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9화
어둡던 하늘이 개었다. 여전히 먹구름이 잔뜩 깔려있고, 바람은 음산하게 불어오지만 분명 확실히 개었다. 이 부근에 통째로 드리웠던 짙은 그림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평범한 이들은 느끼지 못하겠지만, 기감이 뛰어난 이들은 그 조용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반쯤 혼절했던 이들의 안색이 그들 자신도 모르게 밝아지고, 마음을 옥죄던 두려움과 압박감이 해소됐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긴 한숨을 내쉰 후에 성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꿰에엑!
멧돼지를 닮았지만 조금 더 몸이 길쭉하며, 산양 같은 뿔까지 난 괴물이 마구잡이로 주변을 들이받았다. 방금까지 앞만 보며 달려들었던 이 괴물은 이제 숨 쉬지 않는, 식어버린 몸뚱이를 지닌 적에게서 어떻게든 멀어지려 애쓰고 있었다. 광기와 적의만이 가득했던 두 눈엔 당황과 두려움이 진하게 내비쳤다.
다른 괴물, 짐승들도 마찬가지. 하늘의 그림자가 걷힘과 동시에 본능이 돌아왔다. 멀어있던 눈과 귀가 한 번에 뜨이면 이러할까. 천적을 바로 곁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달려가던 짐승들이 한순간 기겁하며 달아나고, 먹이를 옆에 두고 어리둥절하던 포식자들은 곧 먹이에게 이를 드러내거나 지극히 이질적인 적을 경계하거나 두려워하며 몸을 움직였다.
하나의 의지에 지배당하던 무수한 괴물과 짐승들이 각자의 본능와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하니, 곧 전장은 전장이라 할 수 없게 되었다.
콱!
그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군터는 창을 땅에 박았다. 밀려오는 탈력감에 잠시 쉬기로 한 것이다. 미쳐서 날뛰는 괴물과 짐승들은 자연스럽게 그를 피해 움직였다.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도 본능의 속삭임을 들은 것이다.
[전투가 사냥이 됐군. 장군. 그 신을 없앤 건가?]
복부가 깊게 파인 창백한 병사가 다가왔다. 정확히는 그의 몸에 깃든 이가로프가.
[그래.]
이가로프는 그것을 신이라고 칭했다. 군터는 굳이 그 표현을 정정해주지 않았다. 이번 일로 확실히 깨달았다.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표현은 대체로 무의미하다는 것을. 신이든 정령이든, 그 어떤 말도 그들을 정확히 표현하거나 규정짓지는 못한다.
[그 존재 또한 아간투스베록에게 희생당한 것이었겠지. 그렇지 않나?]
[희생?]
군터는 조소했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으나 그 감정은 고스란히 이가로프에게 닿았다.
[다투었고, 졌을 뿐이지. 그 어디에 희생 같은 것이 있겠나.]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비겁하다고 해야 할지. 아마 이가로프도 알고 있을 것이다. 받아들이지 못할 뿐. 잊지 않기 위해, 미치지 않기 위해 그는 오랜 시간 동안 분노해야만 했다. 땔감이 없으면 불이 타지 않듯, 분노를 위해서는 이유가 필요하다.
침략자? 원수? 모두 사람의 개념일 뿐이다. 무수히 많은 생명이 피고 지는 세상에서 그런 자그마한 개념은 하찮기 그지없다. 이미 사람이 아닌 영혼이 되어서까지 억지를 부리는 이가로프는, 어쩌면 나름 특별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우습다. 우습지만, 굳이 그의 생각과 마음을 지적할 생각은 없다. 왜 그러겠나. 손에 쥔 칼이 스스로 날을 갈고 닦는 것도 모자라, 기름칠까지 하는데 말이다.
군터는 어떤 식으로든 거인왕과는 부딪칠 수밖에 없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 꿨던 꿈을 떠올렸다. 고요한 도시. 잔뜩 분노해있던 보리스와 그런 보리스를 비웃듯 등을 보이며 어딘가로 걸어 올라가던 거인.
그때도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이제는 안다. 거인왕과 그는 부딪칠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 * *
“퉷.”
