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3화
적 대장을 베었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 전장이 여느 전장들과 같았다면 수급이라도 들어 올리면서 외치기라도 하련만, 지금 이곳에서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시야를 가리는 어둠도 어둠이지만, 대상을 가리지 않고 태워버리는 보라색 불길이 이곳에 있는 이들의 머릿속에 두려움을 심어놓았다. 시야도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언제 적의 창칼이 날아들지 모르는데, 거기에 아무런 대비나 저항도 할 수 없는 불까지 신경 써야 한다. 이미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전투가 아니었다.
“저리 꺼져! 꺼지라고!”
코앞에서 동료가 불에 휩싸여 몸부림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재로 변하는 것을 본 한 병사가 주변에 마구잡이로 칼을 휘둘렀다. 동료 병사들이 그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아악!”
기어이 마구잡이 칼질에 병사 한 명의 팔뚝이 잘려나갔다. 그쯤 되자 미치광이에 대한 껄끄러움으로 뒷걸음질 쳤던 이들도 덩달아 눈이 뒤집혔다.
“이 새끼!”
군터는 멀찍이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우습기도 했지만, 조금 더 지나자 자그마한 흥미마저 사라졌다.
밤이 뿌린 어둠보다 더 검은 연기가 자욱했다. 매캐하고 뜨끈한 재도 간간이 흩날렸다. 더운 여름날, 가장 뜨거운 땡볕 아래 놓인 듯했다.
모든 것이 엉망이다. 가관이라고 할 만한 상황을 몇 번이나 봐 왔지만, 지금 이곳은 그것과는 다른 의미로 엉망이었다. 싸우러 온 투사들이 모두 겁쟁이 어린아이가 된 것 같다고 할까. 어쩌면 이것이 권위와 억압, 군기 등으로 겹겹이 가면을 썼던 자들의 민낯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끝인가.’
이곳에서 더 무엇을 할까. 적과 아군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맛이 가버린 것들을 일일이 쫓으며 죽여야 하나? 굳이 그런 수고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밤이 끝나면 전투도 끝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진창에서 벗어나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지 않겠나.
“물러난다.”
그렇게 군터는 휘하 병력과 함께 전장을 벗어났다. 중간에 어디선가 전고 소리가 들리기도 했으나 무시했다. 몇몇 멀쩡한 것들이 애를 쓴다 해도 대세는 변하지 않으리라.
* * *
“내심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괜한 우려였군요.”
눈을 부릅뜬 채 식어버린 수급.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보로겐 콘실리에가 마지막에 무슨 생각을 했을지 얼추 알 것 같았다. 연기에 그을린 것인지, 아니면 땟국물에 젖은 것인지 모를 꼬질꼬질한 외관으로도 얼굴 가득 퍼진 감정을 지우지는 못했기에.
“보로겐 콘실리에는 죽었지만, 시온 포트락이 어떻게 군을 수습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젊지만 범상치 않은 자입니다. 어쩌면 그는 이런 기회를 기다렸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실력과 영향력이라면 대장을 잃은 4군단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군단장을 잡았지. 승리했고. 내가 더 신경 써야 하는 것이 있나?”
단호하게까지 느껴지는 담담한 대꾸에,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무슨 말을 한들 들어먹을 기세가 아니었다.
한 번의 전투. 한 번의 승리. 대장을 잡기까지 했으니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 이건가. 정말이지 칼이 따로 없구만.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상대를 어떻게든 설득해보려던 마음을 접었다. 통하지도 않을 말로 구질구질해지느니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편이 나으리라.
“아니. 없습니다. 장군이 약속을 지켰으니, 이번엔 제가 지킬 차례로군요.”
“그렇지.”
“마침 잘 됐습니다. 보로겐 콘실리에가 사용한 것이 그 하몬의 불이라더군요. 아주 오래전에 황제께서 직접 금주로 지정하신 위험한 불이지요. 그 정도라면 장군의 귀향에 좋은 명분이 되어줄 겁니다.”
전장을 혼란의 밑바닥까지 몰고 갔던 악신의 불꽃은 새벽의 빛이 밝아올 즈음 저절로 사그라졌다. 힘이 다한 것인지, 아니면 빛에 물러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다행스럽게도 전투가 끝나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불씨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장군은 돌아갈 수 있을 테지만 군대는 어려울 겁니다.”
“그렇겠지.”
4군단을 몰아냈다고는 하나 괴멸적인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간밤의 전투에서는 혼란이 극심했던 만큼, 제대로 된 충돌은 적었다. 아군의 사상자가 생각 외로 많지 않았던 것이 증거였다.
‘아쉽군. 아쉬워.’
