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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46화 (946/1,064)

946화

송아지라고 보기에는 크고, 다 자랐다고 보기에는 조금 작은 소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군터는 멀리서도 한눈에 그것이 이미 상당히 오래전에 숨이 끊겼음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이미 몸뚱이 전체가 식어버렸을 고깃덩어리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다른 이였다면 잘못 본 것이리라 생각하고 눈에 힘을 줬겠으나 군터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잘못 봤을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히힝!

정지하라는 명령도 없이, 고삐를 슬쩍 당김으로써 말을 멈춰 세웠다. 그러자 뒤따르던 병력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번에 멈췄다.

“장군. 어째서?”

군터는 길 한가운데 엎어진 소의 사체를 가리켰다. 시어문드가 눈에 힘을 주고 그쪽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

하지만 이 우중충한 하늘 아래 들어설 때부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덕일까. 군터처럼 백 걸음 앞에 기어 다니는 개미도 볼 수 있을 정도의 초인적인 시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시어문드는 곧 본능을 간질이는 이질감을 알아차렸다.

“저건…….”

이제 소의 사체는 제법 눈에 띄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에 잔뜩 힘을 준 시어문드는 들썩거리는 고깃덩어리 아래에 불쾌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구더기?”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농민들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소가 대로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흔하다는 게 아니라, 어떤 이유로든 사체 주변에 식은 살코기를 탐하는 다른 짐승이나 벌레 같은 것들이 꼬이는 게 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더기라고? 저렇게 큰 구더기가 존재하는가? 아니, 존재할 수 있는가?

이성에서 핀 의문이 덩치를 키우기도 전에, 시어문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강한 혐오감에 사로잡혔다.

사실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동요할 것은 아니었다. 그냥 눈살 한번 찌푸리고 넘어가면 될 일 아닌가.

“치워라!”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시어문드 본인도 자신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 이유를 깊이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길 한복판을 가로막다시피하고 있는 소의 사체를 치우게 했다.

“잠깐.”

그런데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몇 걸음 떼지도 않았을 때 군터가 그들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의아한 시선들을 무시한 채 안장에서 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들썩이는 소의 사체에 화살 한 대를 쏴 맞췄다. 그러자 그 순간.

카아아아악-!

소의 사체가 놓여 있던 땅이 아래로 꺼지며 기괴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마치 거대한 구더기 여러 마리가 이어진 것 같은 형태의, 꿈에서 나올까 싶을 정도로 끔찍한 모습.

군터가 눈살을 찌푸렸다. 옆의 시어문드처럼 괴물의 외관에서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괴물의 뒤틀린 본질을 한눈에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어울리지 않는다.

마치 울창한 숲 한가운데 모래 먼지만 가득한 황무지가 들어서는 것이 어울리지 않듯이, 저것은 명백하게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괴물이었다.

“기름을 날려라. 태워버려.”

함정까지 파놓고 먹잇감을 유인할 줄 아는 영리한 놈이다. 괜히 가까이 다가갈 필요 있겠는가. 곧 자그마한 기름 주머니들이 괴물에게 날아가 부딪쳤고, 수십 발의 불화살이 기름으로 범벅이 된 괴물을 태웠다.

괴물은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으나 다행히 다시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거나 하지는 못했다. 불길에 휩싸인 괴물의 비명이 잦아들 즈음, 군터는 시어문드를 비롯한 수하들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땅밑도 안전하지 않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당연히 해야 할 말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 쓸모도 없는 말이 되고 말았다. 하늘이 점점 어두컴컴해진다고 느껴질 때쯤, 곳곳에서 괴물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작은 새떼였다.

까마귀와 매를 반쯤 섞어놓은 것 같은 외형의, 어지간한 들개 크기의 새가 못해도 백 마리는 되어 보였다. 온통 새까만 색. 거기에 뚜렷한 양 날개에 비해 몸통과 머리는 짙은 안개에 가린 것처럼 흐릿했다.

군터는 놈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기도 전에 활을 들었다. 기민한 병사 몇몇도 활을 드는 군터를 보고 덩달아 움직였다.

슈슝!

하지만 허공에서 재빠르게 움직이는 괴물들을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 괴물들은 겁도 없는지 날아드는 화살에도 방향을 틀지 않았다.

“엇?!”

게다가 문제는, 어렵사리 맞춘 화살이 그대로 괴물을 관통해버리기도 했다는 점이다. 화살에 실린 힘이 강해서, 피와 살점을 뿌리며 뚫고 지나간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허공을 가르듯 관통해버렸다.

“유, 유령이다!”

몇몇 미신에 심취한, 혹은 심지가 굳지 않은 병사들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실제로 수없이 날아드는 화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드는 괴물들은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흉물 같았으니까.

“침착해라! 죽는 놈들도 있지 않으냐! 계속 쏘다 보면 다 잡아 죽일 수 있다!”

새떼가 한 번씩 하강해서 휩쓸고 갈 때마다 대여섯 명의 병사가 낙마했다. 놈들을 뿌리치기 위해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상대했음에도 피해가 적지 않았다. 심지어 괴물들은 마지막 한 마리까지 맹렬하게 덤벼들었다. 생명이라면 응당 죽음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이놈들에게는 그런 당연한 본능이 없는 것 같았다.

“…….”