어느샌가 입에 들어간,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를 신경질적으로 뱉어낸 브릭은 엉망이라는 생각밖에 안 드는 주변 광경을 눈만 움직여 돌아보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새삼 이게 뭔가 싶었다. 설마하니 서부의 전장에서 집으로 돌아갈 날만 고대하던 그때가 그리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칼 한 자루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야 스스로 택한 삶이니 불만이랄 것도 없지만, 그 상대가 이런 짐승이나 짐승과 별반 다르지 않은 괴물들이라는 것은 상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싸움에서 명예를 찾던 치기 어린 시절은 오래전에 떠나보냈으나, 그래도 매 순간 목숨을 내던지는 무대가 볼품없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뭘 상대로 싸우는 것인지조차 모르고 있지 않나. 그런 와중에 그의 장군께서는 시체를 일으켜 전투를 끝냈다.
브릭은 비록 초원에서부터 장군을 따랐다는 고참급에 속하는 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중견급 정도는 되는 병사였다. 경력도, 실력도 부족하지 않아 적당한 때가 오면 장교가 될 수 있는 이였다. 그 스스로도 그것을 알았고, 주변에서도 인정했다.
‘모르겠군. 모르겠어.’
쇠똥 냄새나 맡으며 평생을 살기는 싫다는, 나름의 야망과 오기를 밑천으로 고향 땅을 뛰쳐 나와 용병으로 2년을 굴렀다. 그러다 칼 찬 부랑자 삶에 염증을 느껴 군문에 들어섰고, 군터 크렘보르의 밑에서 6년을 복무했다. 진짜 고참급들이야 아직도 농담조로 애송이라고 놀려대지만, 이만하면 솔롬의 군졸들 가운데서는 내세울 수 있을 만한 경력이었다.
군터 크렘보르.
상관이라서가 아니라, 그는 정말 훌륭한 군인이다. 그 자신의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만큼 아랫것들을 그만큼 챙기는 ‘높으신 분’은 정말 드물다. 칼 찬 부랑자 생활 2년 동안 나름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녔던 브릭이었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단언할 수 있었다. 그가 진정으로 군터 크렘보르에게 충성을 바쳐도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런 부분 때문이었다.
세상에 혼자 잘난 사람은 많다. 하지만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브릭은 자신의 남은 삶을 솔롬에서 보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장교가 되고, 적당히 몸이 삐걱거리기 전까지 복무하다가 전역해서 그때쯤 번듯한 도시가 된 솔롬에 주점 하나를 장만해 남은 삶을 보낸다면 꽤 근사할 것 같았다.
“어이. 왜 멍때리고 있어?”
“응? 아.”
잠깐 상념에 잠긴 사이, 어느새 성문 주변을 치우고 있는 분주한 인원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데카람의 군졸들이었다.
“그냥.”
말을 건 동료는 몰골이 꽤나 지저분했다. 저 지저분한 것들과 뒤엉켜 땅을 구르기라도 했는지, 나름대로 털어냈을 것임에도 여전히 전신이 피와 먼지투성이였다.
“무섭고, 낯설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뭐? 뭔 소리를 하는 게야?”
두렵다.
스스로 인정하든 하지 않든, 아랫것들은 윗사람을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 어려움이 단순한 껄끄러움인지, 아니면 두려움인지는 다 다르겠지만.
브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군터 크렘보르를 존경했으나 그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두려워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다는 점이 가장 컸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 자연재해를 올려다보는 느낌이랄까. 그래. 말하자면 그 두려움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군터 크렘보르라는 사람은 그에게 있어, 미지 그 자체였던 셈이다.
그런데 오늘. 그 미지의 존재는 한층 더 멀어졌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짐승과 괴물, 죽은 병사들을 일으켜 세우는 상관의 모습을 보며 두려움 이전에 낯섦을 느꼈다. 어렴풋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착각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그래서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된 것 같은.
“필립.”
“응?”
“장군 말이야. 사람이 맞을…….”
“아하! 그래! 가자고. 목이나 시원하게 축여야지 빌어먹을 거. 개같이 구르면서 자기들 목숨 지켜줬는데 저들도 사람이고 양심이란 게 있으면 시원한 술 한잔 정도야 기쁘게 내주겠지.”
