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2화
병사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하루의 휴식을 만끽했다. 하루 눈을 붙인다고 해서 축축 늘어지던 몸에 갑자기 활기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걸음걸이에 확실히 힘이 실리긴 했다.
“장군.”
어제 한바탕 피를 빼서인지 중년 관리의 안색은 거의 시체처럼 보일 정도로 창백했다. 그는 제대로 서 있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몸으로 그래도 배웅을 하겠다고 나섰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의지 하나만큼은 칭찬해줄 만했다.
그는 시어문드에게서 곧 떠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어떻게든 만류하려 들었다. 동쪽의 상황은 이곳보다 더 안 좋다고 들었으며, 더 시간이 흐른 지금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더욱 알 수가 없다는 것. 그러니 차라리 이곳에서 잠시라도 머물면서 소식을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냐며 시어문드를 설득하려 했다.
“이미 정해진 일이네.”
하지만 그의 노력은 헛수고였다. 군터가 아니라 시어문드를 물고 늘어진 것은 현명한 선택이라 할 만했지만, 그에게는 결정을 내리는 건 시어문드가 아니었다. 물론 그가 바란 것은 시어문드가 자신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겠지만, 그 역시 안타깝게도 시어문드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무슨 말을 한다 하더라도 군터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루의 휴식 정도를 제안하는 것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무운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중년 관리는 눈치가 빨랐다. 안 되겠다고 판단이 서자마자 태도를 바꿔 어떻게든 좋은 인상을 남기려 노력했다. 어쩌면 후속 병력이 머지않아 당도하리라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한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성주의 집무실을 뒤져 인근 지형을 상세히 묘사한 지도까지 구해주었다.
그리고 오늘. 군터는 그의 헌신적인 노고에 한 마디도 해주지 않은 채 고삐를 쥐었다. 오직 시어문드만이 쓴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목례를 남겼다.
낙담한 그가 고개를 떨어뜨리려던 그때. 흘러가듯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식으로 후임자가 정해질 때까지, 네가 이 성의 성주다.”
“예, 옛!”
다 쉬어버린 목에서 어찌 그런 우렁찬 목소리가 나올 수 있었는지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 자신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대신해서 답해준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 무심한 목소리를 듣자 진이 다 빠졌던 몸에 힘이 돌아오는 듯했다. 오랜 가뭄에 시달린 땅처럼 메말라 있던 입도 어느새 양옆으로 길게 올라가 있었다.
* * *
“임시 성주 자리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입니다.”
시어문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군터는 답하지 않았다. 딱히 상을 준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저 성을 비울 것이 아니라면 책임자가 필요하고, 그나마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 자에게 맡겼을 뿐이다. 그걸 혼자서 착각하고 받아들였다면…뭐, 어쩌겠는가.
“어쨌거나, 적어도 인근의 마을들은 다 휩쓸렸다고 봐야겠습니다.”
“그렇겠지.”
지도는 군터 일행도 이미 몇 장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지도는 판니른 전역을 담은 만큼 각 지역을 그리 상세하게 나타내지는 않았다. 특히 미타돈 같은, 이번에 들르기 전에는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않았던 자그마한 성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그러니 이 인근에 무슨 마을이 있는지, 개천이 있는지 없는지 따위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타돈의 중년 관리, 이제는 임시 성주가 된 그가 준 지도는 제법 도움이 됐다.
“윽!”
지도에 표시된 작은 마을에 가까워질 즈음. 코끝을 찌르는 악취에 몇몇 코가 예민한 이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당연하지만, 군터는 이미 그들보다 먼저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있었다.
“시체입니다.”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널브러진 시체들이 자주 보였다. 하나같이 부패가 꽤 진행되어 있었다. 시체야 숱하게 봐 왔고, 그중에는 처참하거나 끔찍하다고 할 만한 것들도 많았기에 군터와 휘하 군졸들에게 시체 자체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체들이 그간 봐온 것들과 다른 점은, 기이할 정도로 지독한 악취가 풍긴다는 점이었다. 멀리서부터 참기 힘들 정도였는데,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니 후각이 마비되고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괴로운 것은 군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능력들처럼 인내심도 평범한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그로서도 이 지독한 악취는 상당히 불쾌했다.
“돌아가지.”
왔던 길을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길을 벗어나 이 지독한 악취를 피해가자는 것이었다. 군터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어문드와 병사들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대체 어떻게 죽어야, 죽은 다음에 무슨 일을 겪어야 저렇게 지독한 악취를 풍길 수 있는 것인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끔찍하기만 할 뿐.
