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3화
“장군! 신께서 드디어 빛을 내려주시는 것 같습니다.”
본래부터 독실한 신자였던가. 아니면 뒤따라오는 주교들을 의식하고서 하는 말인가. 운바소르 아실은 총독이라는 체면도 내팽개친 채 성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다. 하잘의 고위 관료들은 물론, 귀족들과 성직자들까지 이끌고서.
“나눌 이야기가 많겠습니다.”
운바소르 아실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늘어난 주름살과 흰머리 같은 외형적인 부분을 제외하더라도,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전혀 달랐다. 일전에는 조심스러운 야심가 같았다면, 지금은…….
“상당히 고생한 것 같습니다.”
시어문드가 작게 속삭였고, 군터는 무언으로 긍정했다. 짧은 시간 동안 판니른에 일어난 일들이 총독에게 여러모로 부담을 주었을 것은 당연하지만, 그 정도가 생각했던 것 이상인 듯했다.
“번잡스럽지요.”
이름을 기억하지도,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이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후. 군터는 운바소르 아실과 독대에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두 사람만이 실내에 남게 되자, 운바소르 아실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
“다들 아닌 척은 하지만,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 또한 예외는 아니었고 말이지요. 우리에게는 불이 필요합니다. 그 불이 희망이든, 용기든 간에 다 꺼져가는 빛을 살리기 위해서는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이 안 좋은가?”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길이 다 끊기고, 주도조차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로 고립되었다는 것 정도.”
“안 좋지요. 변명을 해보자면, 모든 일이 어떻게 대응할 틈도 없이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났습니다. 각지의 소식이 끊기고, 본적 없는 괴물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하기 시작했지요. 성문을 닫아걸고 사태를 파악하려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도시 전체가 마비되다시피 했습니다.”
군터는 이곳까지 오는 길에 보았던 초라한 움막들을 떠올렸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하게 펼쳐져 있던 난민촌. 그들이 모두 운바소르 아실이 말하는 피난민들일 터였다.
“자잘한 변명 따위는 됐소. 내가 알고 싶은 건 현 상황뿐.”
“아…하하.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변명과 핑계로 보신하는 것이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려서 말입니다.”
흐릿하게 웃던 운바소르 아실이 한순간 뚝 웃음을 그쳤다.
“말씀드렸듯, 좋지 않습니다. 그나마 축복받은 자들이 나타나 한숨 돌리긴 했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인근의 소탕을 진행하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신의 축복이 내려온 후, 교단의 인사들과…몇몇 신앙이 독실한 이들이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조금 과할 정도로 말이지요. 언제까지 비축된 물자만 축내면서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다는 명분에, 마침 신께서 축복까지 내려주셨으니 지금이야말로 이 시험을 돌파할 적기라고 하더군요.”
명분이야 그렇다 치고, 시험은 또 뭔가. 그 신의 축복이라는 것이 신앙인들에게 신의 기적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그대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군.”
“글쎄요.”
운바소르 아실은 말을 아꼈지만, 그 자체로 답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장군도 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신께서 내려주신 축복은 확실히 대단합니다. 평생을 농사나 짓던 무지렁이가 갑자기 수십 년을 갈고 닦은 술사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니, 이것이야말로 신의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만…이 사람은 걱정이 될 뿐입니다. 과연 우리가 지닌 힘이 과연 충분한 것인지.”
“무슨 말인가.”
“괴물들이 다가 아닙니다.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현상? 경계해야겠지만, 심각하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럼 뭐가 문제인가.”
“볼가이엔을 알고 계시지요.”
볼가이엔. 하잘의 북서부에 위치한 성이다. 판니른 주방위군의 주 거점 중 한 곳으로, 상주 병력이 이천 가량 되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 튼튼한 성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여섯 번째로 보냈던 전령이 황폐화된 성을 목격했지요.”
볼가이엔은 비록 오래되기는 했지만 철저하게 군사적인 용도로 설계된 성이다. 비축된 물자도 적지 않아 성문을 닫아걸고 버티기로 일관한다면 만 명의 적이 몰려와도 얼마간은 버틸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성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지성 없는 괴물들이 흉포함만으로 도모할 수 있는 성이 아니다.
“두렵고, 한편으로는 믿기지 않아 꾸준히 탐마를 뿌렸지요. 그리고 발견했습니다. 볼가이엔을 무너뜨린 것으로 추정되는 놈을.”
“…….”
안 그래도 어둡던 운바소르 아실의 얼굴에 한층 더 짙게 그늘이 졌다.
“어두운 강을 소환해서 그 속에 몸을 감추는 괴물이라더군요. 크기는 작은 산만하고, 놈이 움직일 때마다 주변이 놈이 소환한 강물에 잠긴다 합니다. 두려움에 질려 헛것을 보고 횡설수설한다고 생각해서 다시 주변을 탐색하게 했습니다만, 돌아온 자들이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쯤 되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그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정신을 차리려는 듯이.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오래 전부터 있었지요. 지금이야 기록으로 밖에 찾아볼 수 없지만, 그런 것들이 이 땅에 실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기록에, 그것들은 마물(魔物)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지요. 볼가이엔을 무너뜨린 놈은 옛 기록 속에나 나오는 마물이 분명합니다. 그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런 놈들이 한둘이 아니며, 얼마나 있는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마물이라는 것들이 얼마나 위협적인지는 모른다. 운바소르 아실이 이야기한 괴물, 아니 마물도 혼자서 볼가이엔을 무너뜨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일은 마물이 아니라 군주라도 불가능할 테니.
