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2화
보랏빛 불은 저주, 아니 역병과 같았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흔들리다가 역시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불쑥 솟구쳤다. 군터는 자신들의 뒤를 따라붙던 적들이 느닷없이 난리를 치며 흩어지는 것을 보았고, 그 한가운데서 환영 같은 보랏빛을 얼핏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기분 탓이었을 테지만, 군터는 그 흐릿한 악의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장군!”
힘락의 다급한 외침. 군터는 미간을 찌푸리며 팔을 뻗었다.
가볍게 튄 불똥 정도? 그 정도 크기의 자그마한 불씨가 그의 팔뚝 위에서 벌레처럼 기어오르고 있었다. 이번만은 그의 초월적인 기감조차도 아무 소용없었다. 군터는 힘을 끌어냈다. 육신보다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난 죽음의 힘이 그를 갉아먹으려는 악의에 맞섰다.
푸스스-
낙엽이 부스러지듯, 보랏빛 불씨가 부서져 사라졌다. 군터는 여전히 인상을 구긴 채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이것은 저주나 마찬가지다. 그것도 십중팔구, 풀어놓은 놈조차 뜻대로 다루지 못하는 통제불가의 저주일 것이다. 그에 대한 방증으로, 적의 대장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쪽의 군기가 어수선했다. 아직까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어째 허둥대는 분위기가 당장이라도 발을 빼려는 것만 같았다.
‘통제할 수 있었다면 그럴 이유가 없지.’
틀림없다. 만약 이 끔찍한 불꽃을 대충이라도 통제할 수 있었다면 저렇게 허둥댈 이유가 없다. 불길이 아군이 밀집한 곳으로 향하도록 방향을 잡기만 해도 승기를 따내는 데 충분했을 테니까.
“아악!”
“비켜! 비키라고!”
촌극이 따로 없었다. 지휘부로 향하는 적이 코앞이 있는데도 제대로 막아설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자들이 반이었고, 주변에서 일어난 불에 기겁하며 진형이고 뭐고 내팽개치는 자들이 반이었다.
“끄, 끄아아아-!”
아주 가끔, 바로 뒤쪽에서도 비명이 들려왔다. 군터의 뒤를 따르던 병사 중 몇몇이 재수 없게 ‘저주’에 휩쓸린 것이다.
그럴 때면 아무도 도울 수 없었다. 주변 병사들은 그저 말없이, 혹은 두려움을 억지로 누르며 불에 삼켜지는 병사들과 거리를 벌렸다.
“…….”
처음 한두 번은 군터도 고개를 돌려 그들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슬퍼해야 하는가? 아니면 분노해야 하는가? 이성은 어렴풋이 그래야 한다고 희미하게 속삭이지만, 정말 그런가? 그의 세상은 어느새 다시 무채색으로 변해 있었다.
쾅!
육중한 방패를 들고 앞을 막아서던 병사를 날려버리고, 음산한 바람에 휘날리는 대장기를 눈에 담았다.
콘실리에의 문장기. 미처 회수하지 못한 것인가. 군터는 꺾일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깃발을 일견하고 방향을 잡았다.
흐릿하지만 보인다. 백에 가까운 인원. 제법 군기 정연하게 똘똘 뭉쳐서 움직이고 있다. 보로겐 콘실리에이거나, 그의 명을 받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던 측근 정도 되겠지.
“다 따라잡았다.”
힘락과 병사들이 연기에 그을려 거뭇해진 투구를 벅벅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괜찮은가.”
“예. 참으로 적절한 때에 와주셨습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살리오 바마낙의 목소리에서 독기가 빠진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초췌하다는 표현도 부족한 상대의 얼굴과, 붉고 검은 것들로 범벅이 된 갑옷을 슬쩍 살피고는 엉망이 된 주변을 둘러보았다.
“초장부터 저항이 심하군. 게다가 뭔지 모를 술법까지.”
이제 막 강을 건너왔을 뿐이지만,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여기저기서 일고 있는 보랏빛 불길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방금까지의 짤막한 전투 도중에도 그 흉험한 불꽃은 몇 번이나 모습을 드러냈고, 그때마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짐작일 뿐이지만, 그는 이 자리에서 죽을 것처럼 격렬하게 싸우던 시온 포트락이 물러난 것도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는 그 ‘불’ 때문이리라 확신했다.
“그게 술법입니까?”
“그렇지 않겠나. 나는 꺼지지 않는 불이 자연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네.”
살리오 바마낙만큼이나, 아니 어떻게 보면 더 심한 몰골의 아드리안이 힘없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도 그렇군요. 그나저나…어떻게 하실 겁니까?”
어떻게 하냐니. 설마 여기까지 와서 도로 강을 건너가자는 말은 아닐 것이다. 단지, 여기서 보기에도 엉망 그 자체인 전장으로 군대를 밀어 넣을 것이냐는 물음이겠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수십의 병사가 영문도 모른 채 타죽었다. 병사들 사이에는 벌써 두려움이 감돌고 있었다.
“상황이 이상하게 변했지만, 달라질 것은 없네. 이번에 확실히 마무리 짓지 못하면 다시 또 질질 끌릴 테니까.”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엉망이 된 둘을 번갈아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함께 가자고 하고 싶었으나,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을 보니 차마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잘 해주었네.”
“물러나라는 말씀입니까?”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데 어찌 싸우려고 그러나?”
