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51화 (951/1,064)

951화

형편없이 우그러진 철퇴를 황망한 눈길로 바라보던 병사들은 철퇴를 던져버린 군터가 창으로 기둥을 찌르는 것을 보며 다시 한번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들도 ‘장군의 창’이 뭔지 모를 귀물로 만들어져 엄청나게 튼튼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방금 철퇴가 저 지경으로 엉망이 된 것을 봤는데 저기에 대고 창을 찌르려 하니 순간적으로 황당한 마음이 들 수밖에.

그런데 당연히 튕겨 나갈 것이라 예상했던 창이 저 단단한 기둥을 무슨 짚더미를 파고들듯 쑥 하고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은 주저앉았다.

“…어라?”

왜 자신들이 주저앉았는지 고민해보기도 전에, 그들은 눈에서 무언가 흐른다는 것을 깨닫고 손으로 훔쳤다.

시커먼 물. 아니, 조금 붉은 것도 같다. 이게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그들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들보다 몇 발자국 더 떨어져 있던 중년 관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눈뿐만 아니라 코에서도 검붉은 물을 제법 굵직하게 흘려대고 있었다.

그들을 힐끗 본 군터가 기둥에서 빠져나온 어둠을 못마땅하게 노려보았다.

[끝까지 민폐로군.]

그에 반응하듯, 실타래같이 계속해서 기둥으로부터 빠져나오던 어둠이 꿈틀거렸다.

[미안하군. 하지만 아직…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 정말 풀려난 건가? 그 감옥에서?]

조금 전 군터와 이야기를 나눴던 사내만이 아니라, 다양한 소리가 섞여 들렸다. 그래서인지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각기 다른 소리를 쏟아내는 그들이 모두 기뻐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아아아!]

그들은 환희에 떨었다. 울부짖는 것 같기도 했다. 마치 짐승처럼. 그들에게는 영겁 같았을 긴 세월 동안 이지가 무너졌기 때문일까? 그들의 반응은 본능적이었고, 그래서 더 폭발적이었다.

그들이 봉인, 혹은 속박에서 풀려남과 동시에 채 형체조차 갖추지 못한 그들의 영혼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이걸로…끝인가? 정말?]

저들 중 유일하게, 그나마 이성을 갖고 있던 사내가 도무지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는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는 사이, 그의 영혼 역시 색을 잃어갔다.

“…….”

군터는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로서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볼 때마다 생각에 잠기게 되는 광경이기도 했다. 빗물이 땅에 스며들어 사라지듯, 생을 마감한 영혼이 어떠한 물줄기에 휩쓸려 사라지듯이 소멸해가는 과정. 군터는 이것이 세상의 규칙이라고 스스로 이해했다.

꽤 오랫동안 강제로 묶여있었으나, 이제 그 구속을 풀었으니 저들도 마땅히 흘러가야 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대로…끝이라고?]

[그래. 끝이다.]

멍하니 같은 소리만 반복해서 내던 사내는 군터가 대꾸하자 그를 바라보았다. 군터는 그의 시선, 아니 그의 마음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기쁘지 않은가?]

[기쁘다. 말할 수 없이 기쁘지. 그런데…그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허망하군.]

허망하다…라. 군터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한 가지 염원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이 빌어먹을 저주에서 벗어나 복수하고 말리라는 염원. 그 복수심이 있었기에 나는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그런데 이렇게 끝이 날 줄은 몰랐어. 그 긴 세월도, 내 염원도 결국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인가?]

점차 흐려지는 영혼은 그래도 여전히 강렬하게 빛났다. 복수심 때문이든 뭐든, 그의 강한 정신은 영혼의 소멸을 늦추고 있었다. 그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테지만, 그 스스로 이렇게 끝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복수를 원하나?]

[당연히 원하지. 저 안에 갇혀있던 모든 순간. 정말 단 한 순간도 복수를 떠올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내가, 우리가 받은 고통의 반. 아니, 열에 하나라도 놈에게 돌려줄 수 있다면 무엇이든 바치겠다고 신께 맹세했었지.]

이만하면 충분하다.

[그렇다면…….]

