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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55화 (955/1,064)

955화

콰앙!

일순간 귀가 먹고, 몸이 떨리는 굉음. 그렇게나 크고 단단한 성문이 강제로 활짝 열리는 모습은 상당히 비현실적이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던 병사들조차 바보처럼 입을 벌리게 할 만큼.

“아아악!”

충분히 떨어졌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충분하지 않았던 한 병사가 불을 뒤집어쓴 거체에 깔려 본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으스러졌다. 거기서 단 몇 발자국 떨어져 있었기에 목숨을 건진 또 다른 병사가 발작하듯 창을 내질렀다. 그러나 빠르게 뻗어간 창은 불타오르는 몸에 닿자마자 잔뜩 마른 낙엽처럼 힘없이 부서졌다.

크아아아악-!

자신이 공격당한 것도 모르는지, 그저 거칠게 포효할 뿐인 불의 거인에게서는 지독한 기름냄새가 풍겼다. 몸 전체에 뒤집어쓰다시피 한 기름과, 그 기름에 번진 불길조차 거인…아니 괴물에게 고통을 주지는 못하는 듯했다. 괴물의 살 떨리는 포효에 고통은 묻어나지 않았다.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끔찍한 소리에 가득한 것은 오직 분노뿐이었다.

분노. 그래. 분노뿐이다. 그런데 무엇에 저리 분노하지? 집결한 병사들을 이끌고 아래로 달려들면서, 군터는 문득 생각했다.

저 튼튼해보이는 괴물도 그렇고, 천적 혹은 먹잇감과 어깨를 나란히하고 앞만 보며 달려드는 것들도 그렇고, 모두 분노에 휩싸여있다. 그 분노가 놈들의 이성과 본능을 마비시키고, 맹목적으로 이 도시를 향해 달리도록 만들고 있다.

크아아악!

불타는 괴물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괴물을 감지하듯, 괴물 역시 그를 감지했으리라.

쾅!

훌쩍 뛰어오른 군터의 아래. 방금까지만 해도 숨을 고르듯 부서진 걸쇠 앞에서 포효하고 있던 괴물이 씩씩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몸을 내던지다시피 달려든 것이다. 덩치를 고려하면 실로 말도 안 되는 속도. 주변에 있던 병사들, 심지어 군터를 따라 내려온 병사들마저도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군터는 몸을 내던진 직후 괴물의 몸이 미세하게 굳은 것을 놓치지 않았다.

과격한 움직임. 그러나 반동이 있는 듯했다.

“당황할 것 없다! 저놈은 내가 맡을 테니 너희는 뒤따라 들어오는 놈들을 막아라!”

병사들에게 저 찔러도 피 한방울 나지 않을(비유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괴물을 상대하게 할 수는 없다. 평범한 창칼로는 백날 찌르고 베어봐야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할 테니. 하지만 자신이라면 가능하다. 자신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독특하지만 어려운 상대는 아니다.’

저런 움직임을 연속으로 가져가지는 못하는 것 같고, 움직임 역시 덩치에 비해서는 제법 빠르지만 그렇다고 보고 반응하지 못할 정도인 것은 아니다.

[느껴지나 장군?]

이가로프가 속삭였다. 안에서부터 희미하게 들려오는 속삭임. 그는 군터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군터의 기감으로 모든 것을 느꼈다. 그렇기에 그는 전면의 괴물 역시 뚜렷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저것. 우리와 동류다.]

그가 이야기하는 동류는 군터와 자신이 아니라 영혼 감옥에 머물고 있는 자신을 비롯한 영혼들을 뜻했다. 군터는 그의 속삭임을 들으며 괴물의 관절처럼 보이는 부분을 재빠르게 찌르고 물러섰다. 역시 그의 창은 괴물의 튼튼한 몸에도 제대로 흔적을 남겼다. 그리 깊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힘을 싣는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결과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장군도 짐작하겠지. 저 기괴한 몸에 생채기를 얼마나 내든 별 의미는 없을 것이네. 저건 혼체(魂體)야. 영혼에 직접적으로 상처를 내지 않는 한, 저 괴물은 쓰러지지 않을 테지.]

이가로프는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하지만 여전히 안개에 감싸인 듯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저 괴물과 아주 비슷한 느낌을 주었던 존재를 떠올렸다.

[정령. 저 괴물은 정령과 비슷해. 비록 눈으로 보이는 모습은 전혀 다르지만, 느껴지는 기질은 매우 흡사하네.]