“…….”
“괜한 고집은 접어두고, 여기서부터는 맡기게.”
두 사람 모두 고집은 부리지 않았다. 타라냐드에서 손꼽히는 귀족 무장도, 잘난 주인을 모시느라 덩달아 콧대가 높아진 평민 무장도 지금만큼은 상처와 피로에 넝마가 된 부상자에 불과했다.
그렇게 그들을 후방으로 보낸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군을 정비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수작을 부린 건 분명 보로겐 콘실리에다. 불리하게 돌아가는 판을 어떻게든 흔들어놓으려 했음이 분명해. 하지만 거기까지가 그자의 한계일 것이야.’
보로겐 콘실리에는 냉정히 따져보면 본인의 능력보다는 이름값으로 현재의 위치에 오른 이였다. 물론 그가 무능한 작자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장이라 할 만큼 유능한 자인 것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그가 꾸밀 수 있는 술책이라고 해봐야 판을 흔드는 것까지일 터.
그 뒤는 평범하게 군을 물려 정비하고, 다시 벽을 세워 버티는 식으로 일관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 녀석이 순순히 따르려 할까.’
마지막까지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우며 물러나는 병사들의 뒤를 지키던 시온 포트락을 떠올렸다. 부하들을 아끼는 지휘관의 용맹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과할 정도로 몸을 아끼지 않는 그를 보며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이토록 혼란한 전장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최고 지휘관급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일선 장교들의 경우 적이 아니라 그들에게 불만이나 앙심을 품고 있던 휘하 병사들에 의해 죽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고 들었다. 눈먼 창칼이 수도 없이 날아드는 전장의 한복판에 있다 보면 무기의 방향이 때때로 엄한 곳을 향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전장의 흔한 괴담일 뿐이라고 웃어넘겼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영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약 군터 크렘보르 그자가 보로겐 콘실리에를 치는 데 성공한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분명 그 젊은 초월자는 지금도 저 어둠 너머에서 보로겐 콘실리에를 찾아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상황이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더 혼란스럽고 지저분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그는 초월자가 아닌가? 불가능한 것 같은 일도 그에게는 불가능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만약, 이 난리 중에 보로겐 콘실리에가 목이 달아난다면? 그러면 자연적으로 지휘권은 시온 포트락에게 넘어갈 터.
‘정말로 다음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물론 이는 전부 예측이며 가정에 불과하다. 휘하 병력도 그렇고, 시온 포트락 본인부터도 상당한 부상을 입은 만큼 이후를 기약하려면 본인의 안위부터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당장 그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으리라.
“각하. 병사들의 사기가…….”
부관 중 한 명이 다가와 말했다.
최대한 숨긴다고는 하지만 다 억누르지 못한 두려움이 초조한 목소리에서 묻어나왔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여기까지 와서 손가락만 빨다가 돌아갈 수는 없지 않나. 저 불에 타죽으나 적의 화살에 맞아 죽으나 매한가지다. 망설이는 녀석들이 있다면 베어라. 적의 군단기를 취하기 전까지 우리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여느 때와 달리, 그의 목소리에는 칼 같은 단호함이 가득했다.
* * *
털썩!
군터는 주저앉은 적병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그 뒤편, 앞다리가 꺾여 쓰러진 말에 깔려 낑낑대는 적장을 보았다.
푸르륵!
주인의 뜻을 읽은 군마가 터벅터벅 앞으로 걸었다. 어딘가 공허한 소리를 내는 투레질은 습관일 뿐이다. 호흡하지 않으며, 지치지도 않는 말이 굳이 투레질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니 습관이다. 혹은 말이라는 종에 각인된 본능이거나.
“으…으으!”
사람이 죽음 앞에서 극도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본능이라면 본능일 것이다. 그게 귀족이건 평민이건, 무지렁이 농민이건 단련된 군인이건 상관없이.
“보로겐 콘실리에.”
그는 자신을 깔아뭉갠 말을 기어이 밀어내고 두 다리로 섰다. 그러나 칼을 쥔 손은 제대로 올라가지 않았다. 말과 뒤엉켜 넘어지면서 어딘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지.
“…실수했군.”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말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군터는 눈앞의 무장이 보로겐 콘실리에라는 것을 확신했다. 저기 바닥에 널브러진 문장기과 군단기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렇게 뛰어난 사냥개가 있을 줄이야.”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군.”
두려움에 떨던 중년인은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조금 전까지의 모습이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그럴지도.”
이것이야말로 그의 본모습일 것이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이 세상을 살아온 보로겐 콘실리에라는 사람의 본모습.
“군터 크렘보르겠지. 맞나?”
“그래.”
적의 대장을, 그 수급을 취할 기회를 바로 앞에 두고 보일 수 있는 담담함인가. 보로겐 콘실리에는 실소했다.
소문이 과장되지 않았다. 아니, 이자는 소문 그 이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괴인이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고.
“내 목을 취한들, 즐거울 일은 없을 거다.”
“글쎄.”
죽음을 앞두고 구차하게 입을 놀린다고 생각하는 건가. 굴욕적이군. 보로겐 콘실리에는 몇 마디를 더하려다가 관뒀다.
‘그래. 이제 원하는 대로 해보도록.’
떨어지는 죽음을 보고 있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뜻밖에도 가족들의 얼굴이 아니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달갑지 않게 여겼던 애송이의 얼굴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