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1화
감각이 날카로워졌다. 육체의 감각은 당연히 아니다. 기감도 아니고, 이것을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군터는 이것을 영감(靈感)이라고 정의했다. 말 그대로 영적인 감각. 이성적으로 표현하기 힘든, 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초월적인 감각. 어떤 면에서는 예감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더 두루뭉술하고 거대하다.
처음에는 기분 탓이려니 하고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판니른에 들어서고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이 기이한 감각은 점점 더 예민해졌다. 더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곧장 솔롬으로 향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시어문드의 말대로다. 만약 이 감각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군터는 곧장 솔롬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예감이 좋지 않다.”
“예?”
시어문드가 듣지 못했다는 듯, 혹은 들었으나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가 아는 군터 크렘보르는 불확실한 말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하물며 그의 입에서 약한 소리가 나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처음 그를 만났던 때부터 지금까지, 시어문드는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예감이 좋지 않다고?’
혹시 서툰 농담인가 싶어 슬쩍 기색을 살폈으나 군터의 표정은 여느 때와 같이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꿈을 꾼 적이 있다.”
꿈? 꿈이라니? 이 또한 설마 저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던 단어 중 하나다. 더는 참지 못한 시어문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점점 더 영문 모를 소리를 하시는군.’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둘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던 친위대 병사 몇몇이 자신과 비슷한(당장 거울을 볼 수는 없으므로, 추측일 뿐이지만)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 낯설겠지. 하물며 이 대화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서 ‘장군’을 호위하는 녀석들은 전부 10년 이상 ‘장군’을 따른 이들이다.
과장 좀 보태서 녀석들은 ‘장군’을 신처럼 떠받들고 따른다. 어쩌면 과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런 절대적인, 결점이라고는 없는 초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상관이 갑자기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이니 꽤나 당황스러울 터였다.
“솔롬이었다. 보리스와, 다른 녀석들이 몇몇 있었지.”
상당히 본격적이고, 구체적이다. 시어문드는 이렇게 된 이상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임하기로 했다. 그래 봐야 진지한 표정을 하고, 귀를 쫑긋 세우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밤처럼 어두웠지만, 밤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지. 난 그곳에서 거인을 봤다. 가장 높은 곳, 가장 눈에 띄는 곳에서.”
“거인…….”
“그건 틀림없는 거인왕이었다. 본 적은 없지만, 그런 자가 거인왕 외에 달리 있을 것 같지는 않군.”
만약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꿈도 참 희한한 꿈을 꿨다며 한 번 웃어주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고 그자는 지금 이곳에 있다.”
“…그 말씀이 참입니까?”
어지간하면 이런 의심 섞인 물음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인왕이라니. 교단의 독실한 신자들 사이에서는 신으로 섬김받는 존재가 아닌가. 꿈에 나왔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래. 지금 이 땅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 그자가 일으킨 것이다.”
이 이야기를 데카람을 나온 후에 들어서 다행이다. 고집스러운 주교가 혹시라도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테니.
“그자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늦든 빠르든, 결국 그자와 대적하게 될 것이다.”
“그걸 어찌 아십니까?”
“감. 하지만 난 확신한다. 그 어느 때보다도.”
“…….”
“그래서 하잘로 가는 거다. 최대한 신중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지금 그…거인왕이 솔롬에 있습니까?”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다. 혼란스러웠지만, 시어문드는 상관의 두 눈에 깃든 강한 확신에 설득되었다. 혹은 압도된 것일지도 모른다.
“글쎄. 모르겠군.”
확실치 않다고 해도 평소의 그였다면 망설이지 않고 곧장 솔롬으로 갔을 것이다. 전장에서도, 어디에서도 군터 크렘보르라는 사람은 늘 신중함보다는 신속함과 과감함을 택해왔으니까.
어울리지 않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인 듯 낯설기까지 하다. 시어문드는 그 이질적인 모습 덕에 이 믿기 힘든 이야기를 조금 더 믿을 수 있었다.
게다가 만약 이 땅에서 일어난 일들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벌인 것이라고 한다면…그럴 만한 능력을 지닌 이는 극히 한정적이다.
