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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62화 (962/1,064)

962화

“하잘의 군대?”

병사가 총독의 깃발 비슷한 것을 보고도 고개를 갸웃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알기로 하잘에 군대는 없었다. 군대인 척하는 머저리들이 있을 뿐. 그런데 저놈들이 놈들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괴물 사냥을 끝낸 군대는 언제 흩어졌냐는 듯 질서정연하게 한데 모이더니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적의가 없음을 알려주려는 듯이.

“총독의 깃발…맞군.”

동료의 말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초원 출신인 이 친구의 눈이 얼마나 좋은지는 그간 숱하게 봐와서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의심하지는 않았다. 단지 믿기 힘들었을 뿐.

‘별일이 다 있구만.’

도시를 지키는 병사들은 다 얼치기들만 있다고 생각했었다. 주도인 하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부 귀족 가문의 사병들이야 괜찮은 수준이라지만 그 수가 너무 적어 이렇다 저렇다 논하기 우습고.

“하잘의 군대라고?”

“예. 얼추 천 정도 되어 보였습니다. 장군을 뵙고 싶다고 하더군요.”

보고를 들은 시어문드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냥 바로 장군께 보고하면 되지 않나 싶었지만, 그는 가만히 기다렸다. 머리 좋은 이들의 생각은 따라가기 힘들다. 시어문드 또한 그렇다. 그래도 굳이 고생스럽게 따라가려 하지만 않으면 명령을 받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편하다.

“알겠다. 그들을 이곳으로 안내해라.”

“대장만 오라고 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전부 데려와.”

“알겠습니다.”

먼저 장군께 허락을 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 잠자코 따랐다. 시어문드는 독단적인 판단을 내려도 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이제껏 그랬듯, 이번에도 그는 장군을 실망케 하지 않을 터였다.

* * *

“크렘보르 장군을 모시고 있는 시어문드라 합니다.”

“하잘의 천부장 보울룬이라고 합니다.”

시어문드는 키는 조금 작지만 당당한 체구의 사내를 짧은 순간 빠르게 훑었다.

젊다. 우선은 그것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힘 좀 쓸 것 같이 생기기는 했지만 이 정도 나이에 천부장이 되려면 어지간한 능력으로는 힘들다. 게다가 하잘의 천부장 아닌가. 아무리 판니른의 병권이 방위군단에 넘어가다시피 했다지만 그래도 주도는 주도다. 어중이떠중이를 데려다 쓰지는 않는다.

‘뭔가 있기는 있군.’

게다가 보울룬? 흔한 이름은 아니다. 북부가 제국에 병합된 것도 벌써 백 년이 훌쩍 넘었다. 제국의 법과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도태되었고, 적응한 이들은 철저하게 제국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름은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였다. 물론 지역마다 어느 정도 차이는 있다지만, 그래도 보울룬이라는 이름은 흔치 않은 이름이다. 오래된 전통의 냄새가 난달까.

“실례지만, 크렘보르 장군께서는?”

“잠깐 주변을 둘러보고 온다 하셨소. 사람을 보냈으니 곧 오실 거요.”

보울룬이 눈을 크게 떴다.

“장군께서 직접 말입니까?”

“크렘보르 장군이 어떤 분이신지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이런 시국에까지…….”

“그 말이 나와서 말인데, 하잘은 어떻습니까?”

보울룬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그늘이 졌다. 시어문드는 그에 대한 평가를 마음속에 한 줄 더 추가했다.

‘표정 관리가 서툴다. 감정을 다루는 데 미숙한 것을 보니 심계가 깊지 않고, 명가의 자제는 아닌 것 같군.’

어쩌면 이마저도 연기일 수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보울룬은 성을 밝히지 않았다. 귀족은 아니라는 뜻이다.

“오시는 동안 보셨겠지요. 아마 서쪽의 상황도 썩 좋지는 않았을 테니.”

