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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47화 (947/1,064)

947화

대낮이다. 군터의 직감은 그렇게 알려주고 있었다. 우중충하다 못해 검은 느낌마저 들게 하는 하늘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틀림없다.

이 기묘한 어둠은 잘 훈련된 병사들의 심지마저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갉아먹었다. 며칠 전에 비해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가 크게 줄어든 것은 단지 여정의 고단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작은 성의 모습은 그들에게 있어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미타돈. 그 이름조차 생소할 이들이 대부분일 테지만, 지금 그들에게 이 생소한 이름은 연인의 마중만큼이나 반갑게 느껴졌다.

“장군. 정찰병을 보내겠습니다.”

시어문드의 말에 군터는 가볍게 고개만 까딱였다.

성벽 위에 사람의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첨탑 위의 깃발이 꺾이지 않았기에 아직은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 * *

“성벽 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성문은 닫혀있었습니다.”

“인기척은?”

“멀리서 소리를 내보았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습니다.”

“흐음.”

시어문드가 아리송한 얼굴로 턱을 긁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지 않은 병사를 탓하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지금, 가능한 한 안전하게 움직이는 것이 최선 아니겠는가.

“성내에 있는 것이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군.”

최악의 가능성이다. 반대로 그나마 낫다고 볼 수 있는 경우는, 안에 있는 것이 사람이나 겁을 잔뜩 집어먹고 움츠러들어 있는 경우겠지. 시어문드는 두 번째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정찰병들이 썩은 내는 맡지 못했다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일단 가까이 가보도록 하지.”

보고를 들은 군터가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천천히 성을 향해 다가갔다. 병사들의 눈에도 첨탑 위 깃발의 문장이 뚜렷하게 보일 즈음, 군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성문을 열라고 해라.”

“옛!”

안에 있는 것이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하느냐는 반문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병사들의 충성심과 믿음은 굳건했다.

“성문을 열어라! 군터 크렘보르 장군이시다!”

잡다한 수식어는 전부 뗀 투박한 외침. 하지만 힘이 가득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쥐죽은 듯 조용하던 성내에서 반응이 인 것은 힘이 가득한 외침이 희미해져 거의 사라져갈 즈음이었다.

“크, 크렘보르 장군?”

성문 뒤에서 힘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에 잔뜩 힘을 준 병사는 이번에도 있는 힘껏 대꾸했다.

“그렇다! 어서 문을 열어라!”

“하, 하지만……. 즈, 증거를 대시오!”

“이런 빌어먹을 놈이!”

병사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성문 뒤에 숨은 놈이 그의 앞에 있었다면 당장 콧잔등에 주먹을 날려주었으리라.

“열어라! 당장! 이 조잡한 성문을 여는 게 어려운 일인 줄 아느냐! 당장 열지 않으면 부수고 들어갈 것이다!”

혹독한 훈련과 실전으로 단련된 병사의 외침에 자연스레 살기가 깃들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성문 뒤에 있던 자가 당황하며 즉답했다.

“아, 알겠소! 열 테니 잠시만 기다리시오!”

그리고 잠시 후. 성문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 * *

쿵!

성문이 열렸다. 군터는 얼굴이 잔뜩 붉어져 돌아오는 병사를 일견하고는 성문 앞에 나온 십여 명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전투의 흔적은 없으나 반쯤 시체에 가까운 몰골. 깡마른 것도 그렇지만, 죄다 눈 밑이 검게 죽어있는 것이 꽤 오래 잠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군터는 그중 가장 앞에 나와 있는 자에게 눈길을 주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의 중년인. 관리로 보이는 자였다.

“성주는?”

“서, 성주께서는 괴물들과 싸우시다가 그만…….”

“괴물?”

괴물이란 말에 군터는 다시 한번 주변을 훑어보았다. 역시 전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중년의 관리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절대 거짓을 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성주께서는 괴물들에 맞서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유령기수들! 놈들은 벌써 한 달이 넘게 이 성과 주변에 출몰하며…….”

“유령기수?”

생소한 명칭에 군터가 중년 관리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중년 관리가 눈을 부릅뜨며 고함을 지르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 그렇습니다! 아, 유령기수라는 명칭은 저희가 붙인 것입니다. 하지만 장군께서도 놈들을 보시면 이해하실 겁니다. 흐릿한 형체에, 허공을 평지 달리듯 내달리지요. 그 어떤 무기도 놈들을 상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놈들은 벽과 건물을 통과하기까지 합니다. 성주께서 술사분들과 몇몇 용감한 병사들을 거느리시고 놈들과 맞서셨지만…….”

