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8화
유령기수들은 인간은 보일 수 없는 움직임을 아무렇지 않게 행했다.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움직이고, 심지어 땅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여러모로 낯설고, 까다로운 적. 군터는 인간을 상대로 쌓아왔던 경험을 잠시 잊고 본능과 직감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형체가 의미가 없다. 유령기수가 들고 있는 칼이며 창 같은 것들은 실재하는, 그러니까 물리적인 영향을 끼치는 물건이 아니었다. 저것은 기운이 형상화된 것이며, 일종의 환상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직 저것에 베이지는 않았지만, 저것에 베이더라도 물리적인 상처가 나지 않으리라 군터는 확신했다. 단언컨대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영혼이 상하겠지.
부웅!
창이 허공을 갈랐다. 정확히는,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진 유령기수와 허공을 동시에 갈랐다. 얼핏 보기에는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한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창이 자체적으로 발산하는 기운에, 군터가 끌어올린 죽음의 기운까지 더해져 확실하게 유령의 혼체(魂體)에 상처를 입혔다.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무의미한 공격이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얕아.’
확실하게 공격을 성공시켰음에도 군터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주변을 둘러싸다시피 한 유령들이 대여섯, 그 이상으로 불어나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방금의 공격은 유효했지만, 그뿐이었다. 모습을 감춘 유령은 저 뒤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그리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지도 않았다.
상대하고는 있으나 속 시원하게 물리치지는 못한다. 적을 상대하며 거의 처음으로 경험하는 답답함이었다. 이런저런 전황에 답답함을 느낀 적은 있으나, 바로 앞에 있는 적을 상대로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영 어색하고 생소했다.
유령기수들 자체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공격은 군터의 기준으로 봤을 때 그리 빠르지도, 강력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기운을 느끼고 반응할 수 있는 군터에게 그들의 공격을 흘리거나 맞받아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역시 유령기수들을 효과적으로 몰아붙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늪 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열심히 손과 발을 움직이지만, 거의 제자리에서 몸만 띄우고 있는 꼴.
군터는 그것이 자신의 공격이 무디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렇게 판단을 내리자마자 처음 유령기수들이 나타났을 때부터 지금까지를 찬찬히 머릿속으로 되짚어 보았다.
유령마를 탄 유령들은 하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그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뜻일까? 그럴 리 없다. 그렇다면 이 성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의 기운을 느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들은 어디 다른 곳에 있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다. 성에 다다랐을 즈음부터 느껴지던 음산한 기운은 분명 그들의 기운이었고, 그것은 그들이 줄곧 이 성에 존재했음을 뜻한다.
저들은 망령이고 원령이다. 어떤 이유로든, 어떤 방식으로든 이곳에 묶인 존재들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지금 저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은 실에 매달린 인형을 상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무리 인형을 찌르고 베어 봐야 크게 소용은 없다는 거다. 인형을 없애려면 저들을 달고 있는 실을 끊어야 한다. 아니면 인형을 가루 한 점 남기지 않고 모조리 태워버리거나. 당연히,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버텨라! 이것들은 허깨비에 불과하다! 해가 뜰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라!”
어려운 주문인 것을 안다. 하지만 유령의 칼에 베인다고 목이 달아나지는 않는다. 게다가 시어문드가 이미 적절하게 움직여주기까지 했다. 단순히 버티는 것만이라면, 어떻게든 가능하리라.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군터 자신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후우.”
짧지만 깊은 호흡. 어느새 조금은 느슨해졌던 전신에 힘이 깃든다.
판니른에 돌아온 이후, 단 하루도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한 적이 없다. 휴식은커녕, 오히려 종일 모든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를 적에 대비해야 했다. 아무리 초인의 경지에 이르렀다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피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육신이었기에, 피로가 없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오래전, 정확히는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그 시절에는 피로와 고통 속에서도 잘만 버티고 싸웠었다. 그 시절에 비하면 이 정도 부담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을 칼처럼 날카롭게 가다듬자 서릿발 같은 한기가 군터의 몸에서부터 퍼져나갔다. 그것은 유령기수들이 뿌리는 한기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유령기수들에게서 풍기는 한기가 오한을 느끼게 한다면, 군터가 발산하는 한기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떨게 했다.
유령기수들은 죽은 자들. 반면 군터는 산 자였지만 그가 휘두르는 힘은 본질적인 죽음의 힘 그 자체였다. 서로가 다루는 힘은 같다고 해도 될 정도로 비슷했지만, 명백히 군터의 힘이 우위에 있었다.
그렇기에 유령기수들은 군터에게 있어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터가 유령기수들에게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지는 못했다. 우열이 있다고는 해도 그들의 힘이 결국은 동류였기 때문이다. 군터의 창은 유령기수들을 없앨 수 없었다. 무수히 찌르고 베다 보면 언젠가는 없애버릴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래도…억누르는 건 가능하지.’
요컨대 승리하기는 어려워도, 승기를 잡는 건 쉽다는 뜻이다. 의미 없는 말장난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승기를 쥔다는 것의 의미는 상당히 크다.
[꺼져라! 구질구질한 것들!]