한편, 군터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악취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단지 코로 맡는 냄새만으로 이 정도의 불쾌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의식하지 못한 사이 어떤 초월적인 작용을 경험한 것은 아닐까? 군터는 자신이 단순한 악취 때문에 그런 심정적인 동요를 겪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스스로에 대한 과신이 아니라 이성적인 사고의 결과였다.
‘모든 것이 정상적이지 않아.’
단지 구름이 껴서 그렇다기에는 너무 우중충한 하늘과 습한 것 같으면서도 서늘한 공기. 하다못해 지금 지나고 있는 땅마저도.
“음?”
전투가 벌어질 때나 행군할 때나, 군터는 늘 선두에서 군을 이끌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심각한 악취로 가득한 마을을 피해 길을 재촉하던 그는 어렴풋하게 들리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뭔가 갈라지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 그 소리는 빠르게 빈번해지고, 커졌다. 그리고 그 소리가 시어문드의 귀에까지 희미하게 들릴 정도가 되었을 때, 군터는 저 멀리 땅과 하늘을 이은 선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저건…….”
처음에는 선인 것 같았으나, 조금 더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란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선인듯했던 그것은 불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다만 거리가 워낙 멀었기에 선처럼 보였을 뿐.
다만, 그것이 땅과 하늘을 이은 것은 맞았다. 그것은 그만큼 거대했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 형체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그것이 무엇인지 떠올리기 위해, 군터는 한동안 눈에 힘을 주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한층 더 커진 소리가 뚜렷하게 귓가를 때릴 무렵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폭풍이다!”
‘어째서’라는 의문은 품지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다. 존재할 리 없는 곳에 나타난 폭풍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고, 저것에 휩쓸리면 어찌 될지는 무자비한 바람 앞에서 형편없이 갈려 나가고 있는 초목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른 고목들이 있던 언덕! 거기서 바람을 피해야 합니다!”
폭풍을 피해 달아날 수 있을까. 시어문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다. 저 거대한 폭풍. 거리가 멀어 느릿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린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따라잡힐 것이 분명했다. 말은 결국 지칠 수밖에 없으니까.
“그걸로 되겠나.”
이 상황에서도 목소리가 평소와 다름이 없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시어문드는 순간 감탄했고, 당황했다.
“달리 수가 없습니다. 이 많은 인원이 어디에 숨을 수 있겠습니까.”
군터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머리를 돌렸다.
* * *
콰릉!
천둥소리가 들렸다. 전력으로 달리는 말 위에서 병사들의 안색이 매 순간 더 창백해지는 가운데, 군터는 저 폭풍이 결코 일반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이런 곳에서 저런 대형 폭풍이 발생한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보다 저 폭풍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기운. 거칠게 휘몰아치는 듯하나 분명히 한데 응어리진 기운이 의심을 확신으로 굳혀주었다.
확실하다. 저 폭풍은 절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위적인 것인가? 글쎄. 그건 또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장군! 곧 언덕입니다!”
“땅을 파라! 좁아도 되니 최대한 깊게!”
“옛!”
말에서 뛰어내린 병사들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땅을 파는 사이, 군터는 근처에 적당한 크기의 바위를 물색했다. 그리고 개중 가장 커 보이는 바위에 다가가 그 주변의 땅을 창으로 찍어 팠다.
“곧 들이닥칩니다!”
병사들의 목소리가 절박해질 때쯤, 바위 주변의 땅을 파헤치던 군터가 창을 회수하고 바위에 양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크윽!”
우득! 하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모든 힘을 짜내려 하자 몸이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마치 고만고만한 나무 막대기로 큼직한 쇳덩이를 들어 올리는 것과 같았다. 쇳덩이를 들어 올리기도 전에 부하가 걸린 나무 막대기가 갈라지기 시작하듯, 군터의 몸 또한 한계 앞에서 무너지려 했다.
그렇게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흔들리려 할 때. 육신 깊은 곳에 스며들어 죽은 듯 자리하고 있던 영혼에서 실타래 같은 힘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힘은 붕괴하던 피와 살, 뼈에 자연스레 깃들었다.
“허억!”
어디선가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켜보던 병사가 기겁하여 자신도 모르게 낸 소리였다. 하지만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누구라도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아니 그 이상으로 큰 바위를 번쩍 들어 올리는 것을 목격한다면 기함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
“비켜라-!”
