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39화 (939/1,064)

939화

“으아아아!”

날카로운 목소리에 비해 뻗어오는 창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군터는 어설프게 뻗은 창과 적병의 머리를 단번에 베었다. 높게 솟구친 핏물은 그의 몸에 닿지 않았다. 그는 핏물이 제대로 퍼지기도 전에 목 없는 몸뚱이를 한참이나 지나쳤다.

“아아악!”

비명.

“하압!”

고함, 혹은 기합. 그리고 쇠붙이가 서로 부딪치며 내는 날카로운 소음.

삶과 죽음이 엉망으로 뒤엉켜 소용돌이치고 있는 전장. 세상에서 가장 치열하면서 비참한 살육의 장. 그 한복판에 있건만 군터는 평소와 같았다. 그의 마음은 일정하게 흐트러짐 없는 숨소리만큼이나 차분했고, 그의 두 눈에 비치는 풍경은 적막한 산야를 담을 때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잘린 머리가 둥실 떠오른다. 군터는 악의로 가득 찬, 빛이 빠져나가고 있는 두 눈을 응시했다. 이 녀석은 자신의 삶이 이곳에서, 이렇게 끝나리라 짐작이나 했을까?

푸욱!

최대 거리로 뻗은 창끝이 심장을 찌른다. 앞만 보고 달려들다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덜컥 멈춰버린 적은 입을 몇 번 달싹거리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군터는 창을 회수하며 크게 횡으로 휘둘렀다. 우측에서 달려들던 적의 목이 잘려나갔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의 감각은 이 일대를 철저하게 포착하고 있었으므로.

와아아-!

함성. 함성. 함성.

기죽지 않기 위해, 상대의 기를 죽이기 위해,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상대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 누구의 명령도 없이, 발작에 가깝게 악을 쓰는 양측 병사들이 부딪치고 또 부딪친다.

그 열기를 누구보다 뚜렷하게 느낄 수 있지만, 그래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무미건조한 시선은 혼란 속에서 가야 할 길을 찾고, 길을 찾은 직후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길을 따라 움직였다.

* * *

“포트락의 대가 내 손에 끊기는가! 아니지. 동생이 있다고 했었나? 불행 중 다행이로군!”

“건방진 소리를 지껄일 실력이 있는지 확인해보겠다!”

욕설이든 조롱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라도 좋다. 상대를 흔들어 평정심을 잃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승리를 위해 해야 할 첫 번째 포석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살리오 바마낙은 그런 쪽으로는 별 소질이 없었다. 아니, 사실 소질이 아니라 적성의 문제였다. 그는 정정당당한 승부에 가치를 두는 사내였고, 따라서 입으로 저속하게 떠들어대는 방식은 그의 미학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품격 있는 무장의 가치관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사내였다. 때로는 원치 않는 일이라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그에게는 지난 며칠간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지금은 다르다.

“부친에게서 얼마나 배웠는지 보도록 하지!”

“지금까지 기회가 없지 않았을 터인데, 이제 와 그런 말을 하는가! 입은 가벼우면서 엉덩이가 무거운 자치고 제대로 된 사내를 보지 못했다!”

“직접 확인하도록!”

지휘관이 직접 나서서 칼부림을 벌인다는 것은 사실 그리 실용적이지 못한 일이다. 병사들을 지휘해야 할 지휘관이 일개 병사처럼 칼부림에 시간을 쏟는 것도 그렇지만, 더 큰 문제는 그렇게 앞에서 싸우다가 덜컥 눈먼 칼에 맞아 목이 달아나는 경우다. 지휘관을 잃은 군대는 머리를 잃은 몸뚱이와 같으니, 괜히 전투가 시작되면 너도나도 ‘적장의 목을 베어라!’라고 외쳐대는 것이 아니다.

본래는 이렇지 않았다. 제국이라 불리기 전의 카라누르. 즉, 황제가 나타나기 전의 카라누르에는 이런 문화가 없었다. 지휘관이 앞에서 직접 피를 뿌리는 문화는 황제가 정복 전쟁을 개시하면서부터 생긴 것이었다.

