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60화 (960/1,064)

960화

제국민이라면 대부분 원신에 대한 신앙을 크든 작든 가지고 있다. 흔히 외주라 불리는, 황도와 교단 본청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일수록 그 신앙이 옅어지는 경향이 있었으나 그런 곳에서조차 성직자는 존엄한 신분으로 대우를 받았다. 한 지역의 유지 노릇을 하는 귀족들조차 자그마한 예배당의 사제에게 고개를 숙이곤 할 정도였다. 물론 그런 공손함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는 차치해야겠지만 말이다.

이러한 풍조에서 판니른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주교쯤 되는 이라면, 어디서도 존중을 받기 마련이었다. 실제로 판니른 총독 운바소르 아실은 성야제(聖夜祭) 때마다 꼬박꼬박 판니른의 고위 성직자들을 초청하여 자신의 신실함을 드러내곤 했다.

오메로스 또한 교단의 주교로서 그 자리에 매해 꼬박꼬박 참석하곤 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총독 및 유력자들에게 더 많은 헌금을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평소에는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만남을 피하던 이들도 총독이 주재하는 성야제 때만큼은 얼굴을 비추곤 했으니까 말이다.

이곳, 판니른은 그야말로 종교적 불모지였다. 말단 사제들은 물론, 주교들까지 타성에 젖어 그들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었다. 그는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느꼈던 허탈함과 분노를 아직도 잊지 못했다. 지난 세월 동안, 그나마 눈에 닿는 곳은 최대한 힘을 써왔으나 그래도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아직까지도 일부 무지몽매한 자들이 토속신앙이라는 이름의, 사신(邪神)들에게 빠져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심지어 귀족이라는 자들조차 그런 자들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어쩌면, 눈앞의 이자 역시 그런 부류일지 모른다. 무심함이라는 가면 뒤에 어떤 본모습이 숨어있을까. 오메로스는 자신을 응시하는 돌덩이 같은 시선을 꿋꿋이 마주하며 다시 물었다.

“금기가 금기인 데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영혼은 필멸의 존재가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무거운 칼을 손에 쥐는 것과 같지요. 운 좋게 몇 번 정도는 다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해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칼날에 다치고 말 겁니다. 그러나 금기를 범한 대가는 피륙의 상처 따위와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중대하지요.”

몇몇 귀족들이 사이한 술법을 쓰는 이단 술사들을 곁에 두고 암암리에 부린다는 것은 오메로스도 알고 있었다. 그 또한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드러나지 않게 몰래 사람을 쓰는 것과 대놓고 귀족 본인이 금기를 범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고귀한 신분이라면 무릇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자는.

‘사실이겠지.’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오거스트 네베시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이나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군터 크렘보르가 사령술을 사용한 것은 사실인 듯했다. 이미 한참 전부터 그런 소문이 들려오기도 했었고. 그때는 그런 소문을 들었어도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단순히 소문만 가지고 추궁하기에는 군터 크렘보르라는 이름값이 너무 컸던 탓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다르다. 소문이 사실로 드러났다면, 상대의 이름값이 얼마나 크던 결코 묵과할 수 없다.

성직자로서의 사명감이 몸과 마음을 충만하게 채웠다. 그러자 부담스러웠던 시선도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위축된 마음이 평온해지자 살짝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도로 펴졌다.

‘그게 죄인의 눈인가?’

그는 이제 보다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상대의 눈을 바라볼 수 있었다. 무심하게 가라앉은 두 눈에 그 어떤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새삼스레 부아가 치밀었다. 이자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 것인가? 그렇다.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불손한 눈빛을 보일 수는 없다.

오메로스는 크게 심호흡했다. 감정적이어서는 안 된다. 황도에서 수행 사제로서 수행에 전념하던 시절, 젊은 날의 혈기를 참지 못하고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가. 그때 했던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돌이켜 보면 조금 더 신중할 수는 있었으리라. 그랬다면 결과도 조금은 더 좋았을 테고.

“부모라면 누구든 자식이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을 우려하지요. 주께서 금기를 정하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자식들이…….”

