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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41화 (941/1,064)

941화

사람은 급박한 상황에 놓일수록 머리가 굳기 마련이다. 여기서 머리가 굳는다는 것은 뒷목이 뻐근해진다거나 하는 물리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속도가 느려지거나 아예 마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귀를 아프게 할 정도로 여기저기서 들리는 전투의 굉음. 솟구치는 불길과 불길 속에서 흘러나온 매캐한 연기. 하루의 피로를 풀지도 못하고, 혹은 얕은 잠에서 채 깨지도 못하고 급작스러운 상황과 맞닥뜨려야 했던 4군단의 병사들은 자연스레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그 혼란이 가라앉기도 전에 타라냐드(멕시스)와 바크렌(티브리악), 판니른(크렘보르의) 연합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그야말로 불쑥 튀어나왔고, 4군단은 적의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떨어지는 칼과 찔러오는 창을 막아야 했다.

“빌어먹을!”

이즈음, 보로겐 콘실리에도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그는 다급히,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부관에게 물었다.

“포트락 장군은 아직 적과 교전 중인가?!”

“첫 번째 전갈 이후 소식이 없습니다만,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군중에서 이따위 추측성 언사라니. 하지만 지금은 부관을 탓할 겨를도, 이유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목소리에 확신이 담겼다면 오히려 그쪽이 더 위험할 것이다.

‘도강을 막는 것은 이미 늦었다.’

아니. 이것을 도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분명 해가 지기 전까지만 해도 강이었건만, 이제는 난잡하게 뻗은 개천처럼 보였다. 게다가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계속해서 수위가 낮아지고 있는 것 같았고.

‘넘어온 놈들을 당장 밀어내는 것도…아무래도 힘들 것 같군.’

전고를 울리고 호각을 불며 전황을 파악하려 했으나 돌아온 답은 일부에 불과했다. 지휘부의 신호에 답할 수도 없을 만큼 상황이 좋지 않거나, 급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뜻.

‘별 수 없군.’

교전하고 있는 전방의 일부 부대를 버려두더라도 일단 거리를 벌리고 군을 정비한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그것도 별 의미는 없다. 아군을 잡아먹고 기세가 한껏 오른 적과 숨을 헐떡이면서 맞붙게 될 뿐이다. 어쩌면 물러나는 아군의 발목을 물고 늘어질지도 모르지.

‘응전하는 수밖에.’

다행히 시온 포트락이 먼저 움직였다. 때때로 나이에 걸맞게 철없는 모습을 보이곤 하지만, 녀석은 영웅의 아들이자 당대 포트락이다. 무장으로서의 실력은 의심치 않는다. 녀석이라면 가장 눈에 띌 것이고, 가장 격렬하게 싸울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적이 강하게 몰아친다 해도 쉽게 꺾이지 않을 터.

“불을 질러라.”

“예?”

“이미 놈들이 불을 놓았지. 더 크게 불을 질러. 잠시라도 이 어둠을 다 불사지를 수 있도록. 하몬의 불을 쓰겠다.”

* * *

하몬은 제국이 본격적인 팽창을 막 시작했을 무렵, 황제와 맞서다 패하고 결국 그 기원마저 소멸했다는 악신이다. 그 흉험했던 악신의 이름을 붙인 만큼, 하몬의 불은 평범한 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불이었다. 일반적인 붉은색이 아니라 옅은 보라색을 띤 이 불은 자그마한 불씨 하나조차 멀쩡한 집 한 채를 통째로 태울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그 강한 화력만큼이나 취급할 때의 위험성 또한 크기에, 이 비밀스러운 전략 물자는 제국 내에서도 극도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졌다.

그리고 지금, 그 전설적인 불꽃은 다시 한번 그 이름값이 과장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부, 불이다!”

자그마한 불씨 몇 개가 흩날렸을 뿐이다. 마치 나비의 날갯짓에서 떨어지는 자그마한 꽃가루처럼.