‘그래. 거인왕 정도라면 가능하지.’
속으로 떠올리는 것뿐인데도 거부감이 든다. 단 한 번도 스스로 독실한 신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시어문드였지만, 신으로까지 떠받들어지는 존재를 ‘적’으로서 떠올리려니 영문 모를 거부감이 들었다.
“두려우냐?”
갑작스레 날아든 한 마디 물음이 망치가 되어 뒤통수를 후려치는 듯했다. 그 한 마디는 시어문드가 본능적으로 묻어두었던 진실을 억지로 들추었다.
그가 느낀 거부감. 그건 어쩌면 두려움의 다른 얼굴이었을지도 모른다. 신을 상대하는 것은 인간의 군대나, 괴물 따위를 상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일 것이다.
“모르겠습니다. 다만…장군을 믿고 따를 뿐입니다. 이제껏 그래왔듯이.”
만족스러운 대답이었을까. 그의 상관은 이렇다 할 대꾸도 없이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 * *
익히 예상했었지만, 하잘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종일 어둑한 하늘은 빛을 뿌리는 데 인색했고, 그 하늘 아래서 계속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점차 하늘의 색에 물들어갔다.
병사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가 줄어들었다. 억지로라도 말문을 열던 이들조차 어느 순간부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시체 인형이다!”
시체 인형. 제멋대로 움직이는 시체들을 보며 한 병사가 한바탕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중얼댄 말이었는데, 그 표현이 꽤나 적절하다 여긴 이들이 아예 그렇게 이름을 붙여버렸다. 병사들 사이에서만 쓰이던 이름이 장교들까지, 그리고 그 위에까지 흘러 들어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혹시라도 긁히지 않게 조심하도록!”
시체 인형은 말 그대로 시체다. 여기에 인형이라는 단어가 더 붙은 까닭은 시체가 인형처럼 뻣뻣하게, 혹은 제멋대로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주인이 아닌 것들이 난잡하게 흘러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순환에 흘러 들어가야 할 영혼들이 그러지 못하고 정처 없이 떠돌다가 엉뚱한 고깃덩어리에 깃든 결과물이 바로 저 시체 인형이었다.
전투력은 보잘것없다. 병사 한 명이 시체 서넛을 너끈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 그러나 저 썩어 문드러진 몸뚱이에 잘못 긁히기라도 한다면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뭐, 그렇다 해도 만만한 상대임은 분명하다. 백여 구의 시체 인형을 맞닥뜨린 병사들의 표정에 긴장 대신 짜증이 떠오르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제껏 마주친 시체 인형만 해도(짐승과 사람을 합해서) 천여 구가 넘어갔다. 이제 그들은 저 삐걱거리는 것들을 어찌 상대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체득했다.
저것들을 상대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창이다. 거리를 주지만 않으면 저것들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대열 맞춰!”
병사들은 장교들의 호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창을 들고 길게 늘어섰다. 그리고 걸어오거나, 달려오거나, 기어오는 시체들을 향해 힘껏 창을 찔렀다.
그걸로 끝이었다. 창에 찔린 시체 대부분이 허우적대며 쓰러졌고, 일부가 몸을 낮춘 채 달려들거나 한 번 쓰러진 다음에 짐승처럼 기어서 접근해왔지만 그런 것들은 미리 칼과 도끼 등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가뿐하게 처리했다.
굳은 몸이 제대로 풀리지도 않을 정도로 싱거운 전투. 하지만 이런 전투를 하루에 두세 번씩은 치러야 했고, 간혹 까다로운 괴물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하늘에서 덤벼드는 것들이라든지, 창칼로는 멈춰 세울 수 없을 만큼 덩치가 큰 것들이라든지.
“피해!”
그런 것들이 나타났을 때, 병사들은 사냥꾼처럼 움직였다. 대열을 유지하기보다는 그때그때의 순간적인 판단을 따라 몸을 날렸다. 몇 번의 전투에서, 수십의 피해를 대가로 얻은 교훈이었다. 최대한 회피에 집중하면서 조금씩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바로 지금처럼.
