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5화
군터는 2천 명의 병력만을 대동하고 움직였다. 너무 많은 병력을 움직인다면 이런저런 말이 나올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고 너무 적게 움직인다면 그의 위신이 손상될 수 있기에 적절하게 타협한 수였다.
그러나 적절하게 타협했다고 해도 그건 그의 입장에서나 그런 것일뿐,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2천도 충분히 큰 규모였다. 제국 밖, 그중에서도 도시 국가나 도시 몇 개로 이루어진 국가에서는 충분히 대군이라고 볼 수 있는 규모.
그러나 군터는 그런 병력을 소규모 정찰대를 운용하듯 이끌었다. 말 위에서 건량 따위로 식사를 때우며 종일 이동하기도 했다. 말단 병사까지도 예비용 군마를 한 마리씩 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천 명이 나름 선별과정을 거친 인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괴물이라니. 요즘 시대에는 보기도 어렵고, 듣기로 어려운 이름이 아닙니까.”
물론 아주 가끔, 무지한 촌민들이 덩치가 큰 짐승을 보고서 괴물이라느니 어쩌니 떠들어대는 것은 제외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시어문드의 말처럼, 제국의 성전(聖戰) 이후로 적어도 제국의 강역에서는 괴물이라 할 만한 것들을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특히 요마라 불리는 사악한 존재들은 아예 발을 디딜 곳조차 사라졌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면서 수소문한 바에 따르면, 저 동쪽에서 출몰했다는 괴물들은 그런 부류에 속하는 것들인 듯했다. 제국의 땅에서 이미 한참 전에 멸절됐다고 알려진 것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스스로 무부라 자처하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일이나 잡다한 지식 등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빠삭한 시어문드였다. 하지만 그런 그로서도 이런, 비정상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짐작 가는 바도 전혀 없었다. 그렇기에 시어문드는 그의 과묵한 상관에게 물었다. 그가 보기에, 그의 상관은 이번 일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있는 듯했다.
“일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지.”
“예?”
“잊었느냐. 렌에서 있었던 일을.”
“아…….”
“황제의 전쟁이 사악한 것들을 모두 멸했다고 하지. 하지만 내가 보기엔 다르다. 없앤 것이 아니야. 재워둔 것일 뿐.”
신주.
제국의 손꼽히는 비밀 중 하나일 터인 그것의 존재 자체가 이러한 추측에 대한 방증이다. 그때 렌에서 보았던 것은, 군터로 하여금 어떠한 가설을 떠올리게 했다.
‘그 신주라는 것은 하나가 아닐 것이다. 둘도 아니겠지. 아마 제국 곳곳에 그런 것들이 퍼져 있을 터. 그렇다면 판니른에, 혹은 그 인근에 그런 것이 하나쯤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그리고 만약 렌에서 있었던 일이 이번에 다시 일어난 것이라면, 이 난리도 어느 정도는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다.
여기까지의 가설이 모두 틀리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신주가 저절로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일단 배제한다. 그렇다면 누군가 손을 썼다는 말인데, 신주의 존재 자체가 제국의 극비라면,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자 역시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 제한적인 자들 가운데 신주에 손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는 또 얼마나 될까.
이것이 군터가 동쪽의 소식을 접하자마자 줄카를 떠올린 이유였다. 줄카라면 신주의 존재도 알고, 그것에 손을 쓸 능력도 충분하다. 하지만 어째서?
‘아직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불분명하다. 추측이야 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번의 난리와 신주가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직접 가서 보기 전까지는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다. 그것이 지금 군터가 길을 재촉하고 있는 이유였다.
* * *
병사들의 군마를 모조리 시체마(군터가 그의 새로운 술법에 그리 이름 붙였다)로 만들어서라도 길을 재촉하고 싶었던 군터가 오젠 총독 아라누만 멘티케를 찾은 것은 그에게서 제대로 된 정보를 하나라도 건질 수 있을 거라는 시어문드의 조언 때문이었다.
“대공을 세우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어찌…몸은 좀 괜찮으신지.”
일전에 한 번 데인 적이 있어서인지, 아라누만 멘티게는 한 주의 총독답지 않은 저자세를 보였다. 아니면 지금 군터에게서 흘러나오는 거친 기운 때문인지도 몰랐다.
“괜찮소. 아니,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지. 그보다…동쪽에서 일어난 소란에 대해 듣고 싶소만.”
귀족의 화법 따위는 저 멀리 던져버리고 바로 본론인가. 아라누만 멘티케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맹수보다 포악해 보이는 상대의 두 눈은 자신을 뚫어지도록 노려보고 있었고, 그 시선 앞에서 아라누만 멘티케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목 바로 앞에 칼날이 번뜩이고 있어도 이런 느낌을 받지는 못하리라.
“처음 이야기를 들은 것은 주간(州間) 무역을 하는 장사치들에게서였습니다. 상행 중에 기괴한 것들에게 공격받았다는 것이었지요. 그 보고를 처음 들었을 때는 사교의 무리나, 일부 사특한 술사들에게 얽힌 것이라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판니른 총독이 적잖은 병력을 소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아라누만 멘티케는 자신이 완전히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말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최대한 간략하게, 하지만 빠뜨리는 내용은 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제야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정보를 수집했고, 판니른 총독에게 직접 연락해 어찌 된 일인지를 물었지요. 그리고 돌아온 답은, 솔직히 믿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가 조심스럽게 차 한 모금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괴물들이 나타났다. 그것도 사악한 존재임이 분명한…옛적에 이 땅에서 다 사라졌다고 알려진 것들이. 저는 믿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판니른 총독이 정신이 나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곧, 그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음을 알게 됐지요.”
