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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58화 (958/1,064)

958화

생명을 지닌 것들이 죽어 쓰러지자 그 영혼이 빠져 나왔다. 본래라면 그 영혼은 순환에 이르러야 하건만, 그것들은 순환의 흐름에 합류하는 대신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군터의 눈에는 그 흐름이 뚜렷하게 보였다.

악의와 광기. 단 두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존재. 아니 현상.

군터는 천천히 다가오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죽은 모든 것들이 저것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다. 짐승, 괴물, 인간 할 것 없이 전부. 그렇다. 저것은 명백하게 자연의 규칙을 어그러뜨리고 있다. 본래는 자연의, 세상의 규칙 그 자체였을 것이 이제는 정반대로 뒤틀린 무언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저것에 의지는 없다. 그저 맹렬하게 분노할 뿐이다. 그 분노는 대상을 가리지 않으며, 그렇기에 마주치는 것을 휩쓴다. 군터 자신도 예외는 아니리라. 어쩌면 오히려 그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는 만큼 더 적대적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군터도 저것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도 그는 저것을 어떻게 상대해야 효과적일지 고민하고 있었다.

병사들을 동원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저것의 실체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창칼을 들이댄다고 해도 저것에게는 흠집 하나 내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효과를 보려면 술력을 기반으로 하는 술법 정도는 되어야 할 텐데, 데카람의 술사들은 다들 제 한 몸뚱이 가누기도 버거워하고 있다. 저것을 마주하고 힘을 쓰라 한다면 뭘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나자빠질지도 모른다. 혹은 미쳐서 마구 날뛰어댈지도 모르지. 뭐가 됐든지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터.

‘내가 하는 수밖에.’

이가로프를 비롯한 영혼들도 저것만큼은 꺼림칙한지 본능적으로 거리를 벌린 모습. 강제한다면 나서기야 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장군. 조심하게.]

이가로프의 경고. 하지만 무지한 자의 괜한 걱정일 뿐이다. 그의 눈에는 저것이 재앙 그 자체로 보일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면 휩쓸리고 마는 무시무시한 재앙. 하지만 저것이 그에게는 재앙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군터에게는 아니었다. 저것에 휩쓸린 것들은 성가시다. 하지만 저것 자체는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거센 폭풍이 들풀과 덜 자란 나무들은 뿌리째 흔들 수 있을지라도, 천년을 내려앉은 거암(巨巖)은 어쩌지 못하는 것처럼.

비록 완전히 넘어선 것은 아니지만, 반쯤은 경계를 넘어선 군터에게 있어 저것은 조금 세찬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하지. 너희는 가로막는 것들을 치워라.]

[그리하지.]

저것에게 달려들라고 할까 싶어 눈치를 살피던 영혼들이 다시 적극적으로 살육을 이어갔다. 목숨을 잃고, 몸도 잃은 채 영혼만 남은 자들이라도 두려움이 뭔지는 아는 것이다. 군터는 그 모습에 실소하며, 서서히 닫히기 시작한 성문을 지나쳤다.

“장군! 어째서!”

“따를 필요 없다.”

병사들의 황망한 시선을 뒤로 한 채, 군터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미치광이 신을 응시했다.

* * *

쿠웅!

백 그루의 거목이 동시에 쓰러진다면 이런 소리가 날까 싶었다. 거대한 몸뚱이가 땅에 박히며 한바탕 흙먼지가 일어 주변의 모든 것을 휩쓸었다. 휩쓸리는 순간에 반사적으로 숨을 참은 시어문드는 그나마 나았으나, 그러지 못한 이들은 목에 가시라도 박힌 것처럼 연신 기침을 해댔다.

“질긴 놈. 드디어 잡았구만.”

그 말처럼, 괴물은 질겼다. 질기다는 말로도 많이 부족할 만큼 질겼다. 도끼를 든 병사 십수 명이 각자 열 번은 넘게 도끼를 휘둘렀고, 부러진 창만 수십 자루였다. 놈의 육중한 몸에 깔려 뼈가 부러진 이들도 열게 가까웠고 기어이 목숨을 잃은 이도 셋이었다. 상당한 피해였지만, 그래도 처음 느꼈던 암담함에 비하면 싸게 먹힌 셈이다.