[글쎄. 아닌 것 같은데.]

정령.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정령이란 이야기 속에서나 들어봤을, 실존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신비스러운 존재겠지만 군터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원한다면 언제든 정령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었다. 조금만 귀를 열어도 귀찮을 정도로 속삭이는 정령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저 괴물이 정령과 비슷하다고? 웃기지도 않는다.

[본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망가졌지. 하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아. 저것은 정령과 매우 흡사하네. 어쩌면 정말 정령일지도 모르지. 무척이나 오래된 존재야. 이 땅의 신과 함께 묻혀버린 과거의 존재.]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괴물이 성벽을 들이받았다. 괴물과 부딪친 성벽 일부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거나 휘청거렸다.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들으며, 군터는 괴물을 성벽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놈을 유인했다.

[이제야 알겠군. 이것들은 우리와 비슷해.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리며 스스로 뒤틀렸지. 느껴지나 장군? 이것들은 모두 분노의 노예다. 눈이 멀고, 귀가 멀고, 영혼까지 더럽혀졌네.]

괴물의 팔(처럼 보이는)이 땅을 강타하고, 폭음과 흙먼지를 일으켰다. 이번에도 훌쩍 뛰어 괴물의 공격을 간단히 피해낸 군터가 길게 잡은 창을 도끼처럼 내리 찍었다. 일반적인 창보다 긴 창신이 괴물의 팔 일부를 반쯤 파고 들었다.

[대체 누가 이들을 이토록 분노하게 했을까.]

첫인상과는 달리, 이가로프는 상당히 수다스러운 자였다. 오랫동안 고통과 절망 속에서 스스로 되뇌는 것 외에는 이성을 분출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저주에서 벗어나 비로소 온전히 자아를 되찾은 그는 시시때때로 지금처럼 군터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지금 군터를 부추기고 있었다. 이 땅에 재앙을 불러온 자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상기시키며, 그에게 분노하게끔 유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군터는 그의 뻔한 수작에 조금도 휘둘리지 않았다.

[주절주절 떠는 건 여기까지.]

이가로프가 떠들어댄 이야기 중 태반이 헛소리였지만, 그래도 틀리지 않은 부분이 몇 있었다. 그중 하나는, 창칼로 이 괴물을 상대하는 것이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

[아아아-!]

[자유로군!]

이가로프와 그의 결사대. 그리고 본래 영혼 감옥의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고대의 영혼들이 활짝 열린 감옥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그들은 음산한 바람이 되어 괴물을 향해 쏘아나갔고, 보이지 않는 적을 감지한 괴물은 여전히 불타오르는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영혼들을 떨쳐내려 했다.

하지만 사람의 창칼이 괴물에게 통하지 않았듯, 괴물의 거칠고 파괴적인 몸부림도 영혼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아아아.

괴물의 몸부림이 조금씩 느려졌다. 거대한 몸뚱이를 움직이는 혼체에 영혼들이 영향을 주면서 몸의 통제가 느슨해진 것이었다. 군터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뛰어올라 괴물의 가슴 한복판에 창을 깊숙이 박아넣었다. 이전까지 강한 반발력에 손이 찢어졌던 것과 다르게, 이번에는 그리 어렵지 않게 괴물의 몸에 깊숙이 창을 박아넣을 수 있었다. 이전까지가 바위와 부딪치는 것 같았다면, 지금은 나무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무르지는 않지만, 그뿐인.

그어어어!

괴물의 가슴에 창을 붙들고 매달린 군터는 성인 남성에게 안긴 갓난 아이와 같았다. 그런데 크기만 놓고 보면 끄떡도 하지 않아야 할 괴물이 군터가 창을 붙들고 매달리기 무섭게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만약 이 자리에 뛰어난 기감을 타고나고, 그것을 부지런히 갈고 닦아 영안(靈眼)을 뜬 이가 있었다면 괴물의 전신에 빈틈없이 매달리고 물어 뜯는 흉험한 영혼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치 과실을 갉아먹는 개미떼처럼, 괴물의 영체를 공격하고 침식하는 영혼들.

쿠웅!

괴물의 몸을 이루던 돌덩이들이 하나둘씩 떨어져나갔다. 불안하게 지은 건물이 끝내 붕괴하듯, 괴물은 힘없이 무너져내렸다. 홀로 성문을 부수고 들어와 병사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공포스러운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허망한 최후였다.

[아아아-!]

