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53화 (953/1,064)

953화

“뭐라고?”

데카람의 사령관 오거스트 네베시는 수하의 보고를 듣고, 아니 듣기 전부터 눈살부터 찌푸렸다. 얼마 전부터 생긴 습관이었다. 어떤 보고든 듣기 전에 표정부터 구기게 되는 것. 딱히 아랫것들을 압박하기 위해 들인 습관은 아니었다. 그저 좋은 일은 씨가 마르다시피 한 이 시국에 자연스레 몸에 밴 것일 뿐.

또 어떤 빌어먹을 일이 일어난 것일까. 걱정스러우면서도 두렵다. 그런데 지금 들은 보고는 미묘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믿기지 않았다.

“크렘보르의 문장기를 확인했습니다. 조금 찢긴 모양이기는 했습니다만…….”

크렘보르의 문장기를 들었다는 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 깃발이야 그럴듯하게 꾸며서 들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크렘보르 장군? 그가 왔다고? 사실인가?”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저들이 큰소리를 치는 것으로 보아…….”

“확실하지 않다는 말이군.”

말이 길어진다. 저 자신감 없는 표정은 언제 봐도 짜증이 치민다. 직접 묻어준 옛 수하가 다시금 그리워졌다.

‘어쩔 수 없지.’

가병(家兵)들 사이에서나 어깨에 힘주고 다니던 녀석이다. 그런 녀석을 곁에 두고 쓰고 있으니 이 정도 아쉬움은 감내할 수밖에 없다.

“그, 크렘보르 장군이 보냈다고 주장하는 자는 와 있나?”

“예.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들일까요?”

“아니. 내가 나가서 만나겠다.”

반반이다. 설마 그 군터 크렘보르가, 고작해야 수백 정도 되는 병력만 단촐하게 거느리고 여기까지 왔을까 하는 의심. 하지만 그럼에도 저렇게 당당하게 이름을 들먹이고 있다는 데 대한 기대감.

“그대가 크렘보르 장군의 전령인가?”

응접실에 나간 오거스트 네베시는 제대로 무장했지만 어딘지 후줄근해 보이는 무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보통내기는 아니군.’

지금 처음 봤을 뿐이다. 심지어 말 한마디 섞어보지 않았고. 그렇지만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 사람의 분위기. 그리고 눈빛.

확신할 수 있다. 이 자는 군인이다. 그것도 필시 경력이 상당한 군인일 것이다. 관록에서 묻어나는 힘과 여유,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렇습니다. 소관은 시어문드라고 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장군의…….”

“오거스트 네베시다. 데카람의 임시 사령관직을 맡고 있지.”

“임시 사령관…입니까.”

자신을 시어문드라고 소개한 무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임시 사령관이라는 직함에서 느낀 애매한 감정을 고스란히 표정으로 드러냈다. 그 거침없음에 살짝 불쾌해진 오거스트 네베시가 내색하지 않으며 화제를 바꿨다.

“크렘보르 장군은 서부 전선에 가 계신 것으로 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 그러니까, 이 난리가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야.”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크렘보르 장군께서는 다른 모종의 이유로 돌아오신 겁니다.”

“그렇군.”

묻고 싶었지만, 묻지 말라고 모종의 이유를 운운하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 할 것인가. 오거스트 네베시는 반쯤 확신하면서도 해야 할 일을 했다.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곳의 상황이 상황인지라 물을 것은 물어야겠군. 자네가 크렘보르 장군의 전령이라면 그분에게서 받은 것이 있겠지.”

“예. 여기.”

조금 떨어져서 보는데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가죽 겉표지. 그리고 중앙에 찍힌 봉인까지.

‘확실하군.’

기품이 넘치는 서신의 외관과 달리 내용은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이곳에 왔으니 성문을 열고 맞이해주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귀족이 쓴 글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었으나 오히려 그렇기에 더 믿음이 갔다. 판니른의 귀족 중에서 군터 크레보르의 이름과 그의 됨됨이에 대해 풍문으로라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가 없었다. 오거스트 네베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곧장 돌아가 장군께 전하게. 데카람의 임시 사령관 오거스트 네베시가 장군을 반가이 맞이하겠노라고.”