군터는 번쩍 들어 올린 바위를 병사들이 열심히 파 놓은 구덩이 앞에 던졌다. 잔뜩 쌓여있던 흙더미가 바위에 깔리며 사방으로 튀었다.
“장군! 하나로는 부족합니다!”
“알고 있다!”
군터가 던진 바위는 병사 십여 명의 몸을 가릴 수 있을 정도로 컸으나 그 하나로는 저 거대한 바람을 다 막을 수 없었다. 군터도 당연히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는 곧 처음 던진 것보다는 작아도 큰 축에 속하는 바위 여러 개를 빠르게 뽑아 처음 던진 바위 옆에 내려놓았다. 처음 바위를 뽑을 때와 달리, 두 번째부터는 그 움직임이 훨씬 신속했다.
“됐다! 모두 모여!”
수백 명이 모여 판다고 팠지만 협소한 크기의 구덩이였다. 하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부대끼며 들어갈 수는 있었고, 그들은 곧 바위의 그림자 속에 숨은 채 점점 가까워지는 굉음을 기다렸다.
“말들이 뛰쳐나가지 못하도록 해! 온다!”
비명 같은 외침은 폭풍의 포효에 순식간에 묻혀버렸다. 그리고.
콰드드!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 * *
조각난 나뭇가지와 풀, 흙더미로 덮여있던 땅이 크게 들썩였다.
“크헉! 켁켁!”
숨을 참고 있던 병사들이 입안에 들어간 먼지와 풀 등을 토하며 흙더미를 헤집고 나왔다.
“후우!”
“어떻게든 살았구만…….”
근래에 겪었던, 어쩌면 유령들과 드잡이질을 했던 때보다도 더 아찔한 순간이었다. 세상을 통째로 뒤엎어버릴 것 같았던 굉음과 진동 속에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어디에 있는지, 실재하는지도 모를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장군.”
평소 신앙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병사들이 신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는 사이, 시어문드는 묵묵히 갑옷의 관절부를 털고 있던 군터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걱정했던 것치고는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지.”
병사들이 들으면 그게 무슨 소리냐고 생각했을 테지만, 실제로 그랬다. 그들을 지나쳐간 폭풍은 그 덩치에 비해 그리 위력적이지 않았다. 요란하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바람막이용으로 세운 바위들이 이리저리 기울긴 했어도 어쨌거나 그럭저럭 건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기이하군요.”
“새삼스럽군.”
“제가 알던 판니른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괴물들이 출몰하는 것이야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건…….”
폭풍이 휩쓸고 간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했다. 비라도 내릴 것 같이 구름이 잔뜩 끼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는다. 판니른에 돌아온 후로 계속 그랬다. 언제나 어둡고 탁한 그 상태에서 변하지 않는다. 그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마음에도 절로 그늘이 진다.
“혹시, 방금의 폭풍도 판니른에 닥친 변고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아마도.”
하아. 시어문드가 길게 탄식했다.
“뭔가, 대비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미타돈에서도 그랬지만, 병사들은 이런 식의 싸움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소관 역시 그렇고 말입니다.”
“대비라고 한들, 무엇을 할 수 있겠나.”
“각지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디만, 그래도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곳은 어떻게든 버티고 있을 겁니다. 그곳에 들를 수 있다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보든, 실질적인 도움이 될 만한 다른 무언가든 말입니다.”
물론 미타돈처럼 엉망이 되어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시어문드는 그럴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단 접어두었다. 뭐가 됐든 이대로 아무 대비도 없이 여정을 이어갈 수는 없다. 눈에 보이는 괴물들이야 어떻게든 물리치면 된다지만, 괴물들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방금 확인하지 않았나.
“그래. 그리하지.”
고민하는 것 같던 군터가 결국 동의하자, 시어문드는 미타돈의 임시 성주가 준 지도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 근처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시는 데카람입니다. 가장 크다고 해도 간신히 소도시를 벗어난 수준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만, 유사시에는 인근의 병력이 모이는 1차 집결지입니다. 그곳이라면…….”
“얼마나 걸리지?”
“서두르면 이틀 안에 어떻게든 도착할 수 있을 듯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다시 말해 밤낮으로 말을 달린다면 하루 만에 도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에,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는 최대한 사방을 경계하며 움직여야 하니 이동속도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것을 고려해서 이틀.
“…….”
이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그러나 서두르기만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은 군터도 알았다. 시어문드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