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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54화 (954/1,064)

954화

“궁수 준비!”

오거스트 네베시가 겁 많은 얼간이였기 때문에 다행인 점 하나. 난리가 벌어지고 난 이후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른 적이 없다시피 했기에 도시에 비축된 군수물자가 제법 풍족했다. 창과 갑옷, 그리고 화살까지.

그야말로 눈 뒤 집어진 개떼처럼(실제로 들개들이 다수 섞여 있기도 했다) 몰려오는 짐승과 괴물들에게는 갑옷도, 방패도 없었다. 그 말인즉 맞을만한 거리에서 쏘기만 한다면 화살이 빗나갈 일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괴물들은 다행히 인간의 군대처럼 사방을 포위하지는 않았다. 놈들은 오직 서쪽에서만 몰려왔다. 그렇기에 군터도 서쪽 성벽으로 병력을 집중시켰으나, 그렇다고 다른 쪽의 방비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장군.”

오거스트 네베시가 겁 많은 얼간이였기 때문에 다행인 점 둘. 바로 어제, 처음 데카람에 온 이방인인 군터가 당연하다는 듯 지휘권을 휘두르고 있음에도 반발하지 않았다. 아니, 반발은커녕 어미를 따라다니는 새끼처럼 불안하게 눈만 굴려댔다. 어찌 보면 현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유례없는 위기 속에서 괜한 자존심을 내세우기보다는 다소 체면을 구기더라도 실리를 쫓는 것이 낫다는 판단.

군터 크렘보르라는 인물에 대한 호오야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설령 그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라도 그의 군사적인 능력만큼은 인정한다. 능력이 없다면 몸뚱이 하나 가지고 흘러들어온 일개 객장이 그 짧은 시간 동안 어찌 일가를 이루었겠는가.

“뭔가 이상합니다.”

이제야 깨달았나. 한참 늦지만, 굳이 탓할 필요는 없다. 멍청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멍청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 잘못이지.

“성문의 방비를 보강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저 움직이는 거대한 바위를 보고서 생각이 바뀐 모양이었다. 군터는 고개만 까딱였다. 그의 생각도 같았다. 저 덩치가 성문에 들이받는다면 그 자체로 공성 병기가 아니겠나.

하지만, 걸리는 건 성문만이 아니다.

사냥감과 사냥꾼이 나란히 눈이 돌아간 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지 않나. 이미 저것들에게 이성과 본능은 존재하지 않는다. 놈들이 두려움을,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 저것들이 머리를 성벽에 박으며 달려들다가, 끝내 시체로 쌓인 언덕을 밟고 성벽 위에 오르지 못한다는 보장이 없다.

크와아아악-!

성대에서 나오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기괴하고, 커다란 포효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오거스트 네베시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군터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어제와 똑같이, 아니 어제보다 한층 더 우중충했다. 비가 내려도 진작 내렸어야 할 것 같은 모양새다.

‘여기서 뭘 하는 건지 모르겠군.’

판니른으로 돌아온 후, 계속 원치 않게 휩쓸려 다니고 있다. 이게 최선이다, 어쩔 수 없다 라는 핑계로 여기까지 왔지만…글쎄. 어째서 자신이 여기서 저 희한한 것들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

문득, 저 위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마치 이 판을 만들고, 손에 쥔 채 이리저리 굴려대는 존재가 저 위에서 자신을 깔아보며 가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치광이가 된 것 같군.’

하늘에서 땅으로 다시 시선을 돌린 군터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그 역시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땅에 내려앉은 기이한 공기는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에 크든 작든 영향을 주고 있으며, 그 영향은 기감이 예민한 이들일수록 더 크게 받는 듯했다. 데카람의 술사들이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그런 짐작에 힘을 실어주었다.

“쏴라!”

거뭇한 화살 비가 짐승과 괴물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구 쏘라는, 명령 같지 않은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쉼 없이 시위를 당겼다. 족히 수백, 수천의 짐승과 괴물들이 달리던 그대로 나자빠졌다. 그런데도 수가 줄어든 티가 나지 않았다. 화살을 쏘면 쏠수록, 성벽 위 병사들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게 질려갔다.