“볼 만큼은 보았다고 생각하지만, 혹 모르지요. 어쨌거나 별 괴상한 것들과 여기까지 오는 내내 드잡이질을 하기는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짧게 한숨을 쉰 보울룬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쪽의 상황도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주기적으로 병력을 보내 주변의 괴물들을 소탕하고 있지만, 인근의 성 몇 곳과 간신히 연락망을 구축한 것이 전부입니다. 이번에는 총독 각하께서 용단을 내리시어 대대적으로 소탕 작전을 펼치고 있습니다만…….”

그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위험을 각오하고 하잘을 나섰다고 했다. 그들에게 할당된 소탕 지역이 지금까지 거의 손을 대지 못한 서쪽이었기 때문에 적잖은 피해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들이 마주친 것은 괴물이 아니라 크렘보르의 병사들이었다.

“신께서 드디어 저희에게 빛을 내려주시는 듯합니다. 크렘보르 장군께서 돌아오셨으니 이제 판니른을 수복하는 것도 멀지 않은 것 아니겠습니까.”

안도하는 기색의 보울룬에게서는 가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어문드는 이 순진해 보이는 젊은 무관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만약 지금까지 이자가 보인 언행이 모두 진실된 것이라면…….

‘이 녀석. 대체 어떻게 천부장이 된 거지?’

뭔가 개인적으로 든든한 연줄이 있나? 아니면 저 탄탄해 보이는 몸에 엄청난 괴력이 숨어있다거나?

“장군께서 오십니다.”

생각이 깊어져 갈 즈음, 조용히 다가온 부관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고개를 끄덕인 시어문드가 보울룬에게 웃으며 말했다.

“장군께서 오고 계시다는군요. 나가시지요.”

“아, 예.”

시어문드가 몸을 일으키고, 보울룬도 엉거주춤 따라 일어났다. 그 ‘크렘보르 장군’을 만난다는 생각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어느새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 * *

군터는 시어문드의 옆에 선, 다부진 몸을 한 젊은 무관이 특별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장군.”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시어문드와 달리, 선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은 젊은 무관. 주변 병사들이 그의 무례함에 눈살을 찌푸리고, 일부는 아예 대놓고 인상을 쓸 지경이 되어서야 그는 느릿하게 걸음을 뗐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경직된 몸과 표정은 그대로였다. 군터는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보고 있듯, 자신 역시 그를 보고 있었기에.

“뱀?”

눈으로 보이는 것은 자그마한 인간의 몸뚱이. 그러나 영적인 감각은 그 안에 깃든 존재를 똑똑히 인지했다. 군터는 그것이 뱀 같다고 느꼈다. 그가 아는 한, 저 존재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명칭이었다.

“장군께서는 역시…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오히나를 한눈에 알아보셨습니까?”

“오히나?”

“본래의 이름은 아닙니다. 다만 저로서는 최대한 귀 기울여 들은 이름이지요. 그러니까, 제게 붙어 있는 정령 말입니다.”

정령. 정령이라.

젊은 무관은 자신에게 들러붙은 저것을 정령이라 인식하는 듯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글쎄.

“대화를 따라가기가 힘들군요. 뭐가 보이십니까? 정령…이라는 것은 또 무슨.”

시어문드가 다소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보울룬이 당황하며 횡설수설했다.

“아. 죄송합니다. 명성이 자자하신 크렘보르 장군을 뵙게 되어 경황이 없었습니다. 소관은 보울룬이라 합니다. 하잘의 천부장 직을 맡고 있지요. 짐작하셨는지도 모르겠지만, 상상도 못한 벼락출세를 한 몸이라 예법에 무지합니다. 부디 양해를.”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선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닌 듯하군요. 장군. 방금 들으셨지만 하잘의 천부장 보울룬 공입니다.”

“들어가지.”

천부장이니 뭐니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관심사는 보울룬의 안에 똬리를 튼 뱀뿐이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제법 있었기에, 군터는 두 말없이 보울룬과 함께 그의 막사로 들어갔다.

