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0화
적어도 세 사람이 둘러싸야 다 감쌀 수 있을 만큼 두꺼운 기둥이었다. 그렇기에 군터도 단번에 부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철퇴가 기둥에 부딪히는 순간, 겨우 그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리만 크게 났을 뿐 실질적으로는 거의 부수지 못했다는 것을. 튕겨 나온 철퇴는 잔뜩 우그러졌으나 기둥은 표면만 금이 가고 벗겨졌을 뿐이었다. 군터는 단 한 번에 제 기능을 못하게 된 철퇴를 가볍게 내던지고서 속살을 드러낸 기둥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세월의 때를 탔어도 제법 하얗던 표면과 달리 기둥의 속은 거뭇했다. 뚜렷한 색상의 차이만 봐도 표면과 속의 재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금이 가고 벗겨진 것은 하얀 표면뿐이었다. 거뭇한 안쪽은 실금 하나 가지 않았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신비의 힘이 아니더라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군터는 거뭇한 안쪽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가 곧 기운을 움직여 살피자, 기다렸다는 듯 검은 기둥 속에서 막대한 힘과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흘러나왔다.
[아! 이 얼마만인가!]
분명 여전히 같은 장소다. 그런데 보이는 것은 이전과 전혀 달랐다. 음침한 예배당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고풍스러우면서도 이색적인 전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군터는 어느새 자신이 그 전당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는 데 놀라지 않았다. 그의 초월적인 기감, 그리고 직감은 이 환상의 본질을 꿰뚫었다.
[강한 만큼 현명한 자로군. 하루도 되지 않아 저주의 근원을 알아차리다니.]
처음 보는 사내. 짧게 기른 수염에 호리호리한 체형. 그리고 은연중 풍기는 강인하면서도 귀족적인 분위기. 누구라도 그를 본다면 그가 범상치 않은 신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어떻게든 숨으려 할 줄 알았는데, 뜻밖이군. 나로서는 잘 됐지만.]
비어있던 손이 창을 쥐었다. 이곳은 허상이자 심상. 아마도 영혼과 의지만이 작용하는 세계. 그릇이 허락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화가 난 모양이군. 알아보았는가?]
[그 추한 얼굴을 못 알아볼 리 없지.]
얄팍한 눈속임 뒤에 숨은 본모습. 물론 처음부터 한눈에 알아보았다. 살점 하나 없는 백골. 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들끓는 구더기들. 몸을 갑옷처럼 감산 사슬까지.
[추하다……. 그래. 그렇지.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래도 꽤 속상하군. 원해서 이런 꼴이 된 것은 아닌데 말이야.]
[이번에는 숨지도, 도망가지도 못할 거다.]
군터는 창을 들어 사내, 아니 유령을 가리켰다. 그 작은 행동만으로도 군터의 전의가 유령을 거세게 옭아맸다.
유령은 저항하지 못했다. 아니, 저항하지 않았다.
[무슨 수작이지?]
[그대와 싸울 이유도, 도망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음. 도망치지 못한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군.]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살점 하나 없는 자가 입술을 움직일 수는 없을 테니. 하지만 보이지 않아도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겠지.]
[아마도.]
[망국의 왕자라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고, 죽은 후의 자유까지도 빼앗겨버린 가련한 사내지.]
흔히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 말하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 답답한 기둥 속에 갇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오랜 시간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두 세대, 어쩌면 그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먼저 사과부터 해야겠지. 그대가 내게 적의를 보이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네. 이런 말이 변명거리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본의가 아니었네.]
[본의가 아니었다?]
궁색한 변명 따위는 집어치우라고 대꾸해야 하리라. 하지만 군터는 사내의 변명 아닌 변명이, 어쩌면 정말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의구심을 품었다. 사내의 정신과 영혼은 그만큼 피폐했다. 저런 꼴을 하고서도 정상적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태양이 떠 있을 때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네. 하지만 어둠이 찾아오면…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지.]
비탄.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는 없을 것이다. 군터는 금방이라도 재가 되어 주저앉아버릴 것 같은 그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창을 내렸다. 그가 손을 허리 아래로 내린 순간, 손에 쥐여 있던 창은 나타났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맙군. 미치광이의 헛소리로 들렸을 텐데.]
[당신의 말보다, 모습도 드러내지 못하는 나머지가 설득력에 힘을 실어주는군.]
[…그들을 느낄 수 있나?]
그를 구속한 쇠사슬이 철그렁 소리를 내는 듯했다. 물론 그럴 리 없지만, 그만큼 그가 감정적으로 동요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공간 전체가 일렁일 정도였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그들은 모습을 보일 수 없네. 내 자랑 같지만, 이렇게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신력이 필요하거든. 하지만 그들의 정신은…이미 오래전에 흐려졌지. 끝없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사내의 형태가 순간 흐릿해졌다. 감정이 요동치면서 덩달아 정신까지 흔들린 것이다. 군터는 사라지지 않으려 애쓰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잘난 듯이 말했지만, 나 역시 매 순간 약해지고 있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어. 얼마나 오래 지난 거지? 백 년? 이백 년? 오백 년? 카라누르는 아직 존재하나? 황제는? 그의 사냥개들은?]
[그들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군.]
[그야 물론이지. 잔혹한 정복자. 아니, 도살자. 그자가 돌아왔어. 나는 느낄 수 있네. 자네도 알고 있나?]