황제와 군주들. 그들은 군대의 가장 앞에서 누구보다 눈에 띄는 모습으로 가장 먼저 적과 부딪쳤다. 그리고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웠다. 그 모습은 벽화로 새겨져도 부족하지 않을 만큼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만인이 그들을 숭앙했다. 단 한 번이라도 전장에서 그들을 따라 싸운 이들은 누구라도 예외 없이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그렇게 그들의 이름이 세상을 울리기 시작하면서, 안전한 후방에서 편히 앉아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지휘관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그래.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기다려온 순간이 아니던가.’

살리오 바마낙은 그의 애병을 불끈 쥐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들뜬 마음을 든든하게 받쳐주었다.

상황은 간단하다. 밀어내려는 적을 막고, 도리어 밀어내면 된다. 작게는 아군이 도강할 시간을 벌고, 크게는 본격적인 공세의 선봉이 되어 적을 쓸어버린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물러서지 않고 용맹히 싸우는 것.

복잡한 계산은 필요 없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가장 격렬한 투쟁뿐.

쾅!

전력으로 내리친 일격을 애송이 포트락은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살리오 바마낙은 대수롭지 않게 공격을 이어갔다. 어차피 한방에 이득을 취할 수 있으리라는 말랑한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제껏 들은 소문의 반만 사실이더라도 이 애송이는 만만찮은 상대임이 분명하다.

“후우.”

합을 나눔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의 조절이다. 호흡이 부족하면 공격도 방어도 제대로 할 수 없다. 호흡의 배분은 곧 힘의 배분이며, 그렇기에 호흡을 조절하고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챙!

눈으로 쫓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검.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반은 본능이요, 반은 상대의 호흡을 놓치지 않은 덕이었다.

말머리를 노린 공격이 칼끝에 막히고, 기다렸다는 듯 찔러오는 검을 창대로 튕겨냈다. 한 번의 공격. 그리고 한 번의 수비. 한 번씩 주고받는 흐름이 한동안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어졌다.

상대에 대한 가늠은 첫 합에 이루어졌다. 빠르게 끝낼 수는 없다. 그러니 느슨한 흐름 속에서 파고 들어갈 틈을 노린다.

쾅!

애송이 포트락의 무기는 검. 반면 살리오 바마낙의 무기는 육중한 도끼창이었다. 선수를 잡기는 힘들지만, 대신 한방의 파괴력 쪽에서는 확실한 우위를 가졌다. 살리오 바마낙은 그 우위를 최대한 이용했다. 그는 일단 단단하게 수비를 굳히면서 반격의 기회를 엿보는 식으로 방향을 잡았다.

무리해서 먼저 치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 그는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걱!

한순간 빨라진 검. 본능의 경고에 따라 황급히 몸을 뒤로 젖혔지만 견갑이 잘려나가고 화끈한 통증이 어깨에 번졌다. 살리오 바마낙은 반사적으로 창을 휘둘렀다. 제대로 된 반격이 아니라, 그저 상대를 물러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반사적으로 나온, 어설픈 실수였다. 허를 찔렸다는 당혹감 때문이었을까.

또 한 번, 그의 눈은 흐릿해진 검을 놓쳤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창의 궤적이 강한 충격에 틀어졌으며, 붉게 물든 어깨를 또 한 번 검 끝이 훑고 지나갔다.

“커흑!”

살리오 바마낙이 고삐를 당기며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피를 묻힌 검이 재차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 * *

기회를 포착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한 번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육체적으로 치고받는 싸움만이 아니라 군대끼리 벌이는 전투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다.

‘지금.’

호흡이 달린다. 전력을 쏟은 공격을 잠깐의 쉴 틈도 없이 연달아 날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전력이 왜 전력인가. 남는 것 없이 그야말로 모든 힘을 말한다. 모든 힘을 쏟았으니 여력이 남을 리가 없다. 두 번이나 모든 힘을 쏟았다면 제아무리 뛰어난 무인이라도 힘이 달릴 수밖에 없다. 특히나 이 호흡은 더더욱.