군터가 손을 뻗었다.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닿지 않는 것에 손을 내밀었다.

[원하는 것이 복수라면 나를 따라라.]

[그대는 카라누르의 무장이 아닌가?]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나?]

실체 없는 눈길이 군터를 응시했다. 마음과 마음이 닿는 소통에서 얄팍한 거짓은 통하지 않는다. 그것을 알면서도 바로 답하지 못한 것은 그만큼 망설임이 컸기 때문이다. 복수에 대한 갈망과 마침내 맞이하게 된 안식에서의 갈등.

그러나 결국 그가 택할 답은 정해져 있었다. 군터도 그것을 알기에 손을 내밀었던 것이고.

[복수를 이루고 나면 나를 놓아주겠나?]

사내는 군터와 서로의 본질을 마주했다. 그렇기에 군터가 평범한 존재가 아니며, 그가 영혼에 섬뜩한 죽음과 거기에 물든 또 다른 영혼들을 품고 있음도 보았다. 그러니 자신도 감옥을 나와 또 다른 감옥에 갇히는 것이 아닌지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군터에게서 거짓은 보지 못했음에도,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만큼 그는 오랫동안 절망에 고통받아왔다.

[그러지.]

거짓이 느껴지지 않는 즉답에 사내는 안도했다.

[그쪽도 마찬가지.]

[음?]

온통 군터와 그의 제안에만 몰두해있던 사내는 그제야 자신의 뒤편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영혼들을 감지했다.

[자, 자네들…….]

이성을 잃어 말하지 못한다. 이제 곧 완전히 사라질 것처럼 희미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따랐던 왕자에 대한 충심과 그들을 가둬 고통받게 한 원수에 대한 증오는 그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오직 그것만이, 왕자와 함께 묻혔던 결사대가 여전히 그의 뒤를 지키고 있는 이유였다.

* * *

군터는 시어문드를 비롯한 수하들에게 자신이 미타돈의 유령기수들을 처리했음을 알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속박되어 있던 원령들을 풀어주었다고만 이야기했다. 어차피 자세하게 말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고, 제대로 이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이군요.”

시어문드가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병사들이 많이 지쳤습니다. 동료의 몸에 칼을 박아넣어야 했던 녀석들은 특히 더했지요. 이제야 좀 쉴 수 있겠습니다.”

“행군할 수 없을 정도인가?”

“해가 지기 전까지 유령들 문제를 처리하지 못했다면 분명 쓰러지는 녀석들이 나왔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군터는 문득, 화제와는 조금 동떨어진 생각을 했다. 그렇게 훈련시키고 관리해온 병사들조차 참으로 나약하다는 것. 고작해야 한 번의 전투를 치렀을 뿐인데 그들은 이렇게나 흔들렸다. 육체적으로든 심적으로든 말이다. 그들은 너무나 약하다. 군터는 그 점이 애석하고, 또 성가셨다. 자신의 기준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그의 마음은 그런 이성적인 판단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바로 옆에 그와 대비되는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말은 먹이를 줘야 하고, 재워야 하며, 상처 입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기어이 상처를 입는다면 치료까지 해줘야 한다.

반면에 영혼만 남은 채 죽은 말, 즉 사령마는 어떠한가. 생명과 함께 두려움도 잃어버린 사령마는 그런 성가신 점이 일절 없다.

말만 해도 이럴진대, 병사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두려움도, 피로도 느끼지 못하는 병사라면 그 자체로…….

‘아니.’

점점 뻗어 나가려는 사고의 가지를 잘랐다. 이 이상 파고들었다가는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적어도 아직은.

“병사들을 쉬게 해라. 하루 정도면 되겠나?”

“예. 충분합니다.”

충분하지 않더라도 충분해야 한다. 그런 시어문드의 속이 뻔히 들여다보였다. 군터는 손짓으로 수하들을 물리고 적막한 성주의 집무실에 홀로 남았다.

[인재로군. 좋은 군인이야. 상관의 마음과 수하들의 사정을 동시에 헤아릴 줄 아는 이는 흔치 않지.]

