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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40화 (940/1,064)

940화

마상검치고도 조금 긴 것 같은 장검이 사형집행인의 도끼처럼 뚝 떨어져 내렸다. 아드리안은 기함하며 고삐를 우측으로 당겼다. 똑똑한 말은 그의 지시가 있기도 전에 이미 몸을 틀고 있었다. 말못하는 짐승도 느낀 것이다. 저 무지막지한 검에 스치기라도 하면 자신의 목덜미가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뭐라도 할 것처럼 떠들어대더니, 우스꽝스러운 춤이나 추는 게 전부인가!”

대꾸하지 않는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입을 열 정신도 없기 때문이다. 목소리로 뺄 힘조차도 저 검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데 써야 한다.

‘그래도…그나마 다행이군.’

다 죽어가던 살리오 바마낙이 이제 어느 정도 기운을 찾은 듯, 처음보다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가 지닌 각인의 힘일 터. 저 힘이 얼마나 더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덕분에 상황이 절망적인 지경까지는 이르지 않고 있었다. 만약 혼자서 이 괴물과 맞서야 했다면…아니, 그런 끔찍한 상상은 집어치우자.

‘난적이로구만.’

재차 날아드는 검을 힘겹게 피했다. 저 검과 대여섯 번 부딪친 그의 창날은 벌써 군데군데 이가 빠져 있었다.

“쥐새끼들!”

아드리안이 숨이 턱끝까지 찰 정도로 몰리자 살리오 바마낙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어 시온 포트락의 시선을 돌렸다. 눈에 빤히 보이는 수작이었으나 시온 포트락은 기다렸다는 듯 거칠게 맞받아쳤다.

쾅!

결연하게 나선 살리오 바마낙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시 시체처럼 창백해졌다. 그러자 아드리안이 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창을 고쳐 쥐었다.

슈슈슝!

그러나 그가 나서기도 전에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그러자 시온 포트락이 신경질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그 무성의한 휘두름. 거기서 인 바람만으로 화살의 방향이 틀어졌다.

“계속 쏴!”

등 뒤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상황이 나아지고 있다는 방증일 터. 아드리안은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주 잠깐. 그의 애마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드리안은 전우의 마음을 이해했다. 지성이 있는 존재라면 위험 앞에 망설이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때로는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심하면 죽을 줄 알면서도 달려들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있는 그의 전우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조용한 재촉에 언제 망설였냐는 듯 용기를 낸다. 아드리안의 마른 입가에 옅은 웃음기가 감돌았다.

‘가자.’

어린 포트락은 눈이 반쯤 뒤집힌 후로 초인적인 무위를 선보이고 있었다. 정면에서 맞서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 이 정도 강적과 맞닥뜨리는 것은 나름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조차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런 열세에 놓인 상황 자체는 나름 익숙했다. 그의 상관, 군터 크렘보르와 연무장에서 마주 보고 서 있던 때도 이렇게 매 순간 한계를 경험했었으니.

‘장군보다는 확실히 편하다.’

물론 그때와 달리, 지금은 조금만 실수해도 바로 목이 날아간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어린 포트락은 그의 상관에 비해 한결 쉬운 상대였다. 폭발적인 힘을 발휘한 순간부터, 움직임이 다분히 감정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어리기 때문일까, 아니면 저 무지막지한 힘에 대한 대가일까. 뭐가 됐든, 이쪽에서 적극 이용해야 할 부분임은 분명하다.

“장군!”

두 눈을 어린 포트락에게서 뗄 수 없기에 주변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장군을 부르짖으며 합류하는 아군 병사들이 조금씩 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군 병력이 속속들이 도강을 마치고 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전투에서 아군이 승기를 거머쥐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끄아악!”