군터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마음을, 의지를 터뜨렸다. 초월적인 존재의 의지는 그 자체로 힘. 거기에 연달아 창끝에 담은 죽음의 기운까지 흩뿌리니 그 위력이 배가 되어 유령기수들을 휩쓸었다. 뚜렷하게 형체를 드러내던 유령기수들이 사라질 듯 흐려진 채 흔들리고, 이미 몇 차례 군터의 공격을 받아 흐려져 있던 유령기수들은 아예 사라져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존재감과 기운은 여전히 주변을 맴돌았다.
쾅!
벼락처럼 거꾸로 떨어진 창이 바닥을 찍었다. 그 자리에 있던 유령기수가 흩어져 사라지더니 군터가 타고 있던 군마에 흘러 들어갔다. 동시에 힘이 가득 찼던 군마의 눈빛이 흐려졌다. 군터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건방진!]
군터가 군마의 뒷덜미를 가볍게 쥐었다. 형체 없는 힘이 군터의 손끝에서 흘러나와 군마에 깃들었다. 그러자 유령기수가 섬뜩한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뛰쳐 나왔다. 흐려졌던 군마의 눈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그런데 그 순간 군마가 크게 휘청거렸다. 주저앉을 기세로 쓰러지던 군마는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으나 그 후로도 제대로 서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농밀한 죽음의 기운에 노출된 탓에 기력이 쇠한 탓이었다.
“쯧!”
혀를 찬 군터가 다시 한번 군마의 뒷덜미를 쥐었다. 그러자 금방 유령기수가 깃들었던 때처럼 군마의 눈에서 빛이 흐려지더니 곧 완전히 사라졌다. 동시에 갈팡질팡하던 네 다리가 우뚝 섰다.
* * *
군터는 이전처럼 몇 기의 유령기수와 진득하게 맞붙는 대신 넓게 움직이며 되도록 많은 유령기수와 부딪쳤다. 더는 지치지도, 유령기수들에게 영향을 받지도 않게 된 군마는 주인의 뜻을 따라 공터 곳곳을 누볐다.
화륵!
이곳저곳에 퍼진 기름 위로 불길이 솟구쳤다. 눈이 먼 원령이기에 더욱 본능이 강한 유령기수들은 어지간하면 불길이 닿는 곳은 피해서 움직였다.
시어문드와 병사들은 그 점을 십분 이용하여 싸움에 임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매캐한 연기에 얼굴은 거뭇해지고 두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른다. 우스꽝스러운 몰골이었으나 지금 이곳에 두 발로 서있는 이들은 모두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필사적이었다. 바로 조금 전 짧게는 수년, 길게는 10년이 넘게 동료였던 이들이 갑작스레 눈을 뒤집어 까고 동료의 등에 칼을 박았다.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비명을 지르던가, 아예 혀를 깨물어!”
한순간에 열여섯이 당했다. 이쪽에서만 열여섯이었다. 잠깐의 방심 때문에 치른 대가치고는 너무 컸다.
“물러서라!”
화끈한 열기를 참으며 자리를 지키던 병사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바로 다음 순간, 군터가 불길을 뚫고 나타나 병사들이 버티고 서 있던 자리를 지나쳐갔다. 호시탐탐 주변을 맴돌던 유령기수들이 그 기세에 휩쓸려 섬뜩한 비명을 토했다.
‘아직인가…….’
잠깐의 여유. 시어문드는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잠시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여전히 어둑했다.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도무지 얼굴도, 옷자락도 비출 생각을 하지 않는 태양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미 한참 전부터 원망스러웠다.
“기름은 얼마나 남았나!”
“작은 주머니로 다섯…아니, 여섯 개분입니다!”
갈라진 목소리를 억지로 짜내 묻자 기진맥진한 답이 돌아온다. 어벙한 대답에 짜증이 치밀었으나 타박하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겠나. 소리칠 힘도 아껴야 한다. 그나저나 작은 주머니로 여섯 개라. 한 번 뿌리고 나면 끝일 분량이다. 그걸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저 불길이 성 전체로 번져버렸으면 좋겠다. 그 불지옥에서 어떻게 살아나가느냐는 고민도 되지 않았다. 일단 당장 저 끔찍한 유령들만 쫓아낼 수 있다면 지옥에라도 발을 못 담글까.
“뿌려라!”
“옛!”
뒷일에 대한 고민은 없다.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병사들이 목숨처럼 지키던 기름 주머니를 다시 약해지기 시작한 화염 속에 집어 던졌다.
‘버틸 수 있을까.’
처음에는 창칼이 통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저것들은 그보다 끔찍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빙의? 빙의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사람의 몸에 스며들어 조종하는(조종이라는 표현이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능력은 대처가 거의 불가능했다. 특히 피로로 정신까지 혼미해져 가는 지금은 더더욱.
눈에서 검은 진물을 흘려가며 동료의 몸에 칼을 박아넣다니. 그런 꼴이 되느니 차라리 병사들에게 말했듯 혀를 깨물고 죽어버리리라.
“날이 밝았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던 차. 저 북쪽에서 꿈 같은 헛소리가 들려왔다. 시어문드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혀를 찼다. 얼마나 몰려있으면 이제 저런 헛소리까지…….
“해, 해가 뜬다!”
그런데, 이번에는 바로 옆에서 똑같은 헛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조금 전에 그와 함께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봤던 병사다.
“어?”
그에 시어문드는 자신도 모르게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또 한 번 고개를 들었다.
헛소리가 아니었다. 분명 아주 약간이지만, 하늘의 어둠이 옅어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