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보울룬도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를 일견한 로센은 시끄러운 동기가 더 떠들어대기 전에 몸을 돌렸다. 등 뒤로 원망 섞인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입만 산 녀석이다. 만에 하나라도 녀석이 정말 신전으로 달려가 고자질을 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어쨌든, 그로서는 놈의 한심함에 어울려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