사내는 횡설수설했다. 흐릿한 형태를 유지하는 것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인 듯했다. 그의 말은 점점 어눌해졌고, 주정뱅이처럼 했던 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어떤 부분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희미했고, 또 어떤 부분은 거의 고함을 지르다시피 했다. 군터는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라고? 당신들을 가둬둔 자 말인가?]
[물론이지. 그자가 아니면 누구겠나. 우리를 가둔 저주가, 그자의 악의에 호응하여 더 강해지고 있어. 숨을 쉴 수가 없네. 그가 오고 있는가? 우리를 조롱하기 위해서 오는 것인가? 세상에 다시 없을 만큼 잔인한 자가 아닌가!]
절망. 공포. 분노. 그리고 다시 절망.
미쳐가는 그를 보고 있자니 남아있던 일말의 전의마저 사그라졌다.
[그자가 누구지? 당신들을 가둔 자.]
[거인. 잔혹하고 오만한 거인. 그가 우리를 가뒀다. 그는 죽음을 각오한 우리를 비웃으며, 우리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에 영원토록 시달리리라 말했지. 우리는 믿지 않았지만, 결국 그자의 말대로 됐어. 아아! 우리는…….]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다 들었다. 미친 자의 넋두리를 더 들어줄 생각은 없었던 군터는 즉시 허상의 공간에서 빠져 나왔다. 그가 그러기로 마음먹자마자 그는 다시 어두컴컴한 예배당에, 돌가루가 흩날리는 기둥 앞에 서 있었다.
‘거인이라.’
이름은 듣지 않았지만,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국에서 이만한 일을 할 수 있는 자. 그중에서 거인이라 불리는 자. 그런 자는 그가 알기로 하나뿐이다.
아간투스베록.
거인, 혹은 거인왕이라 불리는 제국의 군주. 풍문에 의하면 그는 고대 거인족의 혈통이라고 한다. 헛소리겠지만, 또 모를 일이다. 비범한 혈통은 비범한 능력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설득력 있고 간단한 이유니까. 정말로 그가 거인의 피를 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자인가.’
오랫동안 고통받은 원혼이 미쳐서 헛소리를 주절댄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군터는 그의 절규가 모두 사실일 것만 같았다. 아간투스베록이 그들을 가둬두고 고통받게 했다면, 그가 다시 이 땅에 온 것만으로도 봉인이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난리를 일으킨 것도 그자라는 뜻이군.’
이곳에 오기 전 떠올렸던 이름 중에 그자의 이름도 있었다. 후 순위였기는 하지만.
콰직!
검은 창이 거뭇한 기둥을 찔렀다. 육중한 철퇴도 깨지 못한 기둥을, 비교적 얇은 창날은 거짓말처럼 쉽게 파고들었다.
* * *
[음?]
굳어 돌이 된 것처럼 한참 동안 미동도 없던 그가 움찔거렸다. 동시에 감겨있던 눈이 느릿하게 뜨였다.
아주 멀리서 그와 연결된 끈 하나가 끊겼다. 그게 무엇인지 떠올리기 위해서, 그는 묻어두었던 기억을 잠시 더듬어야 했다.
잠시 후. 마침내 그는 떠올렸다. 꽤나 오래된 기억.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제 놈들 잘난 맛에 취해 건방을 떨었었다. 하여 손수 놈들에게 진짜 고통이 뭔지를 알려주었다.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유쾌한 순간이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믿었던 놈들에게 진짜 고통이, 절망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었을 때. 그때 놈들이 질렀던 비명은 고통의 절규이면서 또한 처음으로 무지에서 벗어난 자들이 내지르는 환호였다.
[누구지?]
제법 신경 쓴 봉인이었다. 그것을 깨뜨렸다면, 혹은 자신과 연결된 선을 끊었다면 그 일을 한 자는 제법 솜씨가 뛰어난 자여야 할 터. 그런데 이곳에 그런 자가 있었던가? 하긴, 있을 수도 있겠지. 어디에나, 언제나 인물은 있는 법이니.
당시에는 제법 진지했다지만, 이제는 떠올리기 전까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추억일 뿐이다. 그는 흐릿한 미소로 오래된 즐거움을 털어냈다. 지금 그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긋지긋하군.]
최대한 손을 쓰고 넘어왔다. 그런데도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겁먹은 대지가 시시각각 그를 추궁하고 있었다. 아니, 대지뿐인가. 잔뜩 움츠러든 하늘. 흘러가는 바람까지도 그를 적대시하며 억압했다. 이 자그마한 세상이 품은 적의와 두려움이 무형의 압력이 되어 그를 속박하려 들었다.
[그래 봐야 소용없다.]
이미 내친걸음이다. 어설프게 하고 말 것이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쿵!
마침내 일어선 그가 한 걸음을 내딛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축이 뒤흔들렸다. 물론 영적인 세계에서의 흔들림일 뿐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존재에게는 실재와 허상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러한 구분의 대척점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내가 이곳에 온 이상, 그냥은 돌아가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 원하는 것은 반드시 손에 넣는다.
오욕의 세월도 이제는 끝이다. 그렇게 각오하고 문을 열었다. 얻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데려오거나, 잡아 와라. 더는 지체하지 않겠다.]
어찌 지체하겠는가. 그러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