충성심, 혹은 공명심, 혹은 머릿수에 대한 자신감으로 달려들었던 병사들은 잔뜩 흥분한 어린 포트락에 의해 처참하게 도륙당했다. 어찌 된 것인지 저 어린 녀석은 시간이 갈수록, 피를 보면 볼수록 더 힘을 내고 있었다. 내심 놈의 체력이 빠지기를 기대했던 아드리안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챙!

가까스로 빗겨냈다. 그런데도 순간적으로 손에 감각이 사라졌다. 실로 무시무시한 힘. 시간이 갈수록 힘이 더 강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정말 착각일까?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상황은 썩 나쁘지 않았다. 물론 주변에 아군 병사들의 시체가 늘어나는 것은 비극적이지만, 아드리안 자신만 놓고 본다면 처음보다 훨씬 나았다. 어린 포트락이 힘은 강해졌을지언정, 공격 자체는 거칠고 단순해졌기 때문이다.

“으아아!”

살리오 바마낙도 필시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놈의 시선을 끌며 희생한, 희생하고 있는 병사들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어린 포트락은 점점 거칠고 단순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약한 힘으로 강한 힘을 상대하기 위해, 이겨내기 위해 고안한 것이 기술. 즉, 무술이다. 처음 부딪쳤던 검에는 쉽게 떨쳐낼 수도, 흘릴 수도 없는 힘과 기교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 부딪치는 검에서는 강력하지만 단순한 힘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크악!”

휘하 병사들의 목숨을 방패 삼아서 부리는 고약한 여유일까. 아드리안은 또 한 명의 병사가 목이 잘리는 것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놈!”

살리오 바마낙이 달려들었다. 그는 이제 양팔에 제대로 힘을 실어 도끼창을 휘둘렀다. 온 힘을 다했음이 분명한, 강맹한 일격. 그러나 어린 포트락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충 검을 뻗어 도끼날을 멈춰 세웠다.

‘지금.’

아무런 약속도 신호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아드리안은 살리오 바마낙의 생각을,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살리오 바마낙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으윽!”

육중한 도끼창이 결국 얄상한 검에 담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밀려났다. 그 틈을 노려 병사 두 명이 양옆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어린 포트락의 고개가 살짝 움직이나 싶더니, 그를 태운 갈색 말이 거칠게 몸을 틀었다.

“피해!”

갈색 말의 안장에 걸려있던 검 한 자루가 어린 포트락의 비어있던 손에 들렸다. 누군가의 경고는 너무 늦었고, 어둠을 가른 선은 이미 두 병사의 팔과 가슴을 가로질렀다.

‘지금!’

피가 튄다. 부릅뜬 눈에 닿는 핏물. 아드리안은 붉게 변하는 시야 속에서 노려야 할 곳을 정확히 응시했다.

‘찌른다!’

급소는 노릴 수 없다. 욕심은 버리고 취할 수 있는 것만 취한다.

그러니 옆구리. 깊게 찌르지 못해도 좋다. 온 힘을 다해 찌르고, 반격을 당하기 전에 물러난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집중력이 최고조로 발휘될 때, 간혹 이런 순간이 온다. 심장의 박동이 전고의 울음이 되고, 숨소리는 창가를 두들기는 태풍이 되는.

창이 일직선으로 뻗어간다. 수천, 수만 번을 거듭한 동작에 군더더기는 없다.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이 낭비 없이 모조리 들어간, 그야말로 최선이자 최고의 찌르기.

푸-욱!

창끝이 갑옷을 파고들었다. 확실한 감각이 손끝으로 전해진다. 제대로 들어갔나?

부웅!

아니.

“……!”

갑옷은 뚫었다. 하지만 충분히 깊이 파고들기 전에 허리가 움직였다. 반응한 것이다. 허리를 틀어 피해를 최소화하고.

촤악!