극단적으로 보자면 적의 대장만 바뀐 것이다. 거기까지만 놓고 보면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보로겐 콘실리에보다는 시온 포트락이 어느 면으로 봐도 더 까다로운 상대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승리는 승리다. 이미 한발 물러났던 적을 쳐서 승리한 것이다. 게다가 대장까지 참살하지 않았나. 아무리 시온 포트락이 잘 수습한다고 해도 한 번 대장기가 꺾인 군대가 다시 군심을 찾기란 쉽지 않다.
쉬운 상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을 느끼지는 않는다. 단지 더 쉽게 갈 수 있었던 것을 힘들게 가야 하니 한숨이 나온 것일 뿐.
* * *
프란시스 티브리악과 가벼운 담판을 지은 군터는 즉시 골고스로 돌아가려고 했다. 군대를 모두 끌고 돌아갈 수는 없으니 누구를 남기고 누구를 데려갈 것인지 정해야 했을뿐더러, 부상병들도 호송해야 했다. 상태가 심각한 이들이야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남겨야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최소한 아군 병력이 있는 골고스로 옮겨서 치료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군터가 그대로 훌쩍 떠나리라는 이야기를 듣기라도 했는지, 자이드라 멕시스가 보낸 사람이 와 서신을 전했다. 만나고자 하는데, 몸이 편치 않아 직접 올 수가 없으니 한번 찾아와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한번 찾아주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뿐더러, 이번 전투에서 자이드라 멕시스가 적극적으로 협조해준 것(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지만)도 있었기에 군터는 호위 몇 명만 거느린 채 자이드라 멕시스를 찾아갔다.
“크렘보르 장군.”
화려한 방문 앞을 초췌한 몰골의 장수가 지키고 있었다.
군터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살리오 바마낙. 이번에 아드리안과 함께 어린 포트락을 상대하며 죽을 고비를 넘겼다던가. 아직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아드리안과 달리, 그는 그럭저럭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장군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준비 중이십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준비? 사람을 불러놓고 무슨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살리오 바마낙의 태도가 꽤 정중했고 난처해하는 모습이 거짓 같아 보이지는 않았기에 군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응접실에서 차를 반쯤 비웠을 즈음, 살리오 바마낙이 와 준비가 끝났다고 알렸다.
“손님을 청하고서 기다리시게 했군. 미안하오.”
살리오 바마낙의 몰골이 며칠 밤잠을 설친 자의 그것이었다면, 자이드라 멕시스의 몰골은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를 고민하는 병자의 그것이었다. 예전 테리브란에서 만났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군터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한 자이드라 멕시스의 모습에서 낯선 느낌까지 받았다.
‘죽어가고 있군.’
삶과 죽음의 관계는 빛과 그림자의 관계와 같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게 드리우는 법. 바꿔 말하면 빛이 약할수록 그림자도 옅다.
그리고 지금. 군터는 자이드라 멕시스를 감싼 모든 것이 희미해진 것을 그의 초월적인 기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남지 않는다. 반년? 한 달? 어쩌면 그보다 짧을지도 모르지. 노환으로 쓰러졌다고 들었을 때는 그러려니 했건만, 설마 이렇게까지 망가졌을 줄이야.
밝게 타오르는 동안에는 알지 못한다. 그러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리고 나서야 녹아 흘러내린 촛농이 한가득이요, 심지는 어느새 끝을 보이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하. 꼴이 말이 아니지. 그렇지 않소?”
자이드라 멕시스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을 한 것치고 목소리도 그렇고, 행동에도 나름 힘이 실려 있었다. 군터는 그 괴리감을 즉시 알아차렸고, 살리오 바마낙이 말했던 준비라는 것이 어쩌면 이 괴리감의 정체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런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다 아는 듯하구려. 하기야, 이런 몰골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다 짐작하겠지.”
그가 두툼한 이불을 슬쩍 끌어 내렸다. 이불로 가리고 있던 앙상한 손을 들고 감상하듯 천천히 눈앞에서 돌렸다.
“언젠가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은 몰랐지. 처음에는 부정했으나 곧 인정할 수밖에 없었소. 그러자 당황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더군. 그때가 되어서야 깨달았지. 난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그가 나직이 혀를 찼다.
“돌려 말하지 않으리다.”
주름진 눈에 열기가 떠올랐다.
“난 죽고 싶지 않소. 물론 세상에 진정으로 죽고 싶은 사람이 있기야 하겠냐마는,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소. 아니, 죽을 수 없어. 아직 해야 할 일이, 마치지 못한 일이 많기 때문이오.”
“…….”
“처음 장군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자라는 생각은 했었지. 하지만 그조차도 부족했군. 초월자라니. 하하.”
“불사의 방법 따위는 알지 못하오.”
대뜸 그의 말을 자른 것은 군터 나름의 존중 방식이었다. 괜한 희망을 눈앞에서 흔들며 고문하는 것보다는 이편이 낫지 않겠나.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다 죽어가는 노인은 그 배려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열기로 가득한 주름진 눈에 또 다른 감정이 떠올랐다.