“그 말씀 그대로 전해 올리겠습니다.”

* * *

임시 사령관이라.

군터는 뻣뻣하게 굳은 채 예를 표하는 오거스트 네베시를 보며 그를 가늠했다.

오거스트 네베시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네베시라는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이 부근의 유력 귀족 가문 정도 되겠지.

“이름 높으신 크렘보르 장군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일찍부터 뵐 기회가 있기를 바랐습니다만, 하필이면 이런 안 좋은 시기에 뵙게 되는군요.”

“임시 사령관이라면, 전임자는 어찌 되었나.”

“죽었습니다.”

오거스트 네베시의 낯빛이 좋지 않게 변했다. 앞뒤 다 잘라먹은 화법에 불쾌함을 느껴서는 아니었다. 눈에 순간적으로 두려움의 빛이 스친 것으로 보아 전임자의 죽음을 떠올린 듯했다.

“장군께서도 아실 겁니다. 지금 판니른은 전에 없는 재앙을 맞이했습니다. 그 재앙은 그 어떤 예고도, 전조도 없이 들이닥쳤습니다. 판니른 전역이 휩쓸렸지요.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지금도 죽어가고 있을 테지요.”

“하잘의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몇 번이고 전령을 보냈습니다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습니다. 전령이 하잘에 닿지 못한 것인지, 하잘의 답신이 돌아오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병사들의 사기가 내려가 전령을 차출 하지 못할 정도가 되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짧은 대화를 통해 군터는 두 가지를 알 수 있었다. 하나는 이 재앙이라는 것이 그야말로 판니른 전역을 혹독하게 휩쓸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임시 사령관이라는 자의 통솔력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것.

병사들의 사기가 내려가 전령을 보내지 못했다고? 더 전령을 차출 했다가는 병사들이 반발하기라도 할까 두려워 전령을 보내지 못했다는 말 아닌가. 임시라고는 해도 사령관으로서 데카람의 병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것이네. 병사들이 적절한 휴식을 취하고 나면 바로 떠날 것이야. 그동안 내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제공해주었으면 하는데.”

“물론 그리하겠습니다.”

오거스트 네베시는 기대했던 이상으로 협조적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들 몇 가지를 당부한 군터는 휴식을 이유로 자리를 파하고 시어문드에게서 보고를 들었다. 그가 오거스트 네베시와 회담하는 동안 시어문드는 데카람의 상황을 살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데카람의 사령관은 난리 초기에 전사했다고 합니다. 인근에 출몰한 괴물들을 토벌하러 갔다가 돌아오지 못했다더군요. 그때 사령관과 함께 출전했다가 병력을 수습해 돌아온 이가 현 임시 사령관이라고 합니다. 본래 유력가의 자제이기도 했던 그였기에 사령관의 뒤를 잇는 데는 아무런 잡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은 관심 없다. 상황은 어떻지?”

“아무래도…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재 데카람은 고립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물류의 이동은 끊긴 지 오래고, 인근 성들과 정기적으로 소식을 주고받고는 있는 듯합니다만,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는 말이 돌더군요.”

“버티지 못할 거라고?”

“물자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니, 비축된 군량으로 버틸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현재로서는 토벌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듯하니, 심적으로도 몰리고 있겠지요.”

괴물들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상황이라면 병력을 움직이기 전에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옳다. 마음만 앞서서 병력부터 움직였다가 패하거나, 괴물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더라도 크게 피해를 입는다면 미래가 불투명해질 테니.

하지만 시어문드가 짧은 시간 동안 알아온 바에 따르면, 오거스트 네베시는 군사적인 관점에서 신중을 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움츠러들어 있을 뿐이었다. 병사들은 두려움과 무기력증에 빠져 오늘도 괴물들이 들이닥치지 않기만을 기도하고 있고.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면, 데카람은 괴물들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무너질 겁니다.”

“별수 없는 일이지.”

군터는 이곳의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얻을 정보를 얻고,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나면 망설이지 않고 떠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후에 다시 이곳에 들를 일은 없을 터였다.