그러나 무너진 것은 몸뚱이 뿐이었다. 돌덩이를 하나로 엮어 몸을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혼체의 힘. 그리고 그 혼체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붙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기 때문일까. 방금까지 무력하게 당하기만 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몰려드는 영혼들에게 맹렬히 저항하고 있었다.

껍데기를 벗어던진 혼체는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 네 발 달린 짐승. 들소 같기도 하고 곰 같기도 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짐승의 모습. 그것이 저 혼체의 본모습일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저 혼체가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저 본 적 없는 짐승의 형태인 것은 분명했다.

[그아아아아!]

짐승이 거칠게 포효하고 앞발로 후려친다. 거기에 휩쓸린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그러나 앞발에 맞기 전보다 눈에 띄게 흐릿해졌다. 한번 더 당했다가는 그대로 소멸해버릴 수도 있겠다 싶었는지, 공격받은 영혼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런 영혼이 한둘이 아니었다. 껍데기를 벗어던진 짐승 형태의 혼체는 여전히 두려움 없이, 오직 광기에 휩싸여 맹렬히 날뛰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납다한들 결국 수백의 사냥꾼에게 노려지는 한 마리의 사냥감일 뿐이었다. 뭣모르고 당했던 것도 처음의 몇몇뿐. 시간이 흐르고 짐승의 몸부림에 익숙해진 영혼들은 차분하고 냉정하게 조금씩 사냥감을 갉아먹었다. 영혼들 가운데 가장 이성적이며 뛰어난 기량을 지닌 이가로프가 그들을 이끌었다.

아무 말도, 신호도 없이 조용히. 하지만 착실하게.

[크아아아아-!]

처음에는 사나웠던 짐승의 포효가 이제 처절하게 들렸다. 기분탓이 아니다. 영혼에서 영혼으로, 정신에서 정신으로 전해지는 소리는 그 어떤 거짓이나 꾸밈도 없이 진솔하다.

분노. 고통. 그리고 슬픔.

쿵!

짐승의 처절한 몸부림도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는 없었다. 이곳저곳이 갈라지고, 사라지고, 희미해진 짐승이 마침내 주저앉았다. 그를 본 이가로프가 멈춰섰고, 다른 영혼들도 거리를 둔 채 자리를 지켰다.

“…….”

군터가 짐승에게 다가갔다. 그는 짐승과 영혼들의 싸움을 지켜보기만 했다. 하지만 짐승의 가슴 한가운데에는 그가 뿌린 죽음이 독이 되어 착실히 번져가고 있었다.

[…….]

그와 짐승의 눈이 마주쳤다.

상처입은 영혼에서는 공허함이 느껴졌다. 분노도, 광기도, 지금만큼은 모두 희미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진정한 죽음이 모든 것을 공평하게 거두어간 것이다.

[너는 무엇이냐.]

군터가 손을 뻗어 그가 뿌린 죽음을 거두었다. 스스로 끝을 마주하고 있는 상대의 등을 굳이 떠밀 필요는 없으리라.

[…….]

짐승의 두 눈은 여전히 텅 비어있었다. 그러나 아주 잠깐. 그야말로 한순간. 그의 두 눈이 기억 속을 더듬었다.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군터는 그 한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조금은 더 푸르고, 조금은 더 고요했던 땅.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짐승은 기억하는 그 순간부터 많은 생명과 함께했다.

그는 자연의 소생이었으며, 수많은 염원의 집합체였다. 그는 많은 생명과 함께 숨쉬었고, 늘 그들의 곁에 머물며 이끌리는대로 움직였다.

그는 공경의 대상이었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때때로 신이 되었고, 재앙이 되기도 했다. 세상의 주춧돌. 자연의 화신. 그를 가리키는 말들은 많았지만, 무엇하나 정확하게 그를 표현하지는 못했다.

그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존재했다. 그보다 더 거대한 존재, 더 거대한 의지 속에서 어떠한 의문이나 의심도 없이 숨쉬며 머물렀다. 최후의 날이 도래하기 전까지.

* * *

“…….”

군터는 빗물에 씻기는 먼지처럼 산산이 부서지고 흩어지는, 한때는 신이라 불리기도 했던 존재의 마지막을 눈에 담았다.

이가로프는 이 존재가 자신과 동류라고 했다. 정령이라고도 했고.

결론적으로,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맞은 것도 아니지만. 그러니 반만 맞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제야 알겠군.]

이 땅에서 벌어진 일. 벌어지고 있는 일. 그 모든 인과를 이제야 다 알게 되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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