“뭘 다 끝난 듯이 늘어져 있나.”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런 놈이 하나뿐일까? 시어문드는 그렇게 되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숨이 넘어가기 직전인 병사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하다. 시어문드 자신에게도 그랬다. 그는 하고 싶지만 하기 싫었던 말을 도로 삼키고, 쓰러진 괴물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이 질긴 놈은 땅속에서 튀어나왔다. 지렁이답게 구멍을 파고 나왔단 말이지. 놈이 빠져나온 구멍. 그것을 틀어막아야 하지 않겠나. 또 어떤 잡것들이 그 구멍을 통해서 기어 올라올지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아!”

“술사들을 불러와.”

“괜찮을까요? 그자들, 얼핏 보기에도 상태가 영 안 좋아 보이던데 말입니다.”

“누군들 상태가 좋나? 아무리 비싼 몸들이라고 해도 밥값은 해야 할 것 아닌가. 또 엄살을 부리면 멱살이라도 잡아서 끌고 와.”

시어문드는 엉덩이 무거운 술사들에게 사적인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사람은 사람마다 제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술사들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 만큼 대단하지만, 그런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화살 한 대에 목숨이 끊어질 수도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안전한 후방에 두고 그들의 힘이 필요할 때만 나서게 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지금까지 충분히 사정을 봐주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이 이번에도 몸 상태 어쩌고 핑계를 대며 뒤에 물러나 있으려 한다면?

‘쓰지 못하는 전력은 없는 것과 다름없지.’

하는 일 없이 밥만, 그것도 비싼 밥만 축내는 작자들은 적어도 전장에는 필요 없다.

“장군께서는?”

“아직 별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잠시 후. 반 끌려 나오다시피 한 술사들은 죽상을 한 채 구멍 난 땅을 메웠다. 그들이 오기 전에 병사들이 젖먹던 힘까지 다해 괴물의 식은 몸뚱이를 얼추 밀어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추우시오?”

“아, 아니오.”

“그런데 왜 이리 떨어대는 거요?”

술사들은 맨몸으로 눈밭을 몇 바퀴 구르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떨어댔다. 구멍을 메우느라 힘을 너무 써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 불려왔을 때부터 그랬다. 시어문드가 그것이 의아하여 묻자, 그들은 이제 이까지 부딪쳐가며 말했다.

“재, 재앙…아니, 악신이 와 있소.”

“악신?”

“그렇소. 느껴지지 않으시오? 그 불쾌하고 두려운 존재의 숨결이. 그의 존재 자체가…우, 우리의 정신을 좀먹고 있소. 정신을 집중하고 있지 않으면 그가 우리를 집어삼킬 거요. 트, 틀림없이 그럴 테지!”

횡설수설하던 술사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반쯤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다. 그쯤 되자 시어문드도 술사들이 괜한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님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느껴지기는 뭐가 느껴진다는 게야?’

바람이 유난히 서늘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뿐이다. 어쩌면 이미 전투를 거듭하며 몸에 열이 잔뜩 올라 느끼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저렇게 벌벌 떨 정도인가? 하지만 말을 한 자뿐 아니라, 다른 술사들도 모두 새파랗게 질려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이상하기는 했다.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인데.’

저들은 지렁이 녀석을 보고도 한번 흠칫했을 뿐, 크게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에 대해서는 거의 발작하는 수준으로 벌벌 떨어대고 있었다.

“좋아. 그 악신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소?”

“가, 가까이 있소. 아주 가까이에 있어! 도망쳐야 하나? 그래! 도망쳐야 하오. 일단 도망친 후에 그것이 물러나면…….”

헛소리를 늘어놓던 나이 지긋한 술사가 갑자기 덜컥 말을 멈췄다. 몸까지 동시에 굳으면서 말이다. 그 꼴은 우습다기보다는 심상치 않아 보였다. 덩달아 안색이 굳은 시어문드가 물었다.

“무슨 일이오? 뭐가 또 느껴지시오? 악신이라는 놈이 이곳으로 오고 있나?”

“아…아아…….”

석상처럼 굳어 있던 술사가 털썩!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주저앉았다. 다른 이들도 비슷했다. 그들 모두 크게 몸을 휘청이거나 쓰러졌다. 그리고는 눈물과 콧물을 쏟아냈다. 그 어떤 흐느낌도 없이, 그저 네 구멍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보시오! 이봐! 무슨 일이냐니까!”