그러나 그것들이 소리 없이 땅에 내려앉았을 때, 그 희미한 불씨들은 세상을 불태울 거대한 불꽃이 되었다.

옅은 보랏빛 불길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솟구쳤다. 적과 아군을 분간하지 않는 불꽃이 그에 닿는 모든 것을 불태우기 시작하자, 격렬하게 맞붙던 양군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아악!”

병사의 팔에 붙은 불이 빠르게 몸 전체를 뒤덮었다. 비명은 길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목까지 번진 불이 그의 비명을 삼켜버렸다.

“물러나라!”

불길은 여기저기서 솟구쳤다. 심지어 느닷없이 허공에서 폭발이 일기도 했다. 대다수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치기에 바빴지만, 몇몇 뛰어난 기감을 지닌 이들은 갑작스레 전장에 나타난 끔찍한 불길 속에서 소름 끼치는 악의를 느꼈다.

군터도 마찬가지였다. 초월적인 기감을 지닌 그는 불길 속에 깃든 악의를 누구보다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쾅!

몇 걸음 앞에서 일어난 폭발. 사기를 머금은 창이 불꽃을 갈랐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잠시 주춤했을 뿐, 넘실거리는 악의는 춤을 추듯 꿈틀거리며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런 긴장감을 느껴보는 것이 얼마 만이던가. 군터는 저 폭주하는 불꽃이 자신에게도 위해를 끼칠 수 있으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저것도 법보일까? 타라냐드와 멕시스가 법보를 보관해왔다면 적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퇴각한다!”

퇴각을 입에 담아본 것은 또 얼마 만인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까마득하다. 하지만 군터는 예측할 수도 없고, 대비할 수도 없는 불길 속에 그의 병사들을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괜찮겠습니까.”

수하들이 그의 명령에 토를 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니, 흔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군터는 그 말을 한 부관을 보았다.

힘락.

눈에 띄는 자는 아니었다. 말수가 적고 책임감이 투철하여 부관으로 곁에 두곤 했다. 아드리안이 없으면 그의 부관은 항상 힘락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나.”

“저희는 장군을 따를 뿐입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장군의 짐이 되기를 원치는 않습니다.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불구덩이에 뛰어들 겁니다.”

영문 모를 불길이 솟구치기 전까지 전장의 흐름은 명백하게 이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사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폭발하고, 일렁이는 불길은 적과 아군을 동시에 휩쓸고 있었으니까. 흐름 자체는 여전히 이쪽이 주도하고 있다.

그것을 모르지 않을 군터가 퇴각을 명한 이유를, 힘락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번 쥔 승기를 놓치면 싸움이 길게 끌릴 수도 있습니다. 저희를 염려하신다면, 그러지 마시라고 말씀 올리고 싶습니다.”

군터는 차분한 표정의 힘락과, 그 뒤에 비슷한 얼굴을 한 병사들을 쓸어보았다.

“좋다.”

고민은 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남의 싸움에서 피를 흘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각오가 섰다면 그들의 원을 들어주지 않을 이유도 없다.

군터는 엉망이 된 전장에서, 가장 짙은 군기가 느껴지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조금 전까지 그랬듯, 거침없이 말을 달리는 그의 뒤로 솔롬의 정예들이 바짝 따라붙었다.

* * *

“아아악!”

볼썽사납게 튕겨 나갔던 적병이 몸을 일으키다 말고 불길에 휩싸였다. 시온 포트락은 혀를 차며 저릿한 손을 풀었다.

‘하몬의 불이로군.’

반쯤 날아갔던 이성이 코앞에서 타오른 보랏빛 불꽃을 보며 돌아왔다. 시온 포트락은 강렬한 위기감을 느끼는 한편, 그 소심하던 군단장이 드디어 칼을 뽑아 들었음에 기뻐했다.

‘그만큼 몰렸다고 판단한 건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 악신의 불을 사용했는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는 이 끔찍한 불꽃은 전장의 흐름 자체를 뒤흔들어놓을 수 있을 만큼 파괴적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렇게 뒤흔들어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지만, 막막한 상황에서 판을 깨는 용도로 쓰기에는 그 어떤 힘보다 더 효율적이다.