판니른 총독 운바소르 아실은 허수아비 총독이었으나, 급박한 사태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충실히 수행했다. 빠르게 병력을 소집했고, 괴물들의 토벌을 진행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판니른 방위군의 주력은 저 먼 서쪽의 전장에 가 있었고, 그는 얼마 되지도 않는 병력으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는 인근 주들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 사람을 포함해서, 요청을 받은 총독들은 모두 얼마간이라도 지원군을 파병했습니다. 그리고 곧 소식이 끊겼지요.”
“소식이 끊겼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생각하시겠지만, 그것이 사실입니다. 어느 순간 소식이 뚝 끊어졌고, 그 후부터는 모든 총독이 성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간간이 주 경계를 넘어오는 괴물들이 생기면 그때마다 토벌하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방비만 굳히면서 상황을 지켜보는 중입니다.”
“서쪽에서 답신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말인가.”
“그렇지요.”
당연하지만, 일이 터지자마자 그들은 전장에 있는 황자에게 보고부터 했다. 아마 운바소르 아실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다만 황자가 아직 이렇다 할 답을 주지 않았기에 아라누만 멘티케를 포함한 동부의 총독들은 자신들의 임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성문을 닫고 소극적으로 일관하는 중인 것이었고.
“그렇군.”
들을 만한 이야기는 다 들었다고 판단한 군터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아라누만 멘티케도 허둥지둥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판니른으로 가시려는 겁니까.”
“그대의 임지는 이곳이지만, 내 임지는 그곳이니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아라누만 멘티케를 뒤로 하고 몸을 돌린 군터는 문턱을 나서기 전, 잠깐 멈춰섰다.
“혹 병력을 지원받을 수 있겠는가.”
“그, 장군도 아시다시피 이번 전쟁에 차출된 병력이 적지 않은 탓에 남아있는…….”
“알겠다.”
처음부터 별 기대도 없었다는 듯, 군터가 훌쩍 나가버리자 아라누만 멘티케는 그제야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흥건한 이마를 닦았다.
그 누구의 앞에서도, 심지어 황자의 앞에서조차 이렇게 긴장한 적이 없었다.
‘일전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더니, 그래서인지 먼젓번보다 훨씬 더 사나운 느낌이로군.’
본래 상처 입은 맹수가 가장 사납고 위험하다던가. 사냥을 즐기지 않는 탓에 그 말을 듣고도 그런 것인가 하고 넘겼던 그는, 이제야 비로소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2천 정도라고 했던가? 고작 그 정도 병력으로 뭘 어쩌겠다는 것이야.’
아라누만 멘티케는 군터 크렘보르가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임지가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에 이성이 흐려졌거나. 그러고 보니 식솔들이 모두 솔롬에 있다고 했던가?
‘이참에 골치 아픈 것들이 싹 쓸려갔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사태의 심각성이 너무 크다. 문을 닫아걸었다지만 그렇다고 아예 눈을 감은 것은 아니다. 그는 꾸준히 파니른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정찰병을 보냈고, 어느 정도의 수확을 얻기도 했다. 열을 보내면 그중 한둘이나 간신히 돌아오는 탓에 점점 더 정찰병을 보내기가 부담스러워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남의 집을 태우고 있는 불이라지만, 그 불이 언제 이쪽으로 옮겨붙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야.’
꾸준한 노력과 희생으로 얻은 정보는 판니른의 상황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괴물들이 출몰하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그 정도를 넘어 판니른이라는 땅 자체에 저주가 내리고 있었다.
저주. 그래. 저주다. 저주가 아니라면 저 땅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설명할 수가 없다.
아라누만 멘티케가 어느새 차갑게 식어버린 차를 홀짝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이 식어버린 차를 마시는 와중에도 습관적으로 차에 바람을 불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어느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서 이질적인 냄새가 풍겼다. 코로 맡는 것이 아니다. 냄새라는 표현도 정확하지 않다. 다만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가장 유사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 냄새였을 뿐.
바로 뒤에서 따르고 있는 시어문드도, 다른 병사들도 전혀 이상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 멀리, 대낮임에도 어쩐지 어두워 보이는 하늘을 보며 조용히 저들끼리 속삭이거나 눈살을 찌푸릴 뿐 지금 당장 불어오는 바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비린내? 악취? 아니, 그보다 더 불결한 무언가다. 군터는 이전에 이런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렌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역시 이 모든 소란은 짐작했던 대로 신주 때문에 일어난 것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단언하기에는, 뭔가 달랐다. 비슷할 뿐이지, 분명 달랐다.
‘역시 그가 관련되어 있는 건가.’
이곳에 오기 전, 군터는 헤이모라에 들었다. 그러나 그곳에 줄카는 없었다. 언제나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용아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명목상 헤이모라를 지키던 병사들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였다. 정황상 그들 모두 줄카와 함께 움직인 듯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저 우중충한 하늘 아래 어딘가에 있겠지.
“…….”
이제 군터는 병사들을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느긋할 정도로 천천히 이동했다. 지금의 이 조용한 순간이 지나면, 한동안은 편히 쉴 수 없을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