발목에나 간신히 오나 싶었던 물결이 점차 무릎, 허리, 가슴을 넘어 이제 머리 꼭대기 그 이상으로 높아진다.

그 어떤 적도 막아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성벽이 이제 더는 수호신처럼 든든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쏴! 계속 쏘란 말이다!”

뭣 모르는 짐승들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라는 듯 자신감이 넘쳤던 목소리가 이제는 비명처럼 다급하게 들렸다. 그래도 병사들은 그 말처럼 쉬지 않고 화살을 시위에 걸고, 당겼다. 그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옵니다!”

온다고? 대체 어디서? 뭐가?

쿵!

자그마한 진동. 착각인가 싶을 만큼 희미했던 울림이 잦아지고, 커진다.

쿵! 쿵쿵!

그 소리는 달리 들리기도 했다.

콰직!

아래쪽. 뭔가가 으깨지는 소리. 하지만 정면만 바라보며 손에서 피가 나도록 활 시위를 당기는 이들이 아래를 내려다볼 겨를이 있을 리 없다. 끝내 화살통 하나를 비운 병사가 후열과 교대하여 물러나는 와중, 슬쩍 아래를 곁눈질했다. 동료들의 몸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거뭇한 뭔가가 흔들거리는 것 같았다. 어쩌면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르지만.

* * *

“푸하!”

시어문드가 기어이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을 크게 토했다. 곁에 있던 데카람의 젊은 장교가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거야 원. 미치겠군.’

그의 시선이 저 아래, 불안하게 흔들거리는 성문을 향했다. 쾅! 콰직! 소리 한번 다양하다. 하여간 피와 살, 뇌수로 범벅이 된 성문은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가며 열심히 틀어막고 있는 병사들의 노고 덕분에.

‘이런 것은 들어본 적도 없다.’

크고 작은 짐승, 괴물들이 성문을 향해 육탄돌격을 이어가고 있다. 대부분 한번, 조금 더 튼튼하거나 속도가 느린 놈들은 두세 번 성문에 들이받고 휘청거리며 쓰러지기를 반복한다. 머리가 깨지고, 몸이 으스러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시어문드는 그 무지막지한 광경을 보며 성문이 뚫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는 저 눈 뒤집힌 괴물들의 광기에 몸을 떨었다. 이런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저것을 뭐라 불러야 할까? 광기?

“장군! 이러다가는 성문이 뚫릴지도 모릅니다!”

“난 장군이 아니네.”

시어문드는 다급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젊은 장교의 실수를 지적해주고 여전히 끝날 줄도, 줄어들 줄도 모르는 죽음의 물결을 지켜보았다.

성문, 혹은 성벽에 머리를 박고 죽거나 그 전에 화살을 맞고 죽거나. 그도 아니면 다리가 엉켜 쓰러졌다가 뒤따라오던 다른 놈의 발에 치여 죽거나. 어떤 식으로든 죽는다. 그러면서도 앞만 보고 달려든다. 그야말로 죽음의 물결이다.

“보이시오?”

“…….”

“이대로라면 성문이 박살나든, 저 시체 더미가 성벽만큼 높아지든지 할 것 같군. 그렇게 되기 전에 방도를 짜내야 하지 않겠소?”

“수, 술사들을 동원하겠소이다.”

“서둘러야 할 거요.”

오거스트 네베시의 측근이라던 무관이 다급히 명령을 내리는 사이, 시어문드는 시체를 밟고 뛰어오르는 괴물들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턱도 없는 허공을 물어뜯고 있지만, 머지않았다.

도대체 얼마나 몰려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정도면 이 근방의 모든 들짐승은 싹 다 몰려왔다고 봐도 될 정도다.

“장군!”

장군 아니라니까.

시어문드는 한번 말했음에도 여전히 말실수를 남발하는 애송이에게 혀를 차면서도 황급히 몸을 틀었다.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거뭇한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거의 뒤로 넘어가다시피 한 몸을 바로잡으며 일어선 그는 그 검은 형체가 날렵한 매 한 마리였음을 뒤늦게 알아볼 수 있었다.

‘빌어먹을.’