“사람의 논리로 신을 설명하려 드는군.”

“예?”

“그대의 말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오메로스가 애써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중에도 군터 크렘보르의 앞에 놓인 음식들은 꾸준히 줄어들었다. 자그마한 고깃덩어리를 한입에 씹어 삼킨 그가 멍한 표정의 주교를 일견하고는 육즙이 묻은 입가를 닦았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 하니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군터 크렘보르는 오거스트 네베시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방금보다 훨씬 더 강력한 위압감이 두 사람을 억눌렀다. 반론은 물론, 입을 떼는 것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이.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내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이 도시의 모든 목숨이 위태로웠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그대도 포함이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주교는 여전히 입을 떼지 못했다. 다만 하고 싶은 말이 많기는 한 듯, 떨리는 두 눈이 복잡한 빛을 띠었다.

“그대의 아이가 도둑을 칼로 찔러 죽이면, 그대는 피 칠갑을 한 아이에게 칼을 쥐었다 타박하겠나?”

* * *

마음 같아서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저 입을 봉하거나,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군터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했다. 제국의 심장에 뿌리내린 교단의 영향력은 지대하고, 그들에게 밉보이면 여러모로 귀찮은 일들이 생길 것이다. 그러니 번거롭고 거슬리더라도 아예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다.

할 말이 잔뜩 쌓인 것 같은 성직자의 모습이 우습고 가소롭기만 했다. 말끝마다 신을 들먹이는 이놈이 신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을까? 신이 정말로 자신의 피조물을 아낀다면 어찌하여 이 땅에 일어나고 있는 재앙을 방관하는가? 능력이 없어 방관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전능하지 못한 것이니 신답지 않고, 능력이 있음에도 방관하는 것이라면 피조물을 아끼지 않는 것이니 이놈이 지껄이는 말과 다르다. 어느 쪽이든 결론은, 이놈이 자기 입으로 들먹이는 신에 대해 말하는 만큼 잘 알지는 못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자기도 잘 모르는 존재를 들먹이며 한껏 아는 척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가. 평생 동네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꼬맹이가 세상을 논하는 꼴이다.

‘신이라.’

궁금하기는 하다. 저놈이, 교단의 성직자들이 입이 닳도록 찬양하는 원신이라는 신이 어떤 존재일지.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신이라 하여 원신이다. 만물을 창조했다는 말이다. 땅과 하늘, 이 세상. 심지어 신이라 불리는 초월적인 존재들마저도.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신 중의 신인 셈이다. 그야말로 전능한 존재라 할 만하다. 물론,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솔직히 믿기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밖에 보지 못하는 평범한 이들과 달리, 군터는 순환의 흐름을 보았다. 심지어 직접 느끼기도 했다. 죽음을 경험했을 때, 그는 영혼의 이끌림을 경험했었다.

그 거대한 순환을 보고, 겪은 입장으로서 그 위에 존재한다는 절대적인 조물주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장군. 아무리 장군이시라도 교단에게 밉보이셔서는 안 됩니다.”

삭막한 식사 자리 후. 조용히 찾아온 오거스트 네베시가 조심스럽게 경고인지 조언지 모를 말을 건넸다.

“상관없다.”

“하지만.”

“그 녀석이 곧 교단인 것도 아니지 않나.”

주교 오메로스는 제법 유명하다면 유명한 인사라 이전부터 얼핏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주교라고는 해도 중앙 교단의 눈 밖에 난 천덕꾸러기 신세. 유배 아닌 유배를 온 후로도 마주치는 모든 이들에게 걸핏하면 교리를 들먹이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고리타분한 이야기나 늘어놓고, 그걸로도 모자라 심심하면 헌금을 요구하는 탓에 판니른의 귀족들이 가장 기피하는 성직자로 이름을 날렸다.

이번에 괴물들이 몰려와 난리를 칠 때, 오메로스는 첨탑 안에 틀어박혀 기도에 열중했다고 들었다. 신의 기적이 내려와 저 눈 뒤집힌 괴물들을 돌려보내든, 쓸어버리든 해주기를 바랐겠지. 하지만 그를 구원한 것은 신의 기적이 아니라 병사들의 목숨, 그리고 그가 그토록 규탄한 시체들의 힘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그는 자신이 목숨을 건진 것이 신의 보살핌 때문이라고 여기겠지.

