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57화 (957/1,064)

957화

“저, 저게…….”

오거스트 네베시는 자신이 지금 평소 그렇게나 못마땅해하던, ‘모자라고 덜떨어진 것들’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만큼,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시체가 일어선다. 사람, 짐승, 괴물 할 것 없이 죽어서 쓰러졌던 것들이 다시 일어나 싸운다. 그런 모습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그보다 더 그의 가슴을 철렁이게 만드는 것은 지금쯤 첩탑의 창문을 통해 전투를 지켜보고 있을 주교의 존재였다.

‘사령술. 사령술이라니!’

물론 군터 크렘보르가 사령술을 사용한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저질스러운 헛소문이라고 생각하고 넘겼지만, 그 후로도 꾸준히 들려오는 이야기에 혹시 하는 의심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아무려면 어떠냐 싶었다. 소문이 돌기 시작한 지가 한참인데도 아직까지 교단이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역시 헛소문에 지나지 않거나, 사실이라고 해도 어떤 이유에서건 교단이 묵인하고 넘어가기로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하필 지금. 하필 이 데카람에서 이렇게 대놓고 사령술을 사용하다니?

‘빌어먹을.’

사실 요즘 같은 시대에, 특히 제국의 외곽에 자리한 판니른 같은 곳에서는 교단의 위세를 실감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신앙심이야 황도와 북부 사람들의 것이 다르겠냐마는, 아무래도 교단 본부에서 멀어질수록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력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를 이어 세습하는 총독 가문의 수가 황도에서 멀어질수록 많아지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때문에 외주(外州) 교구에 속한 성직자들은 어느 정도 해당 지역의 권세가들과 타협하는 경우가 많았다. 교리상 지적해야 할 부분을 적당히 눈 감고 넘어 가주고 기부금을 받는다든가 하는 형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데카람에 와 있는 주교는 그런 대다수 성직자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 신앙심과 완고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듣자 하니 교단 내 모든 성서를 달달 왼다던가? 처음에는 과장이 심하다고 여겼으나, 직접 그와 마주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가 이 변방까지 내몰린 이유가 아주 자그마한 부분에서까지 융통성 없이 따지고 들어 윗사람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아마 사실일 것이다.

오거스트 네베시는 전날. 군터 크렘보르와 짤막하게 인사를 나누던 그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할 말은 많은데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참는다는 기색이 뚜렷했던, 그 눈빛이 어찌나 형형했는지 군터 크렘보르 뒤편에 있는 무관들이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쏘아봤을 정도였다. 정작 당사자인 군터 크렘보르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기에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정말 곤란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대담하군. 정말 대담해.’

시체들 사이를 자연스럽게 누비는 군터 크렘보르가 보인다. 어떻게 봐도 여유를 잃은 자의 모습은 아니었다. 막다른 지경까지 몰려서, 어쩔 수 없이 사령술을 사용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마치 이곳에 있는 성직자들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거리낌 없이 시체들을 부려서 성문으로 밀고 들어오려던 적을 도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래. 이 난리가 다 끝난 다음에나 생각할 문제다.’

바위 괴물이 성문을 들이받아 기어이 뚫고 들어올 때만 해도 내성으로의 퇴각을 고려했던 그였다. 교단의 주교가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상황에서 사령술을 꺼내든 군터 크렘보르의 무신경함에 속이 쓰릴 지경이었지만 그것도 다 멀쩡하게 살고 난 후에야 속을 끓이든 어쩌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이다! 놈들이 주춤하고 있을 때 빨리 성문을 막아!”

“장군! 성문은 이미 뚫렸습니다!”

“눈이 있으면 보아라! 성문이 부서진 것이 아니다! 걸쇠가 부러진 것뿐이야!”

전시에 상관의 명령에 토를 달다니? 오거스트 네베시는 대꾸한 수하의 머리를 후려치려다가 꾹 눌러 참고 다시 명했다. 그제야 수하는 뒤늦게 허둥대며 계단을 내려갔다. 나름 서두른다고 서두르는 모습마저 눈에 밟히니, 그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다시 성벽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당장은 저 시체들이 성문을 막아준다지만…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는가.’