“그자는 장군께 손을 내밀려 할 겁니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유능한 자는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바보도 아닌 것 같았으니까요. 자신이 처한 상황 정도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대로는 답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고민과 좌절감만 깊어져 가던 차에 생각지도 못한 방문을 받았으니, 그로서는 이 뜻하지 않은 방문을 어떻게든 기회로 삼아보려 최선을 다할 것이다.

“지체할 시간도 없을뿐더러, 난 용병이 아니다.”

받은 만큼 줘야 하는 것은 세상의 이치지만 이곳에서 받은 것에, 받을 것에 그만한 가치는 없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 무능한 녀석과 어울려줄 생각은 전혀 없기도 했고.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세상사라고 했던가. 데카람에 도착하고 딱 하루가 지났을 때. 군터는 데카람의 성벽 위에 올라가야 했다.

* * *

“저게…뭐지?”

눈이 달렸으니 똑같은 것을 봤을 터. 그러니 그 물음은 정말 몰라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보고 있는 것을 믿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나온 두려움의 표현일 것이다.

한심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나은 편이다.

“오……. 신이시여.”

그러니까…사령관이라는 직함을 달고서, 적을 앞에 두고 신이나 찾는 얼간이보다는 낫다는 이야기다.

군터는 옆에 선 얼간이에게는 신경을 끄고 전방에 집중했다. 마치 인간의 군대처럼 길게 늘어진 적. 하지만 얼핏 보기에만 그런 것이지, 정말 인간의 군대처럼 대열을 맞춘 것은 아니다. 그저 수가 너무 많다 보니 비슷해 보이는 것일 뿐.

하지만 대열이 엉망이라고 해도, 통일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분명 군대였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각기 다른 존재가 우르르 몰려오고 있으니 그것을 달리 뭐라 표현할 수 있겠는가.

들개. 뱀. 곰. 매. 그 밖에 온갖 짐승들. 그리고 짐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뒤틀린 형태의 생명체들.

그 모든 것들이 저마다의 걸음으로 몰려오고 있다. 바로 이곳을 향해서,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나?”

“어, 없었습니다. 집단행동을 하는 괴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그것도 멀쩡한 짐승들까지…….”

멀쩡한 짐승이라. 외관만 멀쩡하면 멀쩡하다는 건가. 저렇게 뭉친 시점에서, 토끼가 늑대의 옆에서 나란히 움직일 때부터 저것은 멀쩡하다고 말할 수 없다.

“창고에 여분의 무기가 있겠지.”

“예? 아, 예.”

“다 풀어라. 무기를 들 수 있는 인원은 전부 무장시켜. 노인이든 여인이든, 전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것들의 수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래봐야 대부분이 짐승들입니다. 놈들이 어찌 성벽을 오를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미 명령했다.”

묵직한 한마디가 오거스트 네베시의 마음에 처형인의 도끼날처럼 떨어져 내렸다. 목이 떨어지는 것 같은 섬뜩함을 느낀 그는 감히 대꾸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군터의 명령을 수행했다. 데카람의 사령관인 자신이 일방적인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오거스트 네베시가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시어문드가 군터의 빈 옆자리에 다가와 섰다.

“진귀한 광경이로군요.”

“좋지 않다.”

“걸리시는 점이라도?”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저 무질서한 군대를 움직이는 거대한 의지. 성벽에 올랐을 때부터 군터는 그 보이지 않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짐승이나, 괴물들 정도야 성벽도 있으니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것들을 움직인 힘. 그것이 어떤 식으로 영향력을 발휘할지 모른다. 군터의 직감은 그 힘을 주의해야 한다고 연신 속삭였다.

카우우우-!

난잡하게 몰려오던 짐승과 괴물들 사이에서 커다란 포효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두 날개를 퍼덕이며 낮게 날던 뱀과 곰이 옆으로 비켜섰다.

“…저놈이 우두머리일까요?”

“아니.”

그것은 옆으로 비켜선 커다란 곰보다 족히 두 배. 덩치로는 서너 배는 될 법한, 거대하다는 말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괴물이었다. 돌이 생명을 얻고, 머리와 사지를 갖게 되어 두 발로 선다면 저런 형태이지 않을까 싶은 외관의.

“그래도 선봉장 정도는 되겠군.”

무척이나 단단해 보이는 괴물이 내뿜는 투기가 성벽 위에까지 닿는 듯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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