헐떡이는 말에서 내린 군터가 혀를 빼물고 늘어진 괴조를 들어 올렸다. 덩치가 크고 부리와 발톱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날카롭다는 점 외에 특별히 눈에 띄는 구석은 없었다. 흐릿하던 몸 일부도 지금은 정상적으로 보였고.

‘그 맹목적인 적의.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생명, 특히 지성이 낮거나 없다시피 한 짐승의 경우는 본능에 충실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짐승이 고통과 죽음을 도외시하고 달려든다? 오직 적과 싸우기 위해 훈련받은 병사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 괴물은 마지막 한 마리까지 그렇게 덤벼들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군터는 렌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완전히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만약 신주에서 흘러나온 악의가 이 괴물에게 영향을 준 것이라면…….

“장군. 뭔가 발견하셨습니까?”

“글쎄.”

괴조의 사체를 내던진 군터가 손을 털고 일어났다.

“큰일이군요. 만약 앞으로도 이런 것들이 계속 나타난다면 어찌해야 할지.”

“모든 날짐승이 이렇게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 변했다 하심은, 이 괴물들이 평범한 새들이 변한 것이라는?”

“내가 보기엔 그런 것 같군.”

안 그래도 어둡던 시어문드의 표정이 더욱 심각하게 변했다. 소의 사체를 두고 유인하던 괴물도 그렇고, 이 괴조들도 그렇고, 지금껏 상대해온 적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였다.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아예 새로운 전술이 필요하다.

“이대로 조금만 더 가면 자그마한 마을이 나옵니다만. 어찌할까요?”

어둑한 하늘 때문에 시간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얼추 날이 저물기 시작한 듯했다. 그러니 지금 결정해야 한다. 속도를 높여서 마을까지 갈 것인지, 아니면 이쯤에서 쉴 곳을 찾을 것인지.

얼마 전처럼 밤새 이동한다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배제했다. 언제 어디서 어떤 괴물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 어찌 무리를 하겠나.

“쉴 곳을 찾지.”

천에 가까운 인원이, 그것도 예비 군마까지 딸린 기병 무리가 쉴 곳을 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인원이라도 적었으면 어디 동굴이라도 찾아보련만, 이 정도 인원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동굴은 아무리 인원을 나눈다고 해도 찾기 어렵다. 때문에 그들은 동굴 대신 적당한 개활지를 찾아 움직였다.

“이곳이 괜찮을 것 같군.”

군터는 그의 감각을 최대로 발휘하여 주변에 적대적인 존재가 없는지 살폈다. 눈과 귀, 코는 물론이고 기감까지 동원해야 했다.

“장군. 불을 피워도 되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군터는 적당한 크기의 바위에 걸터앉았다.

“불을 피워라! 한번 움직일 때는 열 명씩 움직이도록!”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목소리들. 소란스러운 움직임들. 군터는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밤바람이 낮과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시원함. 하지만 곧 그 시원함은 서늘함으로, 거기서 또 섬뜩함으로 바뀌었다.

강렬한 악의. 누군가 저 너머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어쩌면 그 시선은 이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노려보고, 휩쓸고 있을 뿐일지도.

‘확실하군.’

이제야 알겠다. 이 땅에서 일어난 일들이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벌어진 것임을.

그 누군가가 줄카인지, 아니면 다른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멋대로 날뛴 대가는 치러야 할 것이다.’

불어오는 악의를 느끼며, 군터는 또 다른 악의를 내면에 품기 시작했다.

* * *

콰직!

번개처럼 뻗어 나간 창끝이 괴물의 쩍 벌어진 주둥이를 찔렀다. 그 어떤 기척도 없이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괴물. 그러나 군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창을 회수했다.

“지긋지긋하군요.”

식은땀을 훔친 시어문드가 푸념조로 말했다.

자그마한 모닥불 곁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시어문드가 이야기했던 마을에 닿았다. 그러나 마을이 있었던 자리에 남은 것은 마을이었던 것의 잔해와 엉망으로 널브러진, 마을 주민들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시신들뿐이었다.

그 흔적을 보며 다시 한번, 이 괴물들이 평범한 생물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어떤 포식자도 먹잇감을 이런 식으로 내팽개치지는 않는다. 이 괴물들은 명백히 인간들을 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사냥감이 아닌 적 말이다.

“이런 놈들이 적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방금 군터의 창에 찔린 괴물. 들개와 뱀을 섞어놓은 것 같은, 몸통 부분이 유독 길고 뱀과 같은 껍질을 가진 괴물은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내고 덤벼들었다. 위장하고 있다가 달려든 것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판니른에 들어선 지 닷새째. 이런 부류의 놈들을 지금까지 몇 마주쳤었다. 마치 바로 앞에서 소환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레 나타나 덤벼드는 것들. 이놈들에게 당한 병사만 수십이 넘었다. 만약 군터가 그의 기감을 통해 한발 먼저 알아차리고 경고하지 않았더라면 피해는 지금의 몇 배에 달했으리라.

“이제 곧 미타돈입니다.”

이전에는 이름조차 기억하지 않았던 작은 성. 닷새 동안 방랑하듯 움직인 군터 일행이 처음으로 닿게 되는 제대로 된 성이었다. 규모가 작다고는 하나 명색이 성이니만큼 상주 병력도 제법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성벽을 포함한 방어 시설도 있으니 어쩌면 아직 이 난리에서도 버티고 있을지 모른다.

기대와 불안이 공존하는 가운데, 언덕 위에 자리한 작은 성 하나가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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