쿠워억!
양쪽에 세 개씩 여섯 개의 어금니. 하나하나가 사람 한둘 정도는 가뿐하게 꿰뚫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위협적이다. 그뿐 아니라 데카람에서 봤던, 혼자 성문을 열어버린 바위 괴물에 버금갈 덩치. 스치기만 해도 뼈가 부러질 것이 분명하다.
“이 빌어먹을 돼지 새끼들!”
전체적으로 멧돼지를 닮긴 했지만, 다른 부분도 확실하게 존재했다. 예를 들면 다리. 사냥개처럼 튼튼하고 늘씬하게 뻗은 네 다리는 저돌적인 돌진만을 거듭하는 멧돼지와 달리 여러 방향으로의 신속한 이동을 가능케 한다.
그래서 더 까다롭고 위험하다.
“윽?!”
괴물의 뒤쪽으로 돌아가고서 잠깐이나마 숨을 돌리려던 병사가 기다렸다는 듯 휙 몸을 돌리는 괴물을 보며 기겁했다. 놈의 이글거리는 두 눈은 분명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까마득한 절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아찔함이 순간적으로 병사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멈춰있지 마!”
굳어버린 그를 살린 것은 그를 태우고 있던 군마였다. 짐승의 본능적인 감각은 때때로 인간의 무딘 반응속도를 웃돌았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거칠게 콧김을 뿜어낸 군마가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고,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투창 세례가 괴물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꾸어어어어-!
이 끔찍한 괴물이 데카람에서 질리게 봤던 것들보다 나은 부분이 있다면, 이런 놈들은 그래도 고통이라는 것을 느끼고 반응한다는 점이다. 지금처럼 피륙에 큼지막한 상처라도 입으면 평범한 생물처럼 잠깐이나마 몸이 굳기도 했다.
반면에 성가신 부분이라면, 이것들은 뇌가 굳거나 썩지 않아서 나름대로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는 점이다.
꿰에엑-!
위기라고 느꼈는지, 씩씩대던 괴물이 동쪽으로 튀어 나갔다. 같은 상황에 몰려있던 나머지 녀석들도 뒤따라서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친다!”
“잡아!”
비교적 덩치가 작은 세 마리까지 포함하여 총 다섯 마리. 일가족으로 보이는 놈들은 무식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풀숲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뛰쳐 나왔다. 놈들의 은신을 미리 알아차린 군터가 아니었다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 분명했다.
“영악한 놈들이다! 놓치면 안 돼! 쫓아!”
무조건 강하다고 위험한 것이 아니다. 힘은 다소 약하더라도 저렇게 머리를 쓸 줄 아는 놈들이 오히려 더 위험한 경우가 많다. 하물며 괴물들은 약하지도 않았다. 한 마리를 상대하는데 수십 명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정도가 아닌가.
명을 받은 병사들이 피를 철철 흘리며 도망치는 괴물들의 뒤를 쫓았다. 상처 입고 지친 상태에서도 괴물들은 한동안 거리를 내주지 않았다.
그렇게 쫓고 쫓기며 작은 언덕에 다다랐을 때였다. 반대편에서 우렁찬 호령 소리가 들려왔다.
“오히나! 놈들을 멈춰 세워라!”
무언가 끌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괴물들의 섬뜩한 괴성이 뒤이어 들렸다.
그들이 경사진 언덕을 넘어 반대편을 내려다보았을 때, 그들은 괴물들이 여러 방향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엔 족히 천 명은 되어 보이는 군대가 이제 막 괴물들의 숫자만큼 나뉘어 움직이고 있었다.
“저게 무슨 깃발이지?”
여기까지 열심히 괴물들을 쫓아온 병사들은 자신들의 일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흩어진 괴물들이 무기력하게 사냥당하는 것을 지켜보던 중, 눈썰미와 기억력이 좋은 병사가 낯선 군대의 깃발을 알아보고 그들의 정체를 짐작했다.
“총독의 깃발이잖아. 저건 하잘의 군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