동료 병사 필립이 브릭의 말을 끊으며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때 브릭은 깨달았다.
‘너도 그렇구나.’
같은 전장에서, 같은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 않나.
그가 왜 황급히 말을 끊고 딴소리를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
낑낑대며 사체를 치우고 있는 데카람의 병사들 사이로, 말을 타고 감시하듯 돌아다니는 이들이 있었다. 데카람의 장교들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솔롬의 성주 친위대 장교들이었다. 성주, 그러니까 그들의 장군에 대한 충성심이 거의 신앙과 같다는 이들. 특히 바크렌에서부터 장군을 따라온 이들은 맹목적인 충성이란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이들이었다.
지금 이렇게 작게 이러쿵저러쿵해대는 말이 그들의 귀에 들리기라도 한다면, 절대 가벼운 문책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필립은 그것을 알기에 그의 입을 막은 것이고.
“…그래. 목이 갈라질 지경이야. 크흠! 아니 이미 갈라졌나?”
“그래. 내가 봐도 그런 것 같아. 어서 가자고.”
필립과 브릭, 그리고 몇몇 병사들이 한데 모여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수레에 짐승의 사체를 싣던 데카람의 병사들이 부러운 눈으로 그 뒷모습을 흘겨보았으나 가벼운 욕지거리만 내뱉을 뿐 할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들도 알았기 때문이다. 저 외지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눈부시게 싸웠는지를.
* * *
“군터 크렘보르 장군이 사령술을 사용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승전을 축하한다는 짤막한 한 마디 이후 바로 나온 것이 이 말이다. 오거스트 네베시는 이 강퍅한 인상의 주교가 자신을 추궁한다고 느꼈다. 아마 기분 탓은 아닐 터였다.
‘어찌한다.’
이자가 이리 나오리라는 것은 짐작한 바였다. 짐작했지만, 마땅한 답을 준비하지는 못했다. 나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발을 뺄 수도, 그렇다고 어느 한쪽의 편을 들 수도 없다. 꼬장꼬장한 주교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군터 크렘보르에게 안 좋은 소리를 늘어놓을 수도 없다. 어쨌거나 이 도시를 지켜준 은인이 아닌가. 그는 개인적으로 은인이라는 표현은 조금 과하다 생각했지만, 데카람의 시민들 상당수는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전까지 무력하기만 했던 데카람의 군사들이 지금처럼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는 이유가 외지의 이름만 들어본 장군 때문이라고 여겼다.
‘문제는 그게 영 틀린 말은 아니란 거지.’
괴물과 짐승들로부터 도시를 지켜냈지만, 이게 끝이 아닐지도 모른다. 만약 이번과 같은, 혹은 더 많은 괴물이 몰려온다면 그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신께서 이 도시를 눈여겨보고 계시지 않다는 것은 이미 확인한 바 있으니, 예배당에 틀어박혀 기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도시를 지키는 건 당신 같은 자들의 기도가 아니라 더 많은 병력, 더 많은 무기란 말이다.’
물론 속으로만 외칠 뿐이었다. 그는 이 고집불통 주교에게 밉보이고 싶지도, 불신자로 낙인찍히고 싶지도 않았다.
“잘 모르겠소. 당시 나는 다른 쪽에 있었던 터라. 하지만…목격한 병사들이 있다고 들었소.”
어떻게든 책임을 피하고자 하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주교 역시 알 것이다. 하지만 주교도 욕을 부를 정도로 완고할 뿐이지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오거스트 네베시가 무엇을 신경 쓰고, 염려하고 있는지 그도 잘 알았다.
“후우. 크렘보르 장군을 뵙고 싶습니다만.”
“내 자리를 마련해보겠소.”
그렇게 마련된 자리였다. 오거스트 네베시는 승전(누구와 상대해서 승리하였는가는 차치하고)을 축하도 할 겸, 연회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요즘 같은 시기에 쉬이 보기 힘든 제법 근사한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크렘보르 장군. 장군께서 사령술에 손을 대셨다는 이야기가 정말입니까?”
과실주로 마른 목을 축이기도 전에, 반백의 주교가 입을 열었다.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군터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그렇다면?”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