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4화
‘늦었군.’
4군단이 패퇴하고, 보로겐 콘실리에가 목이 잘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살라스는 허탈함에 잠겼다. 군터의 앞에서는 감정을 숨겼으나, 그런다고 그의 내심을 짐작하지 못할 군터가 아니었다.
“아쉬우냐?”
“예.”
숨길 필요도, 에둘러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것은 거리낌이 있는 사이에나 오갈 말이다. 살라스는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저도 적은 나이가 아닌데,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나 봅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감정이 널뛰는군요.”
그러면서 살라스의 시선이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향했다. 군터는 그런 살라스를 물끄러미 보다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신경 쓴다고 달라질 것은 없으니까. 변화가 있든 없든, 어떻게 변해가든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그 말씀이 옳습니다.”
이 한 마디에 다 털어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살라스는 똑똑한 녀석이니 결국 극복할 것이다.
“내 싸움은 끝났지만, 이곳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포트락의 아들이 죽지 않았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어린 만큼 기운이 넘치는 녀석이다. 티브리악이 모자란 녀석은 아니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야.”
“자이드라 멕시스가 앓아누웠다고 들었습니다.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이군요.”
“죽음을 피하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지.”
군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꾸준히 흘러들어왔다. 다만 잔뜩 낀 구름 때문에 햇살은 비치지 않았다.
“애석하군.”
“송구합니다. 전권까지 주셨는데, 소관의 능력이 부족하여…….”
“전권이라고 해도 말장난일 뿐이지. 녀석들이 고집을 피우면 네가 뭘 할 수 있었겠느냐.”
전장에서의 전권은 휘하 장졸들의 생사여탈권까지 쥐어줌을 의미하지만, 이런 일에서의 전권은 실상 미미하기 그지없다. 막말로 살라스가 보리스나 실비아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목을 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급한 불은 껐으니 그걸로 되었다.”
“그렇지만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두 녀석 모두 참 욕심이 많구나. 별것도 아닌 것에 눈이 멀어서는.”
군터가 혀를 찼다. 자식들을 생각할 때면 옅은 감정이 제법 자주 흘러나왔다. 이걸 기뻐해야 하는지, 씁쓸해야 하는지.
“장군의 기준은 범인들이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이런 말이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둘 다 범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욕심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그릇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살라스는 보리스와 실비아에 대해 실망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부모가 특별하다고 자식도 특별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해하게 됐기 때문이다.
과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러면 실망할 일도 없다. 특별하지 못한 것이, 평범한 것이 실망할 이유는 되지 않으니까.
“나는 돌아가지만 군대는 계속 이곳에 주둔시켜야 한다. 네가 맡아라.”
“예.”
“티브리악과 어떻게든 협조해야 할 테지만, 네가 알아서 판단하고 움직이도록.”
“그리 하겠습니다.”
살라스는 장군을 따르겠다 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 투쟁심은 어째 한창 혈기가 넘치던 젊은 시절보다 더 커졌다.
‘자책할 필요는 없나.’
어차피 모두가 움직일 수는 없다. 남아야 하는 사람은 남아야 한다. 게다가 군대를 이끄는 것 역시 중임이 아닌가.
그렇게 위안 삼으며, 살라스는 한동안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서 바람을 쐬는 군터의 등을 지켜보았다.
* * *
마침내 골고스를 떠나는 날이 왔다. 아직 뒷일이 남았으나 그건 살라스에게 맡기기로 하고, 군터는 채비가 끝난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떠났다.
빠르게 이동하는 동안 솔롬에서 온 전령들이 틈틈이 소식을 전했다. 골고스에서 떠나기 전부터 이미 소식을 전해놓았기에 전령이 길을 잃고 헤매는 일은 없었다. 그들은 닷새에서 엿새 주기로 솔롬의 소식을 전했는데, 특별한 것은 없었다. 군터의 기준에서는 모두 시시콜콜한 잡설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지루한 소식들을 통해 솔롬이, 보리스가 무탈하게 제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데이븐랏지의 동쪽 경계에 접어들 즈음.
“아흐레째로군. 날이 저물면 열흘이고.”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요?”
시어문드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여러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가장 편리한 가능성은 전령이 길을 헤매느라 지체됐다는 것인데, 여태 잘만 찾아오던 전령이 이제 와서 길을 잃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게다가, 그들은 여태 대로를 통해서만 이동해왔다. 길을 따라 이동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마주칠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엇갈릴 수 있단 말인가.
그나마 그럴듯한 가능성은 전령이 도적들을 만나거나, 다른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경우다. 하지만 이것도 이상한 것이,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 해도 각 성의 성주나 총독들은 적어도 대로변의 치안 관리만큼은 확실하게 하는 편이라는 것이다. 길을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대규모 도적 등과 마주칠 일은 없다 봐도 무방하고, 일부 소규모 부랑배 정도야 맞닥뜨릴 수 있겠지만 그 정도라면 훈련받은 전령이 충분히 떨쳐내거나 도리어 소탕할 수도 있다.
‘그보다는 차라리 국경 즈음에서 관병들과 마찰이 생겼을 가능성이 더 크지.’
먼젓번에 크렘보르 가문과 오젠 총독이 마찰을 빚었던 것처럼, 일부 관리들은 때때로 과한 욕심을 부리거나 주제넘은 짓거리를 하기도 한다. 물론 아무리 대가리에 똥이 가득 찬 자들이라고 해도 군터 크렘보르의 이름을 들으면 사리판단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을 테지만…세상에 무조건이라는 건 없으니까.