성벽 아래도 문제지만, 위도 문제다. 저 날개 달린 것들이 시도 때도 없이 발톱이며 부리를 들이댔다. 놈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이(성벽 아래 득시글거리는 것들에 비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발톱이나 부리가 아니라 제 몸뚱이를 들이대기도 했다. 지금처럼.

쾅!

주먹만 한 크기의 새가 한 병사의 머리 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병사가 잽싸게 방패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면 머리가 깨졌을 것이다. 실제로, 충분한 순발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다른 병사는 찌그러진 투구와 함께 힘없이 쓰러졌다.

* * *

특별하고 기이한 전투지만, 군터는 이런 식의 전투가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살덩어리들과의 전투 말이다.

그런 것들을 상대하는 건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수가 얼마나 되든 상관없다.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고개를 돌리고 달려드는 짐승 같은(실제로 짐승이지만) 것들의 상대가 뭐 어렵겠나. 머릿수가 좀 차이가 난다지만 그래도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붙는다. 두려움 없이, 명령한 대로 따를 수 있는 군대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전투는 군터의 이론에 부합하지 않았다. 데카람의 군대는 정병보다는 잡병에 가까운 군대였으니까. 병사들도 병사들이지만, 그들을 지휘하는 장교들도 제대로 된 이가 없었다.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데카람의 군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형편없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군터는 그들에게 별 기대 하지 않았다.

그들이 제대로 싸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니라도 상관없다. 죽기 싫으면 알아서들 싸우겠지. 등을 보이고 도망치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저 지저분한 것들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기름을 부어라!”

여기저기서 기름이 쏟아졌다. 끓는 기름은 아니다. 눈이 뒤집힌 짐승과 괴물들이 고통에 발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굳이 번거로움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던져!”

기름을 붓고 불을 지른다. 기름은 시체의 언덕을 타고 흘렀고, 불길은 그 흔적을 따라 빠르게 번졌다. 저 화마가 잠깐이라도 놈들을 멈춰세울 수 있을까? 누군가는 기대했겠지만, 몸에 털 대신 불을 두르고 뛰어오르는 대형 족제비를 본 순간 그 얄팍한 기대를 바로 접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예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지만 어떤 짐승들은 멈칫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군터는 멈칫한 놈들에게 무슨 공통점이라도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딱히 짚이는 부분은 없었다. 어쨌거나 일부라도, 잠깐이라도 멈칫하는 놈들 덕에 시체의 언덕이 높아지는 속도가 조금은 줄어들었다. 연기가 시야를 가리는지, 종종 엉뚱한 쪽으로 빠지는 놈들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긍정적인 흐름은 거기까지였다.

크아아아아-!

처음부터 군터가 예의주시하고 있던 괴물. 걸어다니는 바위 녀석이 쿵쿵 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놈은 중간에 걸리는 짐승과 괴물들을 짓밟거나 튕겨내며 성문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막아! 성문을 지켜!”

놈을 향해 집중 사격이 가해졌다. 술력이 더해진 바람이 놈을 밀치기도 하고, 놈이 달리는 경로의 땅이 갑자기 수렁처럼 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놈은 그 모든 훼방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속도도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놈의 거체와 성문이 충돌했다.

콰앙!

한 번. 부서질 듯 흔들렸으나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 성문 뒤쪽에 몇 겹으로 덧댄 걸쇠와 그것으로도 모자라 수십 명의 병사가 몸으로 버티고 선 덕이었다. 하지만 단 한번의 충돌로 그 중 반 이상이 나가떨어졌다.

크아아아!

거칠게 포효한 괴물이 조금 뒤로 물러나는가 싶더니, 다시 몸을 날렸다.

쾅!

“막아!”

“성문이 뚫리면 끝장이다!”

기름과 화살 등을 나르던 병사들까지 달려들어 삐거덕거리기 시작한 성문을 몸으로 밀었다. 하지만.

쾅! 쾅!

세 번. 네 번.

쾅!

그리고 다섯 번.

콰지직!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불안하게 삐걱대던 성문이 활짝 열리고, 거대한 바위가 쓰러진 병사 몇몇을 그대로 짓뭉개며 구르듯 들이닥쳤다.

“집결하라.”

아래쪽에서 들리는 새된 비명을 뒤로 하고, 군터는 휘하 군졸들을 불러모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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