시온 포트락은 선황이 직접 금주(禁呪)로 지정한 그 물건이 보로겐 콘실리에에게 주어졌을 때, 그 물건을 사용할 일은 없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전쟁의 무게에 짓눌린 황자가 위험한 실수를 범한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건 위험한 실수가 아니라 앞을 내다본 지혜의 결과였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긴 하지만.

“나도…네놈들도, 모두 위험천만한 도박판 위에 오르고 말았구나.”

어딘가 뼈 한두 개 정도는 나갔을 것 같은 두 명의 적장. 그러나 엉망이 된 몰골로도 그들은 여전히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적병들이 하몬의 불에 기겁하며 난리 치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봐야 변하는 것은 없다.”

창백한 얼굴의 살리오 바마낙이 창끝을 겨누며 말했다. 아무 말이나 지껄이면서 숨을 고르려는 수작. 뻔히 보였으나 시온 포트락은 그 구질구질한 노력을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엉망이 된 적장에게 갑자기 측은한 마음이 생겨서가 아니라, 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좋을 대로 떠들어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시온 포트락은 갑옷 안쪽에 새겨진 주술진이 빛을 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쥬드 포트락이 제국의 영웅으로 불리며 가문을 일으켜 세웠지만, 사실 포트락은 그 전부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무가였다. 거기에 쥬드 포트락이 화려한 방점을 찍은 셈.

그렇기에, 포트락의 적자인 시온 포트락의 무장은 화려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대단했다. 그가 탄 말부터 그가 착용한 모든 무구가 법구였다. 특히 그의 칼과 갑옷은 이름 높은 명장이 망치질하고, 궁중 술사들이 직접 힘을 부여한 명품이었다.

시온 포트락의 갑주에는 호신의 기능이 있었다. 외부의 온갖 위협으로부터 착용자를 보호하는 힘이었는데, 시온 포트락은 평소에는 이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각인된 힘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필요한 때만 이 힘을 사용했고,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눈먼 불에 타죽을 수는 없지.’

무형의 기운이 자신을 감싼 것이 느껴졌다. 이 힘이라면 그 하몬의 불이라도 몇 번 정도는 막아줄 터. 그러나 몇 번 정도가 한계일 것이고, 그리 오래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끝낸다.

“후우.”

뜨끈한 입김이 흘러나왔다.

등줄기를 서늘하게 만드는 불과 폭발 덕분에 후끈 달아올랐던 머리가 어느 정도 식었다.

‘멀었군. 멀었어.’

늘 머리를 차갑게 해야 한다는 부친의 가르침. 매일 되뇌지만 거의 매일 잊는다. 정말 크게 한번 데여야 체득할 수 있을까.

와아아-!

숨을 고른 그가 끈질긴 두 놈에게 다시 한번 달려들려던 찰나. 두 방향에서 커다란 함성이 들려왔다. 한쪽은 전방, 한쪽은 후방. 시온 포트락의 눈이 재빨리 어둠 너머를 확인했다.

‘저 깃발…티브리악이로군.’

전방에서 요란하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병력. 그들은 티브리악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시온 포트락은 혀를 차며 이번에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요란하기로는 이쪽도 전방 못지않았다. 북과 뿔피리 소리가 섞여 들렸다. 필시 본진에서 흘러나온 소리일 터.

‘공격받고 있는 건가.’

보로겐 콘실리에의 얼굴이 떠올랐다.

금주까지 써가며 판을 흔들었건만, 그래도 몰리고 있단 말인가. 시온 포트락은 순간 갈등했다.

본진에서 지원 신호가 떨어진 이상 말머리를 돌리는 것이 맞다. 전방에서 적의 지원군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

고민의 빛이 떠올랐던 시온 포트락의 얼굴이 곧 무표정하게 변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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