“놈들은 어디 있지?”

“이, 이곳에 있습니다! 분명 이곳에 있어요! 하, 하지만 놈들은 밤이 되기 전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예. 밤이 되면 놈들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주치는 모든 것을 죽이지요.”

겉모습을 보고 추측했던 대로, 중년 관리는 정상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적된 피로와 두려움이 그들의 정신을 크게 갉아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을 다 헛소리로 치부하고 넘길 필요는 없다. 적어도 성주가 유령기수라는 것들과 맞서다 죽은 것은 사실인 듯했고, 놈들의 능력이 기이한 것도 사실이리라. 그리고 놈들이 이곳에 있으며, 밤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래. 이제 알겠군.’

이 성에 감도는 정체 모를 한기. 기이하고 불길하지만, 지금까지 맞닥뜨렸던 괴물들에게서 풍기던 것과는 다른 기운.

반쯤 정신이 나간 관리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유령기수라는 것들이 정말, 지금도 이곳에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보이지 않는 것일 뿐.

저들이 그 괴물들에게 유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지 모른다. 대개 유령이라는 것들은 해가 진 후에야 깨어난다고 하지 않는가.

“장군. 저 말을 믿으십니까?”

“너는 믿지 않느냐?”

“으음.”

시어문드는 그로서는 드물게 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성주가 죽었다는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하지만 전투가 있었으면 당연히 흔적이 남아야 하는데, 그 흔적이라는 것이…….”

너무 빈약하다, 이 말이겠지. 그가 무엇을 의심하는지는 이해가 갔다.

“게다가, 그 괴물들이 성과 성 주변에 출몰하기 시작한 것이 이미 꽤 오래되었다는데 저들이 아직 이곳에 남아있다는 것도 쉬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발이 묶인 게지.”

“장군은 저들의 말을 믿으시는군요.”

“어차피 곧 알게 될 것이다.”

조금 전에 비해 확연히 어둠이 짙어졌다.

밤이 오고 있다.

* * *

중년 관리와 다른 이들의 말에 따르면 매일 밤 유령기수들이 내는 소리가 성 전체에 들린다 했다. 문을 닫아걸고 숨죽이며 밤을 지새우며, 매일 밤 지독한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던가. 그 정도로 시달렸다면 몰골이 저렇게까지 엉망이 된 것도 이상하지 않다.

“장군. 명하신 대로 준비했습니다.”

성 중앙 공터에 몇몇 무리로 나뉜 병사들은 대여섯 명에 한 명꼴로 손에 무기 대신 횃불을 쥐었다. 어둠을 몰아내기 위함보다, 병사들의 혼란을 막기 위함이었다.

군터는 중년 관리가 했던 이야기 중 유령기수들에게는 무기가 통하지 않았다는 부분에 집중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놈들을 상대하는데 머릿수는 크게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온다.”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 한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 인간의 몸으로는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자 군터는 고개를 들었다.

아-아아아-!

함성인가 비명인가. 구름 사이로 잘게 부서지는 달빛 아래, 존재하지 않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 유령기수!”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는 정신 나간 겁쟁이들의 헛소리라고 치부하고 비웃었던 이들이 지금은 그 이름을 발작하듯 외쳤다.

병사들 사이에서 퍼지는 동요를 느끼면서도, 군터는 별 반응하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유령의 군대를 응시했다.

‘과연.’

군터는 문득 궁금해졌다. 과연 건물 안에 틀어박혀 덜덜 떨고 있는 자들이 저것들을 제대로 보기는 했을까? 그리고 제대로 보았다면, 지금 자신과 똑같은 것을 보았을까?

아닐 것이다. 만약 그들이 자신과 같은 것을 보았다면, 저것들에게 유령기수라는 정상적인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을 테니.

‘망령들인가.’

중무장한 군대. 하지만 얼굴이 드러난 투구 아래에는 살점 하나 없는 백골뿐이다. 본래 살점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구더기인지 뭔지 모를 것들이 대신 자리한 채 꿈틀거리고 있다. 그것은 그 아래, 본래 군마였을 짐승도 마찬가지.