시어문드가 주저앉은 자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렇게 그와 눈을 마주치며 윽박지르니, 멍한 표정의 술사가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중얼거렸다.

“악신…악신이 둘……. 아아아!”

그는 그 후로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를 몇 차례 내더니만 기어이 눈을 까뒤집고 혼절해버렸다. 시어문드는 그를 내팽개치다시피 내려놓고 인상을 구겼다.

‘악신이 둘? 둘이라고?’

술사들이 평범한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타고난, 그리고 수없이 단련한 기감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지니지 못한 감각이다. 그래도 그 부분에 대해 아쉬워한 적은 없었다. 보이는 게 많으면 그만큼 신경 쓸 거리도 많아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조금 아쉬웠다. 대체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장군이라면…….’

무인이지만 기감이라고 한다면 어지간한 술사들보다 더 뛰어난 것이 그의 상관이다. 그라면 필시 악신인지 뭔지에 대해서도 이 한심한 작자들보다 더 정확히 감지하고 있겠지.

‘아니. 그게 아니지. 어쩌면…….’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시어문드의 시선이 여전히 시끌벅적한 성문 쪽으로 향했다.

* * *

방금까지 세상은 시끌시끌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방금까지의 시끌벅적함이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고요했다.

군터는 전에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기둥 속에 갇혀 있던 이가로프와 대면했을 때. 그 멈춰있던 세상. 그곳의 공기. 그 적막함.

물론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가장 큰 차이는 그때는 이가로프가 그를 끌어들였으나, 이번에는 반대라는 점이다.

어렵지 않았다. 수면을 둥둥 떠다니는 잎 하나를 손에 쥐는 것처럼 간단했다. 집중해서 마주 보는 것. 그렇게 마음먹고, 그렇게 하자 그는 이 세상에 저것과 단둘이 존재할 수 있었다.

[비참하게 지고 나서 엄한 곳에 화를 푸는군.]

격렬하게 꿈틀거리는 그것. 말은 알아듣지 못해도 마음은 접했을 테니 그 안에 담긴 조소와 경멸도 느꼈을 것이다.

더욱 화를 낸다. 이렇게 떨어져나오지 않았더라면 저 분노에 영향을 받은 것들이 더욱 미쳐 날뛰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괜찮다.

[억지는 여기까지다.]

본래 오래전에 사라졌어야 할 것이 지금까지 남아 난장을 피우고 있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거인왕의 지분이 지대했으나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관심도 없었고.

마음과 마음. 정신과 정신이 접하는 세상. 군터는 그곳에서 창 한 자루를 쥐고 그것과 마주 섰다.

한쪽에서는 소리 없는 광풍이 몰아쳤고, 한쪽에서는 숨 쉬지 않는 사람의 형상이 창 한 자루만 달랑 쥐고 그 소리 없는 재해 앞에 담담히 섰다.

그 극명한 대비는 일견 무모하고 초라한 듯했다. 보이는 것만으로 따지면 군터는 금방이라도 그의 앞에서 휘몰아치는 폭풍에 뭉개질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군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애초에 저것을 끌고 들어온 것이 그였다. 자신이 없었다면 그리 대담하게 굴 수 있었겠는가.

그는 알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대단한 존재 같지만, 사실 저것은 실체 없는 감정과 힘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았다. 저것의 실체는 오래전, 거인왕에 의해 소멸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것의 강대함은 말하자면 일그러진 원념 한 꺼풀로 꾸며낸 위세일 뿐이었다. 감히 그 한 꺼풀을 들추지 못한 자들에게는 실제와 다름없는 영향력을 끼치지만, 그 한 꺼풀을 들출 수 있는 존재에게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것이다.

[사라져라. 한심한 것들.]

진즉 사라져야 할 것들이 미련을 붙들고서 떼를 쓴다. 군터는 거기에 어울려줄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 그의 단호한 마음은 이 적막한 세상에서 한 자루 창으로 형상화됐다.

검은 창이 빠르게, 하지만 가볍게 허공을 찔렀다. 창끝이 가리키는 한 점은 매우 작았으나, 그럼에도 앞에 놓인 모든 것을 가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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