먼지가 쌓인 책장의 그림자 속에서 흐릿한 형체가 일어났다. 형체라고 해 봐야 기감이 뛰어난 이가 아니라면 볼 수도 없는 모습이기는 했지만.

[좋아 보이는군.]

[최대한 빠르게 회복 중이네. 아니, 그보다는…노력 중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군. 그래. 기억을 떠올리려고 노력 중이라네. 여러 가지를 말이지.]

지금 사내, 왕자의 모습은 봉인 속 허상의 세계에서 마주했을 때보다 훨씬 뚜렷했다. 그만큼 자신의 본래 모습을 기억해내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의 말솜씨가 매끄러워진 것도 그 영향일 테고.

[내가 널 어떻게 불러야 하지?]

[이가로프. 그래. 그거면 될 것 같군. 그렇게 불러주시게.]

대다수의 문화권에서 존귀한 신분은 자신들의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해 되도록 긴 이름을 쓴다. 사내, 이가로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긴 이름이 이제는 의미가 없으며, 적절하지도 않다고 생각했을 테지.

이가로프의 상태는 평범한 인간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좋았다. 하지만 그의 수하들은 아직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조금만 정신을 집중하니 영혼 감옥 속에 머물고 있는 그들의 존재가, 아직까지도 제 색을 찾지 못한 그들의 영혼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이 정도로도 써먹을 수는 있을 테지.’

되도록 이가로프처럼 빠르게 회복했으면 좋겠지만, 설령 그렇지 못하다 해도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본능처럼 이가로프를 따른 자들이다. 이가로프를 쓸 수 있다면 그들 역시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마저도 정 안되면 효율은 떨어질지언정 강제로 써먹을 수도 있고.

‘괜찮은 전력이다.’

그들은 기존에 거두고 있던 고대인들의 영혼과는 달랐다. 잠들어있던 시간만을 놓고 본다면 고대인들이 더 길 테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되었느냐가 아니라 어떤 일을 겪었느냐다. 그저 잠들어있기만 한 고대인들의 영혼과 매 순간 절망하고 고통받아온 이가로프와 그의 수하들의 영혼은 큰 차이가 있었다. 야산에 박혀 있는 철광석과 수백 번의 담금질을 거친 강철의 차이라고 할까.

확연하게 느껴지는 영혼의 무게감. 이 무게감이 실제 전투에서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아간투스베록. 지금도 그의 존재가 느껴지나?]

[…느껴지지 않는군. 그의 구속이 끊어졌고, 또 지금은 그대에게 속해있기 때문이겠지.]

평온하던 영혼이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일렁이며, 잔뜩 억눌린 분노가 느껴졌다.

[분노를 낭비하지 마라. 그의 앞에 서게 되면 그때 터뜨려도 늦지 않아.]

[걱정 마시게. 내 분노는 영원히 타오르는 불의 산보다 뜨거우니, 원한을 갚기 전까지 조금도 식을 일은 없을 것이야.]

[기대하지.]

군터는 이가로프의 영혼을 회수했다. 이가로프의 영혼은 이제 그에게 속해있기에, 언제든 그가 원하면 영혼 감옥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다른 일반적인 영혼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해도, 이런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새삼 영혼 감옥의 힘이 쓸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이것을 얻었을 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이상이었다. 감옥을 다루는 데 익숙해져서 그렇게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감옥의 힘이 더 커지고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영혼 감옥은 명백히 법구의 수준을 넘어서는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법보에 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그것들이 조금만 더 온전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고대인들의 영혼은 이가로프처럼 온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정보를 얻는다는 건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군터는 영혼 감옥이 고대인들의 보물이었으리라 짐작하며, 어쩌면 그 힘이 아직 더 남아있을지 모른다고 여겼다. 얄팍한 기대감의 발로였을지도 모르지만.

‘이 또한 감정이겠지.’

기대감. 그런 속물 같은 마음도 감정이라면 감정일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과 얽히는 일에는 그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그에 대해, 언젠가 줄카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 연민을 느낄 테지만, 죽어가는 개미를 보면서까지 연민을 느끼지는 않는다고.

비약이라며 무시했다. 하지만 내심은, 그의 말에 설득되고 있었다.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강하게 부정했을 뿐.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