밀려드는 짐승, 괴물의 무리는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저놈들에게 질 거라는 생각은 여전히 들지 않지만, 이대로 계속 흘러가면 얼마나 피를 흘려야 할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였다.

지금 몰려온 저놈들을 쓸어버리면 끝나는가? 그렇다면야 내일은 없는 것처럼 모두 쏟아부어 일전을 치르겠지만,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다. 하잘의 소식이 끊겼고, 인근 도시들도 상황이 어떤지 알 수가 없다. 지금 데카람은 철저하게 고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되도록 전력을 보전해야 한다.

‘성벽을 이용해 최대한 놈들의 수를 줄인 후, 안쪽으로 끌어들여서 상대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시가지는 지옥이 될 테지만, 오거스트 네베시는 차라리 그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식량만 축내는 인원을 대가로 병력 소모를 줄이는 것. 비정하지만 현실적인 판단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 충분히 고려해볼 만한 선택지이고.

하지만 지금 군대는 군터 크렘보르의 지휘하에 있다. 오거스트 네베시는 비정한 승부수를 던지기보다는 명성 높은 무장에게 책임을 미루는 쪽을 택했다.

‘믿는 수밖에.’

수군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배짱 없는 작자라며 저들끼리 조롱 섞인 말을 속삭인다는 것도.

모두 멍청이들이다. 자존심을 내세워도 될 때와 안 될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놈들. 무엇이 더 중요한지 고민조차 하지 않는 놈들.

퀘에에에엑-!

지금쯤 고집스러운 주교 곁에서 없는 신앙심을 짜내고 있을 머저리들을 떠올리며 조소하던 차. 생전 처음 드는 괴성이 들려왔다.

“뭐, 뭐야!”

소리가 어디서 들려왔는지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저 오른쪽. 성벽이 안쪽으로 꺾어지는 부분에서 성벽보다 조금 더 큰 무언가가 예의 그 괴성을 토하면서 꿈틀대고 있었다.

* * *

퀘에에에엑-!

시체들이 성문을 틀어막으면서 잠시 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그 잠깐의 휴식마저 아니꼬웠던 것일까. 만약 이쪽의 피를 말리려는 수작이라면 꽤 성공적이었다.

“저건 또 뭐야…….”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뱀인지 지렁이인지 모를 괴물은 문제가 아니었다. 아니, 문제기는 하다. 아주 큰 문제다. 몸을 곧추세운 채 머리를 성벽보다 조금 더 높은 위치에서 까딱이고 있는 괴물이 문제가 아닐 리 없다. 그런데 그런 괴물이 문제가 아니라고 한 것은, 지금은 그런 괴물의 거대한 몸뚱이조차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어어엇!”

괴물이 몸을 흔들어대는 바로 옆. 괴물보다 더 위태롭게 흔들리는 성벽 때문에 말이다.

“장군!”

“가서 막아라!”

다급한 외침에 기다렸다는 듯 답이 돌아온다. 그런데 기대했던 답은 아니었다.

‘가서 막으라고? 저걸?’

명령이 내려졌으니 따르면 그만이건만, 이번만큼은 순간적으로 머뭇거리고 말았다. 할 수 있을까? 저런 괴물을? 커도 어지간히 커야지. 머리가 성벽 언저리에서 놀고 있으니 전의가 생기려다가도 뒷걸음질 친다. 자신이 이러하니 병사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을 터.

“덩치만 큰 놈일 뿐이다! 가서 죽여!”

안에서 싹트던 망설임과 두려움을 읽었는지, 그의 상관이 평소와 달리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덩치만 큰 놈이라고? 그걸 어찌 아시지?

시어문드는 속으로 그렇게 물음을 던지면서도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따라와라! 저 말랑말랑한 지렁이를 당장 토막 내지 않으면 성벽이 무너져버릴 거다!”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관의 한 마디는 우습게도 그의 안에서 큰 용기가 되어 자리 잡았다. 이보다 더한,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맹목적으로 그의 뒤만 보고 달렸다. 그런데 어찌 이제 와 의심을 하겠는가.