“불사를 바라는 것이 아니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늘릴 수만 있다면 그걸로 좋소. 장군.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소. 장군도 알고 있을 텐데.”
“다시 말하지만, 모르오. 불사의 방법도, 연명의 방법도.”
“…실망스럽군. 정말 실망스러워.”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군터는 한때 총기로 가득했던 두 눈이 절망과 두려움, 의심으로 물든 것을 보았다.
“내가 아는 것은 죽은 자의 영혼을 붙들고, 억지로 몸을 움직이게 하는 것뿐이오. 하지만 그대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겠지.”
“사령술 말씀이로군. 물론 아니오. 나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누군가의 노예가 될 생각은 없소. 그것도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는 더더욱.”
“그렇기에 내가 해줄 말이 없는 거요. 내가 아는 건 그런 것뿐이니까.”
“후우.”
여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매달리든, 윽박지르든 소용없다는 것 정도는 깨달은 듯했다. 절망이 섞인 한숨이 길게 이어졌다.
“오히려 나보다는 그대가 더 잘 알 듯한데. 대를 이은 총독 가문에, 지금은 대권을 노리는 황족마저도 그대의 눈치를 살피지 않소.”
그 말에 자이드라 멕시스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지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자가 죽음과 다퉈왔다고 생각하시오. 쥔 것이 많을수록 놓기 아쉬운 법이니 태어난 이상 죽어야 하는 운명은 빈자와 부자, 약자와 강자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공평히 들이닥쳐 왔소.”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
“그렇소.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 운명에 거역한 자들. 전설로 이름이 남은 자들. 숱한 이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랐으나, 도달한 자들은 한 줌도 되지 않았지. 그마저도 온전치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 뒤는 독백, 혹은 한탄에 가까웠다.
“신빙성이 의심되는 전설들을 제외하면 진정으로 운명을 극복한 것은 황제가 최초라 볼 수 있지. 그야말로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을 한 신. 만인이, 세상이 그를 우러러봤으나 동시에 시기했소. 왜 안 그렇겠소?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모든 생명의 본능이거늘. 모두가 엎드려 경배하면서도 어떻게든 황제의 비밀을 파헤쳐보려고 눈에 불을 켰지. 하지만 결과는?”
역사가 증명한다. 수백 년 전에도, 지금도 황제는 유일하다. 그의 권속-군주-들 또한.
“황자가 그 비밀을 알고 있다면 이미 자신이 두 번째 황제가 되었겠지. 그렇지 않소?”
‘글쎄.’
군터는 초월자에 대한 강한 적의와 혐오감을 드러내던 자콥 트라소프를 떠올렸다. 그라면 초월자가 되어 죽음의 운명을 벗어던질 수 있다고 해도 거부하지 않을까? 그럴 것 같기는 하지만 또 모를 일이다. 막상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오면 눈앞의 이 노인처럼 절박해질지도.
“용혈을 받을까도 생각해봤지. 용아병들이 평범한 인간을 훌쩍 뛰어넘는 세월을 산다는 이야기는 비밀 아닌 비밀이니까. 하지만 걸리는 점이 있더군.”
자이드라 멕시스는 이제 군터에게 직접 답을 구하는 것은 포기한 것 같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별 기대는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저 두 눈에 깃든 절박함과 분노 역시 치밀한 계산 끝에 나온 것일지도 모르고.
그는 답 대신 조언과 협력을 구하려 했다. 그는 줄카가 헤이모라에 있다는 것도, 용혈을 받아들이면 좋든 싫든 줄카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도 다 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한 말 중 살아서도 죽어서도 노예가 되지는 않겠다는 부분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진심이었던 것일까.
“장군과 줄카 전하 사이에 몇 차례 접촉이 있었음을 알고 있소.”
“…….”
“또한, 줄카 전하와 황자 전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것도…알고 있지.”
건강한 사람처럼 이어지던 호흡이 갑작스레 거칠어졌다. 동시에 더 나빠질 것도 없던 안색이 정말 시체처럼 변해갔다.
“내게는 정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소. 그러나 급하다고 해서 독주를 들이킬 수는 없지. 그렇기에, 장군의 도움이 필요하오. 이 늙은이를 도와주시겠소?”
“내가 도울 수 있다면.”
“그거면 족하오.”
만족했다는 듯, 자이드라 멕시스는 힘없이 늘어지는 와중에도 시원하게 미소지었다.
그렇게 짧은 회담을 마친 후. 군터는 골고스로 돌아가 솔롬으로 돌아갈 인원을 꾸렸다. 마음 같아서는 솔롬의 병력을 모두 끌고 돌아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기에 솔롬의 병력과 판니른의 방위 병력을 고루 섞어 오천 가량을 편성했다.
그리고 그즈음, 살라스가 돌아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