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9화
먹구름 사이로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자 유령들은 신기루처럼 일렁이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은 것은 잔불과 매캐한 내음뿐.
‘한바탕 꿈이라도 꾼 것 같군.’
물론 꿈이었다면 그 꿈은 분명 어디에도 없을 지독한 악몽이었을 것이다.
시어문드는 널브러지려 하는 병사들에게 소리치려다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는 옆에서 무릎을 반쯤 굽힌 채 헛구역질을 해대는 부관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병사들을 가리켰다. 그와 다년간 함께해온 부관은 상관은 그의 뜻을 바로 알아차리고는 힘겹게 목소리를 짜냈다.
“놈들이 언제 다시 튀어나올지 모른다! 경계를 늦추지 마! 시신들부터 수습해라!”
시어문드는 힘든 와중에도 제 할 일은 똑바로 해내는 부관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하룻밤의 전투에 불과했으나 그로 인한 피해는 상상 이상이었다. 유령들의 수가 얼마나 됐지? 백? 이백? 툭하면 안개처럼 변하고, 몸속으로 파고드는 터라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시체에 깃들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아닌가? 오히려 반대인가? 차라리 시체에 깃들었다면 어떻게든 맞붙어서 상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의미가 있을까? 아니, 그보다 그것들은 정말 물러간 것인가?
거의 고물이 되어버린 검을 던지듯 내려놓고서 그제야 주변을 훑어보았다. 소란이 잦아들었음에도 성내에 틀어박힌 이들은 아직도 겁에 질려있는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벽을 통과하는 것은 물론이고 땅으로 꺼지기까지 하며,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깃들기도 한다. 게다가 그 연기처럼 흔들리는 검은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온몸의 기력이 빨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것들이 한참 전부터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성의 주민들은 어떻게 지금까지 버틴 것일까.
“시어문드.”
“장…켁켁!”
이런 추태라니. 시어문드는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전투가 벌어지던 내내 연기를 들이마시며 고함을 질러댔던 터라 목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주민들을 불러모아라.”
‘예.’라고 답하려 했다. 여전히 바람 새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상관은 제대로 된 답을 들은 것처럼 휙 몸을 돌렸다.
* * *
“평범한 유령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간밤에 겪은 낭패에 대한 변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잘난 듯이,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 것처럼 말해놓고서 뒤늦게 입을 놀려댄다고 말이다.
하지만 흉흉하게 빛나는 군터의 두 눈앞에서, 그들은 감히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떨어뜨리고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너희가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지.”
“예, 옛?”
당황한 주민들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황급히 다시 숙였다.
“무언가가 그것들을 이 성에 구속하고 있다. 그 구속은 그것들을 이곳에 묶어둠과 동시에 지켜주고 있어.”
그리고 그 구속은, 틀림없이 이 주변에 있다. 이 건물, 혹은 이 근처 어딘가. 군터의 시선이 자그마한 홀의 곳곳을 훑었다. 특별해 보이는 구석은 없었다. 돌아나가면 현관과 이어지는 복도가 나온다. 안쪽으로 가면 성주의 집무실이 나오겠지. 특별한 점은 어딜 봐도 없다. 그나마 꼽으라면 건물 자체가 조금 오래된 것 같다는 점 정도.
“이 성에 대해 아는 것이 있나?”
“아, 아는 것이라 하심은…….”
“사소한 것이라도 좋다.”
“그…….”
이번에도 역시 대표 격으로 나선 중년 관리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곧 그가 아는 것을 다 풀어놓기 시작했다.
“제, 제가 알기로 이 성의 이름은 미타돈이 아니었습니다. 이 성은 본래, 그러니까 성전 이전에는 어떤 소국의 수도였다고 합니다.”
이 자그마한 성이 수도라. 그 정도면 소국이라 하기에도 뭐한 정도였을 것이다. 그나저나 제국이 지은 성이 아니었단 말인가.
“…하여, 최후까지 항전하던 왕족들은 예외 없이 성의 광장에서 처형당했다더군요. 그들을 따르던 전사들과 함께 말입니다.”
“…….”
별로 관심이 가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군터는 최대한 꼼꼼하게 들었다. 그의 기감으로도 유령들을 속박한 힘의 근원을 느낄 수는 없었다. 어떤 봉인이라도 되어 있는 것인지, 희미하게 그 존재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
그러니 번거롭더라도 어쩔 수 없다. 무시하고 성을 떠나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그건 도망치는 모양새가 아닌가. 무엇보다, 고작 이 정도 번거로움도 극복하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에…그리고 그 후로는…….”
“그러니까 성의 기본적인 구조 자체는 그때와 변한 게 없다는 말이로군.”
“예? 아, 예. 그렇습니다. 아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군터는 중년 관리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중에서도 성의 구조에 관한 이야기를 빠르게 곱씹었다.
유령들을 묶어놓은 힘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봉인되어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런 봉인은 기본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특유의 기운을 풍기기 마련. 그런데도 별달리 느껴지는 것이 없다. 성 전체에서 풍기는 음산한 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봉인이 그만큼 깊숙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봉인은 어디에 있을까? 지하? 가장 일반적이다. 무엇보다 우선해서 찾아봐야겠지.
군터는 시어문드에게 성의 지하를 수색하도록 명했다. 조금이라도 특이해 보이는 것이 있으면 곧장 보고하라고 한 후, 그 자신도 미타돈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중년 관리도 힘없는 발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벼…크흠! 특별한 것은 없었습니다.”
얼마 후. 여전히 목이 성치 않은 시어문드가 힘겹게 보고했다. 시어문드라면 일을 대충 처리하지는 않았을 터. 그렇다면 지하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쉽게 풀리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성가시게 됐다.
