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8화
땅이 뒤집히고 강이 범람했다. 미친 듯 춤추는 강에서 없던 줄기가 수도 없이 뻗어 나갔다.
본래 한줄기로 흐르던 강물이 한순간에 수십 갈래로 쪼개지니 자연히 수위가 낮아졌다. 어둠 속에서도 그 광경을 대낮처럼 훤히 볼 수 있었던 군터는 본래 보이지 않던 강 속의 돌부리 같은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을 확인했다.
“지금이다.”
“장군! 말들이 아직…….”
살리오 바마낙이 당황하며 외쳤다. 법보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땅의 진동은 멎어가고 있었지만 예민한 짐승인 말은, 훈련된 군마들이었음에도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늦는다.”
군터의 옆에 있는 말은 선 채로 잠든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얌전했다. 주변이 이렇게 어수선한데도 어찌 이렇게까지 침착할 수 있을까. 살리오 바마낙은 그 부분에 대해 감탄보다는 위화감을 느꼈다.
정상적이지 않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주변에서 들려오던 시끄러운 말의 울음소리들이 점점 잦아들었다.
‘이건…….’
고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고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말이 안 되지만, 다른 표현을 떠올릴 수가 없다. 이 기이한 공기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는 명확하다.
“지금부터는 속도전이다.”
군터가 말에 올랐다. 살리오 바마낙이 멍하니 그 모습을 눈으로 쫓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크렘보르 장군께서는 말수가 적으신 편입니다. 전장에서는 특히 더 그렇지요.”
시어문드가 붙임성 좋게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와 주의를 끌었다. 그러는 사이 군터는 이미 멀찍이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일단은 말씀대로 따르시지요. 준비도 필요 없습니다. 일단 어떻게든 따르다 보면 알아서 다 풀릴 테니.”
“무슨 그런 대책 없는…….”
“아군의 상황만 보지 말고 적의 상황도 함께 보십시오. 매 전투를 만전으로 치를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건 아군이 얼마나 준비되었느냐가 아니라.”
“알고 있으니 가르치는 어투는 자제하지.”
“송구합니다.”
날 선 답을 들었음에도 시어문드는 아무렇지 않게 싱긋 웃었다. 그 모습이 썩 달갑지 않아, 살리오 바마낙은 혀를 차며 돌아섰다.
“공격을 준비하라!”
언제 당황하고 망설였냐는 듯이 당당히 명령을 내리는 그를 보며, 시어문드는 다시 한번 소리 없이 웃었다.
‘고지식하기는. 아니지. 순진한 건가?’
전란 이전까지 타라냐드는 평화로웠다고 알고 있다. 멕시스 가문의 지배력이 확고하게 뿌리내린 곳인 만큼 그들이 유지하는 질서가 흔들릴 일은 없었으리라. 그리고 전란 이후로도 긴장감은 돌았을지언정 실질적인 군사 충돌이 일어난 적은 그가 알기로는 없었다. 즉, 고작해야 서른 후반에 불과한 살리오 바마낙이 실전다운 실전을 겪은 적은 없다는 것.
그래서인지, 그의 전술관(觀)은 좋게 말해 정석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융통성이 없이 꽉 막혀 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하는데, 어떤 상황에서든 정성적으로만 판단하고 결정하려 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군이 준비가 안 된 이상으로 적이 준비가 안 됐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헛소리나 하고 있지 않나.
‘항상 그렇지만, 이번에도 뒤처리는 내 몫이란 말이지.’
익숙하지만, 역시 피곤한 일이다. 시어문드는 놀랍도록 얌전해진 말의 고삐를 쥐고 걸음을 옮겼다. 어설프게나마 전열을 갖춘 군대가 막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 * *
4군단에서 가장 먼저 이상을 느낀 것은 시온 포트락이었다. 불편한 심기를 애써 가라앉히며 얕게 눈을 붙이던 그는 심상치 않다는 말로도 표현하지 못할, 어마어마한 힘의 파동을 느끼고 번쩍 눈을 떴다.
그가 황급히 막사를 뛰쳐 나왔을 때, 거대한 힘은 이미 땅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 지축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쿠구구!
강렬한 진동. 시온 포트락의 순간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으악!”
“지, 지진인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허둥대는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아예 쓰러지는 이들도 있었다. 시온 포트락은 공들여 세운 목책이 기울거나 내려앉는 것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진? 아니. 그럴 리 없지.’