하지만 운바소르 아실이 이토록 불안해하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금 마물들은 일정한 영역 내에서만 머문다고 했다. 그 영역을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것들이 하잘에 출몰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자칫 지금 벌이고 있는 소탕(운바소르 아실은 수복이라고 표현했다) 작전이 그것들을 자극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그 어느 때보다 신앙심이 두터워진 성직자들은 신의 뜻이 함께한다며 두려울 것이 없다고 외치지만, 운바소르 아실은 그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 축복이라는 것도 이 사람이 보기에는…글쎄요. 다소 애매합니다. 놀라운 힘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불안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는 축복받은 자들 가운데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몇 있으며, 일부는 미치광이처럼 날뛰기도 했다고 했다. 그 사실이 외부로 퍼지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신전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들은 신의 힘은 너무나 강력한 것이기에, 아무리 축복이라고 해도 연약한 인간이 받아들이는 데는 어려움이 따를 수 있다고 했다. 축복을 받은 후로도 부단히 노력하여 그 힘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떤 의도로 그렇게 설명을 했건, 운바소르 아실은 그 말을 축복받은 자들이 불완전한 전력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의 능력이라는 것도 제각각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조차 제대로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지요. 싸움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온 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을 믿고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는 적을 상대한다?”
운바소르 아실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군사에 문외한인 이 사람이 보기에도 그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하물며 우리는 지금 전에 없는 위험에 직면해있지요. 문제는, 모두가 너무 현 상황을 낙관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는 듯 읊조리는 그. 하지만 군터의 눈에는 그들과 운바소르 아실이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는 그저 두려움의 방향성이 다를 뿐이었다. 한쪽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억지로 희망에 젖었고, 다른 쪽은 더 큰 두려움에 매몰되었을 뿐.
“하소연은 그쯤 하지.”
마물이라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제법 흥미로웠지만, 군터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그것이 아니었다.
거인왕이 판니른에 와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운바소르 아실은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속 편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을 테니.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거인왕이 신주에 손을 썼다. 무슨 의도에서 그런 짓을 벌였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의도가 이 땅에 악의로 작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헤이모라의 상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나?”
“헤이모라……. 예. 없습니다. 일이 터지고 난 후, 이 도시는 눈과 귀가 멀어버렸습니다.”
신의 기적에 목을 맨다고 하면 당연히 헤이모라에 머물고 있는 줄카에 먼저 생각이 닿을 수밖에 없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 일이 터지고 나서 곧바로 도움을 요청하려고 사람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닿지 않았을 것이고, 상황이 더 심각해진 이후로는 더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했겠지.
“장군. 이 사람은 군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게다가 본래 판니른의 군권은 장군께서 쥐고 계신 것이나 마찬가지였지요. 이제 장군이 돌아오셨으니 이 사람과 함께 이 어려움을 헤쳐나갔으면 합니다.”
운바소르 아실은 명백하게 한계에 봉착해 있다. 그는 권력자들 사이에서 줄다리기나 할 줄 알지, 제대로 된 총독으로서의 자질을 지녔는지는 의심스러운 자였다. 애초에 그가 총독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전임 총독 로드니 캄브라이의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로드니 캄브라이의 대리인이나 마찬가지였으며, 그 스스로도 버거운 상황을 맞닥뜨리면 자신이 캄브라이의 대리인임을 은연중 내세우곤 했다.
그렇기에 군터는 운바소르 아실을 총독으로서 대우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친 운바소르 아실은 자리를 비운 주인을 대신해 집을 지키는 개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 놈이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자는 둥,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우습고 가소롭기만 했다. 다른 때였다면 헛소리는 집어치우라고 면박이나 준 뒤 무시하고 등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여러모로 특수한 상황이다.
거인왕 아간투스베록. 말할 것 없는 강대한 존재. 그와 맞서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병력이 필요하다.’
서부 전선에 남은 병력을 끌어올 수 있다면 이런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테지만, 그럴 수는 없다. 군대를 두고 왔기에 전쟁 중에 몸을 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거인왕에 대적하려면 군대가 필요하다. 설마하니 그가 맨몸으로 이곳에 오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게다가 줄카의 행방을 아직 알 수 없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적이라고 확신하는 거인왕과 달리, 그에 대해서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적은 아닐 것 같지만, 그렇다고 아군이라고 보기에는…….
“그러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머리가 차갑게 식는다. 긴장감. 어쩌면 위기감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낯설고, 조금은 생소하게까지 느껴지는 감정을 느끼자 그동안 잊어버렸던, 혹은 잃어버렸던 오래된 감정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전의라는 이름의 감정이.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