“장군. 장군께서 돌아오셨으니 이제…….”

“네가 품은 뱀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

군터는 무어라 주절주절 늘어놓을 기세인 보울룬의 말을 칼같이 끊었다. 그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한 가지였다. 하잘의 상황 역시 듣긴 해야겠지만, 지금만큼은 후 순위였다. 그는 이 한 번도 듣지 못한 이름의 청년이 품은 특별함에 대해 알고 싶었다.

“아, 예. 음. 오히나는 정령입니다. 헬라르본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제가 천부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오히나 덕분입니다. 오히나의 힘이 괴물들을 상대할 때 상당히 유용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횡설수설 떠들어대는 이야기는 두서가 없었고, 모호한 부분도 상당히 많았다. 그래도 군터는 그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묵묵히 들었다. 그는 어지러운 이야기 속에서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 보울룬 같은 자들이 여럿이며, 그들이 ‘축복받은 자’라고 불린다는 것.

둘. 지금까지 하잘이 비교적 멀쩡히 버틸 수 있었던 데는 그 ‘축복받은 자’들의 공이 지대했다는 것.

‘축복이라.’

저것을 축복이라 부를 수 있는 건가? 이질적인 존재가 영혼에 들러붙은, 아니 눌어붙은 것 같은 모양새가?

군터는 자신이 느낀 바를 굳이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지금도 조심스럽게 이쪽을 살피면서 혀를 날름거리는 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잔뜩 경계하면서도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것이, 제대로 이지를 갖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저것 또한 신주에 갇혀 있던 존재겠지.’

저런 특별함은 감춘다고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혼만 놓고 보면 반쯤은 초월자라고 봐도 좋을 정도가 아닌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추 가늠한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술사들보다는 나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군.”

“예?”

“그 정령이 네게 깃든 것.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음.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습니다만, 신께서 내리신 축복이 아닙니까.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사명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신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유용하다. 적어도 신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절대적인 핑곗거리가 되니까 말이다. 하늘이 맑은 것도, 흐린 것도. 심지어 길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신의 뜻이라 하면 그만이지 않나. 군터는 보울룬의 맑은 눈동자에서 시선을 뗐다.

하잘의 사제가 솜씨 좋게 구워삶은 것이든, 보울룬의 눈물겨운 신앙심이 빛을 발한 것이든, 그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보기에 보울룬에게는 그 어떤 광기도,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게 깃든 뱀에게서는 은은한 적의가 방향을 잃고 넘실거리는 것이 느껴졌으나, 뱀의 감정이 보울룬에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어째서일까.

‘이 녀석에게 뭔가 특별한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흥미가 일었다. 그러나 여기서 보울룬에게 더 캐묻는다 해도 알 수 있는 것은 없을 듯했다. 군터는 화제를 돌렸다.

“하잘의 상황은 어떤가.”

“좋지 않습니다. 비축한 식량이 제법 된다고 들었습니다만, 언제까지 고립된 채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이번에 총독 각하께서 대대적인 소탕령을 내리신 것도 그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곧 농번기가 다가오니까 말입니다.”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주도에 비축된 식량이 그리 적지도 않을 것이고, 설령 일대의 괴물들을 소탕한다고 해도 언제 다시 몰려올지 모르는 것들을 두고서 어떻게 마음 편히 수확을 하겠나. 그리고 무엇보다, 과연 한동안 버려지다시피 방치됐던 농지가 무사할까?

시어문드도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물론 그들 모두, 이 순진한 젊은이의 착각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사실 내심 제가 사명을 다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습니다만, 이제는 마음이 놓입니다. 크렘보르 장군께서 돌아오셨으니 하잘의 신민들 모두가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낯뜨거운 소리에 시어문드의 눈가가 가늘게 떨렸다. 정작 당사자인 군터는 없었지만 말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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