검이 멀리 뻗어갈수록 심장이 당기는 느낌이 강해진다. 부하가 걸리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무리할 가치가 있다. 이 한 번으로 상대의 숨통을 끊을 수만 있다면.

채앵!

하지만, 적장의 목을 찌를 것이라 믿었던 검은 힘없이 튕겨 나갔다. 시온 포트락은 창백해졌던 적장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온 것을 깨달았다.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힘이 빠져야 정상일 도끼창이 처음과 다름없이 강맹하게 날아들었다. 한쪽 어깨가 후벼 파인 자가 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함정이었나!’

그의 짐작은 정확했다. 살리오 바마낙의 각인은 순간적으로 불사에 가까운 생명력을 부여하는, 좀처럼 보기 힘든 특수하고 희귀한 것이었다. 그는 그 능력을 믿고 의도적으로 틈을 보였다. 그리고 상대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리할 것을 예상하고 함정을 파둔 것이었다.

전력을 쏟아내면 그 후에는 일시적으로나마 탈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 순간을 노린다면, 아무리 무딘 칼이라도 치명적인 일격을 성공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살리오 바마낙이 준비한 단 한 번의 반격이었다.

그의 계획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자신의 능력을 알고, 상대의 실력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를 간과했다.

내게 상대가 예측할 수 없는 수단이 있다면, 상대도 그럴 수 있다는 것.

“후욱!”

시온 포트락의 눈에 핏발이 서고,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밀려나던 검이 허공에서 멈추고, 튕겨날 때보다 훨씬 빠르게 재차 떨어져 내렸다.

콰직!

검날에 부딪힌 창대가 박살났다. 그러고도 힘이 남은 검은 그대로 살리오 바마낙의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왼쪽 복부까지를 깊게 갈랐다.

“커헉…!”

살리오 바마낙의 부릅뜬 눈이 크게 떨렸다. 경악. 불신. 그는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아.”

핏방울 몇 개가 얼굴에 튀고서야, 시온 포트락은 억눌렀던 숨을 토했다. 그의 숨결은 최고조로 타오르는 불처럼 뜨거웠다.

‘더는 떠들어대지 못하겠군.’

마무리를 짓기 위해 움직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감정은 들끓고 있었다. 다만 머리를 차갑게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삭였을 뿐. 일찍 힘을 끌어쓴 데도 사감은 섞이지 않았다. 하지만 위태롭게 헐떡이는 적장의 모습이 보기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죽어라.’

말을 몰며 검을 휘둘렀다. 제대로 된 힘은 실리지 않았으나 반 시체가 된 적장을 베기에는 충분했다.

팅!

하지만 소리 없이 날아온 화살 한 대에, 검은 본래의 궤적을 이탈하여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시온 포트락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재차 검을 휘둘렀으나, 이번에는 그새 약간이나마 회복한 적장이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쓸데없이 질기구나!”

이를 간 시온 포트락이 재차 달려들었지만, 이번에는 화살이 한 대가 아니라 대여섯 대가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어지간하면 무시할 수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이 머리와 목, 그리고 말머리를 향한 터라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꼴이 말이 아니십니다 그려!”

경박한 목소리. 상관에게 하는 말치고는 너무 가볍다. 그렇다면 저 녀석 역시 장수인가? 하지만 장수라고 하기에는 뭔가……. 시온 포트락이 물에 젖은(실제로 젖기도 했지만) 생쥐 꼴의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난 적 지휘관을 노려보았다.

“그래. 애송이 포트락이로군. 한눈에 알아보겠어.”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같이 어떻게 입을 놀리자고 맞추기라도 했나? 아무래도 입을 찢어줘야 할 놈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았다.

‘상관없지.’

아직 적 본대가 다 건너온 것은 아니다. 유난히 발이 빠르거나, 공명심에 불타는 지휘관을 둔 일부 병력이 먼저 건너온 것뿐.

그렇다면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마침 본격적으로 들끓기 시작한 참이었으니, 오히려 잘 됐다.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대신, 시온 포트락은 호흡을 가다듬기 무섭게 검으로 답을 대신했다. 기다리고 있었던 듯, 두 명의 적장도 굳은 얼굴로 그와 맞섰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