한 번 두려움을 걷어내자 평소의 이성이 돌아왔다. 지렁이인지 뱀인지 모를 거대 괴물에게 다가가면서, 시어문드는 생각을 정리했다.

‘저 괴물이 모습을 드러낸 절묘하기는 하지만, 이쪽에 혼란을 줄 작정이었다면 이렇게 따로 노는 일 없이 바위 괴물과 동시에 난리를 쳤을 거다. 그러니 처음 가설대로, 놈들에게 지휘 체계 같은 것은 없다고 봐야 해.’

정황이 그러했고, 그렇게 믿고 싶은 것도 있었다. 만약 저 괴물들이 어설프게나마 전술 같은 것을 구사한다고 하면 너무나 끔찍할 테니까.

‘덩치만 큰 놈이라고 하셨지.’

물론 전투에서 덩치는 그 자체로 무기다. 덩치가 큰 놈들은 대개 힘이 좋기 마련이니까. 저 괴물 놈만 해도 그렇다. 저 정도라면 그냥 깔아뭉개기만 해도 어지간한 것은 다 박살 낼 수 있을 터.

하지만 덩치가 크다는 말은 곧, 그만큼 더 공격에 쉽게 노출된다는 뜻이다.

‘정말 말랑말랑해 보이는데?’

거리가 줄어들며, 괴물의 모습을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된 시어문드는 아직도 성벽 옆에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괴물이 바위 괴물과는 달리 꽤 부드러워 보이는 몸뚱이를 지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성문에서 출발할 때 말랑말랑 어쩌고 외쳤던 것은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 그냥 던진 말이었는데, 지금 보니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쏠까요?”

솔롬의 병사 중에는 활 솜씨로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 자들이 제법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을 타면서 활을 쏘는 훈련을 받은 병사들이 많았으니까 말이다. 아직 괴물에게 닿으려면 꽤나 남았음에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쯤에서 쏘면 맞출 수 있다는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음.”

활로 놈을 잡을 수 있을까? 시어문드는 회의적이었다. 아무리 저 괴물 놈의 몸이 말랑말랑해 보인다고 한들, 그리고 정말로 그렇다 한들 화살로 저 커다란 놈을 잡으려면 대체 얼마나 쏴야 할 것인가. 만약 무턱대고 놈을 맞췄다가 놈이 발광이라도 시작하면? 지금도 위태로워 보이는 성벽이 주저앉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니. 벌써부터 괴물놈의 성질을 돋울 필요는 없지. 조용히 접근해서 단숨에 잡는다.”

“가능하겠습니까?”

“덩치만 큰 지렁이일 뿐이다. 도끼로 토막을 치면 제깟 놈이 뭘 어쩌겠나.”

아드리안이나 할 법한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시어문드는 의도적으로 더 과격하게 말했다. 자신의 꾸며낸 자신감이 병사들에게 약간이나마 힘을 불어넣어주기를 바라면서.

* * *

땅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괴물에 대해서는 시어문드에게 일임하고 이후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시어문드라면 어렵지 않게 놈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대단치 않았다.

형체 없는 거대한 악의를 신경 쓰느라 때문에 기감이 흐려졌다, 방심했다 등등. 이런저런 이유도 있었으나 저 덩치 큰 지렁이의 존재를 미리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은 기본적으로 놈의 존재감, 달리 말하면 놈이 품은 기운이 그만큼 미미했기 때문이었다.

기운의 크기가 곧 전투력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저 정도로 덩치가 큰 놈이 저렇게 존재감이 옅다면 그건 놈이 큰 몸뚱이 말고는 대단한 부분이 없다는 뜻일 터였다.

그렇기에 군터는 놈에 대해서는 시어문드에게 일임하고 신경을 껐다. 그는 이제부터 몸만 큰 지렁이보다 더 중요한 적을 상대해야 했다.

‘오는군.’

눈을 까뒤집은 짐승과 괴물들에게서 묻어나와 기어이 데카람의 하늘마저 뒤덮은 악의. 그 응집체라 할 만한 악의의 덩어리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기감을 간질이다가, 콕콕 찌르는 듯하다가, 나중에는 통째로 쥐고 흔드는 듯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하던 그것은 이윽고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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