성과가 없기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성주관저부터 시작해서 성 곳곳을 돌아다녔으나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주변의 다른 건물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어 보이는 건물 한 채가 군터의 눈에 들어왔다.
“저곳은 어디지?”
“예? 그야, 신전이지요. 음…사실 엄밀히 따지면 신전은 아니지요. 공식적인 명칭은 예배당이지만, 저희는 신전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한 것을 왜 묻냐는 말투다. 계속 위축되어있던 자가 뱉는 말치고 다소 불퉁하다고까지 느낄 수 있는 말투였지만 그의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제국에서 원신의 상징을 벽에 새긴 건물을 보고 저곳이 어디냐 묻는 사람은 어지간하면 보기 힘드니까 말이다.
‘신전이라.’
하지만 군터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신전이든, 예배당이든 제 발로 찾아본 적이 없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신앙심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그런 그였기에 신전이든, 예배당이든 그저 낯선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중년 관리가 저곳을 예배당이라 하니, 왜 그가 의도적으로 이곳은 언급도 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설마하니 신의 성소에 불결한 존재에 관련된 무언가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은 것이겠지.
‘우습군.’
성에 남은 주민 중 성직자로 보이는 이는 없었다. 성직자가 굳이 자신이 성직자인 것을 숨기려 하지는 않았을 테니 이곳에 성직자는 없다는 뜻이다. 설마하니 저렇게 번듯한 예배당에 성직자 한 명이 없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 예배당에 있던 성직자들은 모두 도망쳤거나 죽었다는 뜻이다. 전자든 후자든, 자칭 신의 권속이라 하는 자들이 유령들에게 대적하지 못했다는 것 아니겠나.
쿵!
별로 힘들여 밀지도 않았건만, 예배당의 문은 크게 밀려나며 부서질 듯 벽에 부딪혔다. 뒤따르던 중년 관리가 기함했으나, 군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 흙과 재가 뒤엉켜 매끈한 돌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아이고! 장군. 그리 함부로…….”
아마도 이 말 많은 관리는 신앙심이 제법 투철한 자였던 모양이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뒤로하고, 군터는 어둑한 예배당 내부를 찬찬히 살폈다.
“저건 뭐지?”
그러던 중, 성궤(聖櫃) 주변의 계단에 남은 흐릿한 자국이 그의 눈길을 끌었다. 군터가 그 부분을 가리키며 묻자, 중년 관리는 흠칫 놀라며 답을 주저했다. 하지만 군터의 눈길이 뒤따르자 죽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유령들이 처음 출몰했던 날 밤에 주교님을 비롯한 사제분들이 그것들과 맞서셨습니다. 하지만 끝내 당해내시지 못했지요.”
“짧게.”
“…한 사제분이 예배당 안까지 몰리셨습니다. 그, 그리고 저곳에서…….”
“시신은 너희가 수습했나?”
“예. 차마 이곳에 그대로 둘 수는 없었기에.”
마지막에 이곳으로 도망쳤던 사제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신이 자신을 구원해주길 바랐을까? 아니면 그저 도망치다 보니 익숙한 곳으로 발이 닿은 것일까. 무엇이 됐든 간에, 성소라는 곳이 유령들에게 그리 의미 있는 장소는 아님이 분명했다.
“저건 뭐지?”
척 보기에도 종교적인 색채가 묻어나는 화려한 궤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화려하지는 않아도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는 독특한 기둥 하나가 있었다. 다른 기둥들과는 한눈에 보기에도 달랐다.
“제물입니다. 그 시절에, 그러니까 성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운 장수는 신께 제물을 바침으로써 축복을 받고자 했다는군요. 대개는 신전을 세울 때 성궤에 자신의 이름과 공적을 새기는 식이었다고 합니다만, 이곳은 조금 달랐던 모양입니다. 예배당의 기둥 하나를 직접 만들어 바쳤다더군요.”
군터는 중년 관리의 설명을 들으며 기둥에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설명이 끝나자, 손을 뻗어 기둥의 표면을 쓸어 만졌다.
“……!”
기둥에 손을 댄 군터의 표정이 굳었다. 뒤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중년 관리는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으나, 일변한 분위기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는 급히 뒷걸음질 쳤다. 감히 왜 그러는지 묻지도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입을 뗄 수조차 없었다.
“이 기둥을 세운 자가 누구지?”
중년 관리는 답하지 못했다. 두려움에 입을 포함한 몸이 굳어서.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해서.
군터는 돌아오지 않는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찐득하면서도 섬뜩한 악의와 힘. 그리고 그 너머에 희미하게 느껴지는 고통과 절망에 집중했다.
‘찾았다.’
바로 이것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은밀하게 감출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이 기둥이 봉인이자 구속임은 확실하다.
“밖으로 나가 병사들을 불러와라. 철퇴든 뭐든, 때려 부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가져오라고 전해라.”
“무, 뭐라고 하셨습니까?”
상술했듯, 중년 관리의 신앙심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신앙심으로도, 감정을 담은 군터의 눈빛에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추적자가 붙은 것처럼 달려나간 그는 곧 철퇴와 도끼 등을 든 병사들을 불러왔고, 군터는 그중 가장 단단해 보이는 철퇴를 건네받았다.
“물러서라.”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이 기둥에는 막대한 힘과 악의가 숨어 있다. 기둥을 부쉈을 때 그것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군터는 병사들을 충분히 물러나게 한 뒤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있는 힘껏 철퇴를 휘둘렀다.
콰앙!
굉음과 함께 크고 작은 기둥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