“느낌이 좋지 않군.”
자그마한 중얼거림. 흘려넘기면 그만인 말이나, 시어문드는 군터의 자그마한 독백에서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그 불길함의 정체를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바로 다음 날 아침. 델코보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성을 지나는 도중, 꼴이 엉망이 된 행상인들이 흘린 이야기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그래서 아주 난리가 났다더라고. 관문을 지나지도 못했다니까? 지휘관이고 말단 병사고, 얼굴이 아주 돌덩이처럼 굳어있었다네.”
“아바시스에서 쳐들어온 건 아니라던데. 그럼 대체 뭐지? 무슨 일이기에 아예 출입 자체를 막아버리느냔 말이야.”
거기까지 들은 시어문드가 말을 멈췄다.
“어이. 너희들.”
“예, 옛?”
돈 될만한 것을 찾아 직접 발품을 파는 행상인들은 대체로 간이 크다. 겁이 많은 사람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맹수나 도적들이 우글거리는 강과 산을 맨몸으로 건널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말을 탄, 최소 고위 장교임이 틀림없어 보이는 무관의 부름에는 바짝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흉흉함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지금 한 이야기. 더 자세히 해보아라.”
“이, 이야기라 하시면…….”
“관문을 통제했다고? 필시 동쪽의 이야기겠지? 오젠인가?”
“예, 예. 오젠 중부의 하라마론을 지나려다가 출입을 통제당했습니다요.”
“어째서?”
“자세히는 듣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같은 것들은 나랏일 하시는 분들이 하라시는 대로 따를 뿐이니까 말입니다. 에…다만, 얼핏 듣기로는 더 동쪽에서 뭔가 일이 터졌다는 것 같았습니다. 심상치 않은 일인지 군관분들의 표정이 상당히 좋지 않았고요.”
“흐음. 하라마론이라고? 너희 모두 같은 곳에서 온 자들인가?”
“아닙니다. 저는 하타반에서 왔습니다. 그쪽도 상황은 똑같았습니다.”
“…알겠다.”
시어문드는 행상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군터에게 전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젠의 성과 관문들이 행상인들의 출입조차 금할 정도로 문을 닫아걸었다는 것은…….”
“전령이 끊긴 것과 무관하지 않겠군.”
“예. 분명 그렇겠지요. 더 동쪽에서 벌어진 일인 것 같다 했으니, 아마 판니른도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흘려들은 이야기를 제멋대로 추측하고, 부풀리기 일쑤인 행상인의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오젠의 관문과 성들이 문을 닫아걸었다는 것만큼은 사실일 것이다. 무엇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군터는 자신도 모르게 헤이모라에 있을 줄카를 떠올렸다. 한 주 전체가, 어쩌면 그 이상이 영향을 받을 정도로 커다란 일이라면 떠오르는 가능성은 몇 되지 않는다.
“도통 모르겠군요. 그자들은 아닐 거라고 했지만, 역시 아바시스 쪽이 떠오릅니다.”
“곧 알게 되겠지.”
속도를 높인 군터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븐랏지와 오젠의 접경 도시 중 하나인 테이리프를 눈앞에 두었다. 그러나 활짝 열려있어야 할 도시의 성문은 적을 맞닥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그나마 크렘보르의 깃발을 들고 있어서인지 그들이 도시에 닿기 전에 전령이 먼저 다가오기는 했으나.
“군터 크렘보르다. 무슨 일이지?”
크렘보르의 깃발을 보고 오기는 했지만, 설마 그 군터 크렘보르 본인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전령이 덜컥 멈춰 서더니 황급히 말에서 뛰어내렸다.
“크렘보르 장군을 뵙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동쪽에서 들려오는 흉흉한 소문으로 인해 각 도시와 성, 요새들에 봉쇄령이 내려온지라…….”
“동쪽? 흉흉한 소문? 그게 다 무슨 말이지?”
경황이 없어 두서없이 늘어놓기만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전령이 한번 숨을 고르더니 비교적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동쪽, 그러니까 판니른 쪽에서 시작된 소문입니다. 곳곳에서 괴물들이 나타나고, 그에 따라 민가는 물론 대로를 따라 움직이던 여행자와 상인들이 습격을 당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출몰하는 괴물들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늘어나기라도 한 것인지, 판니른과 인접한 다른 주에도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보고가 있어…….”
“괴물이라고?”
“그,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헛소문이라 치부했습니다만, 실제로 콰타마에서 그것들이 출몰했을 때 적잖은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그 후로는 주 전체에 봉쇄령이 떨어졌습니다.”
콰타마라. 오젠의 동북부에 위치한 도시였던가. 제법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나오자 군터는 얼간이들이 뭔가를 착각했을 거라는 추측은 일단 접어두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은? 판니른은 어떻게 됐나.”
“그, 그것까지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성문을 열어라. 지나가겠다.”
군터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전령이 부리나케 달려가 성문을 열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괴물이 출몰했다? 소식이 끊겨?
한동안 전장의 한복판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위기감과 긴장감이 등골을 서늘하게 훑었다.
곧 성문이 열리자, 군터는 적진을 돌파할 때처럼 거칠게 말을 달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