‘음?’

잘못 본 것인가? 군터가 기감을 더욱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그러자 괴물들의 모습이 더 뚜렷하게 보였고, 곧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기괴하군.’

중무장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투구가 아니었고 갑옷이 아니었다. 전신에 사슬이 자그마한 틈도 없이 감겨있는 것일 뿐이었다. 군터는 숨 막힐 듯 촘촘하게 괴물들을 감싼 사슬에서 섬뜩하리만치 지독한 악의를 느꼈다.

아아아아-!

이제야 알았다. 저것은 비명이다. 죽어서도 죽지 못한 자들이 행사하는 유일한 자유. 아니, 유일하게 허락된 자유.

“방패 들어!”

방패? 과연 저 괴물들을 상대로 효과가 있을까?

자문하면서, 군터는 활을 들었다. 그리고 최대한 시위를 당겨 화살 한 발을 쐈다. 그러나 역시, 힘차게 날아간 화살은 선두에서 내려오던 괴물을 맞추지 못하고 그대로 관통했다.

“횃불로 주변을 밝혀라!”

창칼이 통하지 않는 상대. 자칫 혼란에 빠질 수도 있었던 병사들을 시어문드가 다잡았다.

일반적으로 부정한 존재들은 불을 두려워한다. 괜히 여러 신화에서(비록 제국에서는 이단으로 치부되는 신앙일지라도) 불을 신의 권능, 신의 선물 등으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놈들과 상대하게 될 줄이야.’

이전에, 그리고 이번에 판니른에 돌아온 뒤 상대한 괴물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이런 난감한 부류의 괴물들은 처음이다. 교단의 이단심문관이나 집행관들은 사특한 존재들을 상대하기 위한 법구로 무장한다고 하던가. 예전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어차피 목에 칼이 들어가면 다 죽기 마련인데 괜히 유난을 떤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비로소 그들의 그런 유난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성수라도 어떻게든 구해놓을 것을.’

뒤늦게 아쉬움이 치밀었으나, 뭐 어쩌겠는가. 시어문드는 급한 대로 검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애써 관리해온 검을 이렇게 망가뜨려야 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하는 순간.

시어문드가 검에 불을 붙이는 것을 본 다른 이들도 급히 각자의 검에 기름을 부었다.

“온다!”

높이 떠 있을 때는 천천히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어느 정도 가까워진 유령기수들은 빗물처럼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형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서로가 겹쳐지기도 하고, 심지어 합쳐지기도 하며(분명 그렇게 보였다) 올려다보는 이들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어디를 향해 달려오는지도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방패 들어!”

본능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튀어나온 외침이었다. 그렇게 외친 직후, 시어문드는 과연 저것들을 상대로 방패를 드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곧 그 잠깐의 고민마저 사치가 되고, 그는 불타오르는 검을 힘껏 휘둘렀다.

아-아아아-!

시어문드는 유령의 비명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 영향을 피하지도 못했다. 마치 누군가 심장을 한 손에 쥐고 힘을 주는 것 같았다. 한 번 힘껏 검을 휘두르고서 잠깐 몸이 굳은 이유였다.

“이익!”

초월적인 힘에 의해 굳어버린 몸을 다시 움직이게 한 것은 지난 세월 수없이 단련하고 다듬은 의지였다.

화륵!

베었다. 아니, 베었나? 손에 느껴지는 감촉은 전혀 없었으나 유령기수는 훌쩍 뒤로 물러났다. 말을 탄 채로는 절대 보일 수 없는 움직임.

‘장군은…….’

호흡을 고르며, 뜨끈한 검 손잡이를 고쳐 쥐고 슬쩍 눈을 굴렸다. 흐릿한 유령들 너머, 족히 너덧은 되어 보이는 유령들에게 둘러싸인 군터가 보였다. 그는 잔뜩 먹구름이 낀 밤하늘보다 더 짙은 어둠에 휩싸인 채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창의 궤적에 걸린 유령들은 세찬 바람을 맞은 안개처럼 불안하게 흔들리며 흩어졌고.

“기름을 뿌려! 불을 질러라!”

변함없는 든든함에 위안을 얻은 시어문드가 불타는 검을 크게 휘두르며 힘껏 소리쳤다.

“예, 옛?!”

“명령이다! 기름을 뿌려! 당장!”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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