“장군.”

오거스트 네베시가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으로 돌아간 후. 군터는 시어문드의 보고를 들었다.

“병력 피해는 크지 않습니다. 전후 수습작업에도 투입되지 않았으니 하루 정도면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저, 그런데 장군.”

“음?”

“사흘 뒤에 추도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주교 오메로스가 직접 진행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번에 죽은 녀석들을 좋게 보내주고 싶어 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이번 전투만이 아니라, 판니른에 돌아온 후로 죽은 녀석들 몫까지 다해서 말입니다.”

“…….”

일반적으로 군인들은 미신에 빠지기 쉽다. 아무리 마음이 강한 이라도, 혹은 독실한 신앙을 지닌 이라도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환경에서 뒹굴다 보면 이래저래 의지할 곳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군터 휘하의 병사들은 대부분 북방 출신이다. 원신 신앙의 변두리에 속한 곳에서, 무신론자라고 할 수 있는 대장 휘하에서 복무하다보면 자연스레 가지고 있던 신앙심도 흐릿해지기 마련. 그 때문인지, 군터 휘하의 군졸들은 대체로 종교와 신앙에 대해 미지근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들조차 이번에 판니른에 돌아와 보고 겪은 일들은 제법 힘겨웠던 모양이다.

“주교라는 이름값이 크기는 큰 모양입니다.”

시어문드가 어색해지려는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농담조로 말을 덧붙였다. 안 그런 척하면서 슬쩍슬쩍 눈치를 보는 시어문드에게 군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시어문드는 한 시름 덜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아닌 척을 해도, 조금만 몰리면 의지할 곳을 찾는 게 사람인 것 같습니다.”

“너는 안 그런 것처럼 말하는군.”

“하하.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아직 그 정도까지 몰리지는 않은 터라.”

군터는 시어문드가 두 눈을 꼭 감고, 혹은 반쯤 눈물을 글썽이면서 신을 찾는 모습을 상상해보았으나 역시 좀처럼 그림이 잘 그려지지는 않았다. 늘, 억지로라도 여유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시어문드가 그 꼴이 될 정도면 정말 막다른 곳까지 몰렸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시어문드도 결국은 사람이다. 본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혹은 숨기고 있는 약한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가.’

사람이라서. 사람이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지런히 날카롭게 갈아도 결국 사람은 칼이 아니다. 사람에게 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부질없는 욕심일 뿐.

“문제는 없겠나.”

바로 오늘 주교 오메로스에게 면박을 주고 온 군터였다. 만약 감정이 상한 오메로스가 일정을 취소한다거나 하면 곤란하다.

“괜찮을 겁니다. 공과 사는 철저하게 구분하는 사람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한소리 들었다고 해서 책무를 저버릴 사람은 더더욱 아니지요.”

시어문드의 말대로였다. 이틀 뒤 .오메로스는 엄숙한 표정으로 단상 위에 올라 추도제를 시작부터 끝까지 주도했다. 중요한 부분만 자신이 맡고 자잘한 진행 같은 것은 사제들에게 맡겨도 되련만, 그는 고집스럽게 모든 것을 도맡아 이끌었다. 나중에는 신의 정원으로 떠난 이들을 축복하며 눈물까지 보였다던가. 시어문드가 혀를 내두르며 대단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제법 그럴듯했던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눈칫밥을 주워 먹는 천덕꾸러기라지만, 그래도 주교는 주교인 모양입니다.”

“그런 능력이라도 있으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겠지.”

다음날. 군터는 한결 홀가분해진 병사들과, 오거스트 네베시가 붙여준 백 가량의 용병들을 이끌고 데카람의 동문을 빠져 나왔다.

“이번에는…….”

“하잘로 간다.”

충분히 쉬었으니 이제는 다시 고삐를 당겨야 할 때. 군터는 자잘한 경유지는 생략하고 곧장 하잘로 말머리를 향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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