피가 튄다. ‘내 피인가? 그렇겠지.’ 아드리안은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그런데 창은 그가 휘두른 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순간 이해하지 못했던 아드리안은 다음 순간, 또 한 번 피가 튀는 것을 보았다. ‘또 당했군.’ 설마 팔 한쪽이 날아간 것은 아니겠지? 아드리안은 본능적으로 말 등에 눕다시피 몸을 젖혔고, 또 한 번 피가 튀었다. 이번에 튄 것은 그의 피가 아니었다. 어찌 알았냐면, 눈에 보이는 세상이 크게 뒤집혔기 때문이다.

“크헉!”

땅을 뒹굴었다. 물기 가득한 흙이 입속으로 들어오고서야, 아드리안은 제대로 된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인가.’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는 다행히 한 곳이었고, 또 다행히 가슴 쪽이었다. 두툼한 흉갑을 가르고 상처를 낼 정도면 베여도 정말 제대로 베였다.

‘보지도 못했단 말이지.’

아드리안이 몸을 일으키려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리 한쪽은 목이 날아간 애마의 몸뚱이에 깔려 있었다. 그런데 왜 아프지가 않지? 아, 감각이 없군.

‘빌어먹을.’

붉고, 흐릿해진 시야에 살리오 바마낙이 보였다. 쓰러질 듯 말 듯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 그를 대신해 죽어주는 병사들이 있었지만, 그 역시 그리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지독하군. 괴물 자식.’

최선이었고 전력이었다. 그런데도 부족했나? 어떻게 당한 것인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우득!

단순해진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보인 것일 뿐.

우드득!

아드리안이 깔린 다리를 빼냈다. 다행히 관절이 꺾인 것은 아닌지, 조금 삐걱대기는 해도 움직이는 데 지장은 없었다.

‘한 방 제대로 먹었군.’

쉽게 가고 싶은 마음에 상대를 조금이라도 얕잡아 본 것이 아닐까. 아드리안은 주변에 떨어진 창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창대 끝부분이 부서져 있기는 했으나,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 지금은 조금이라도 가벼운 편이 좋다.

‘한 방 먹었으면, 이쪽도 돌려줘야지.’

흐리멍덩한 두 눈이 목표를 좇았다.

될까, 안 될까는 생각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머리를 텅 비우고, 세 방향에서 날아드는 화살에 맞춰 창을 던졌다. 그리고 그 직후 힘없이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시원하게 욕지거리 한번 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눈이 감기기 전, 언제까지고 설쳐댈 것 같았던 애송이 놈이 낙마하여 쓰러지는 것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 * *

와아아-!

수십, 수백 가닥의 실개천. 적게는 발목에서 심하면 무릎 이상까지 빠지는 진흙 바닥을 수천의 병사들이 짓밟고 지나갔다. 그 모습은 마치 자그마한 물길 위로 큰 파도가 치는 듯했다.

“적의 반응이 늦습니다.”

“다행이지 않은가.”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눈을 좁히며 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무리 눈에 힘을 줘도 보이는 것은 없었다.

“병력을 결집하려 할 테지. 그리하도록 두어서는 안 돼.”

눈으로는 볼 수 없어도 머릿속으로 그릴 수는 있다.

“당초 계획했던 대로 군을 셋으로 나눈다.”

곧장 보로겐 콘실리에를 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어렵다. 그러니 난전을 유도한다. 어둠은 모두의 눈을 가리지만, 미리 알고 준비한 쪽과 그렇지 못한 쪽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보로겐 콘실리에가 군을 수습하고 이끌기 전에 전장을 수렁으로 끌어내리는 거다.

‘그는 빠르게 끝내겠다고 했지만…아무래도 힘들겠지.’

군터 크렘보르는 길게 끌 생각이 없다고 했다. 단번에 머리를 치겠다는 뜻.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겠지만, 그는 초월자다.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 어쩌면 말이다.

얼마나 될지 모를 가능성에 기대기보다는 더디더라도 확실하게.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저 멀리서 점점이 번지는 붉은 빛을 보았다. 동시에 매캐한 탄내가 코끝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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