그를 잠에서 깨운 강대한 기운. 그 기운은 분명 땅으로 스며들었다. 이 흔들림 역시 그와 관련이 있을 터.
‘공격이다.’
직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군을 혼란에 빠뜨리고 야습을 가하려는 속셈일 터. 그러니 빨리 대응을 해야…….
“자, 장군! 강이!”
그러나 거기까지 추측하고 움직이려던 시온 포트락도, 수하의 다급한 눈길을 쫓았을 때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런!”
강이 뒤집혔다. 그것도 뒤집힌 정도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적습이다!”
“예, 예?!”
“적이 공격해올 것이다! 속히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 병사들을 소집해!”
지금 당장은 크게 넘치고 있는 강물에 눈이 가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이후다. 시온 포트락은 이제껏 적이 입으로만 떠들어댈 뿐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 오직 양 군대 사이에 놓인 강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렇게 강물이 크게 흘러나오게 되면 적은 필시 도강을 시도할 터.
‘처음부터 그것을 노렸겠지.’
혼란스러움에 굳었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급할 때일수록 더 생각할 것. 가슴 깊이 새긴 부친의 가르침이었다.
“군단장을 모셔라. 당장!”
자신 혼자 바쁘게 움직여봐야 소용이 없다. 군단장인 보로겐 콘실리에가 사태를 파악하고 주도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아니면 그에게서 전권을 부여받고 자신이 직접 군을 이끌거나.
사태가 급박하나 그 정도 시간은 있을 것이다. 시온 포트락은 그리 생각했다.
크나큰 착각이었다.
“장군! 적이 도강하려 합니다!”
감시탑 꼭대기에서 자리를 지키던 병사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시온 포트락은 병사가 밀려오는 강물과 적을 혼동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런!”
밀려오는 강물 위에서, 아니 강물과 함께 다가오는 적의 군세.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터무니없는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시온 포트락은 다급히 얼마 안 되는 인근의 병력을 끌어모았다.
* * *
하나로 똘똘 뭉쳐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수위가 대폭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강물은 거셌고, 무엇보다 예측할 수 없이 흐르고 있었다. 군터는 대략적으로나마 수심이 얕고 지면이 굴곡지지 않아 보이는 곳을 분간할 수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가 이끄는 병력은 고작해야 천 가량. 나머지는 조금씩 흩어져 조심스럽게 뒤따르거나, 강물이 좀 더 넓게 퍼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큰 피해를 줘야겠다는 생각은 없다. 목표는 어디까지나 적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 그를 위해서 최대한 요란스럽게 적을 흔들 필요가 있었다.
뿌-우우!
굵은 호각소리가 세찬 강물 소리에 섞여든다. 적진이 한바탕 뒤집힌 것이 느껴졌다.
“바마낙 장군 쪽도 시작한 모양입니다.”
살리오 바마낙.
그와 나눈 대화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군터는 그에게서 어리숙하다는 것 외에는 뚜렷한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가 알아보지 못한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이번 전투에서는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그는 서전부터 나서겠노라고 자원했다. 아마 타라냐드군의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듯했다. 뭐, 나쁠 것은 없었다. 더 열심히 싸워주겠다면야 좋은 일이지 않은가.
“장군! 적이 움직입니다!”
그야말로 천재지변. 든든한 방패요 성벽이라고 생각했던 강이 한순간에 뒤집히게 되면 적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밤의 어둠까지 더해졌으니 한동안은 옴짝달싹하지 못하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적의 반응이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군터는 고개를 돌려 움직인다는 적을 확인했다.
‘얼마 되지 않는군.’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수백 정도. 수만의 군대 가운데 수백이라면 장수 하나의 직속 부대 정도일 것이다. 겁 없고 판단력이 뛰어난 적장 하나의 돌출 행동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
“무시한다.”
적이 향하는 방향은 살리오 바마낙 쪽이다. 만약 살리오 바마낙이 막힌다면 첫 단추가 좀 답답하게 끼워지게 되겠지만, 그렇다 해도 알 바는 아니었다. 각자가 할 일을 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수만이 부딪치는 전장에서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는 없다.
* * *
“장군! 적이!”
살리오 바마낙은 눈을 좁혀 뜨며 어둠 속에서 적을 알아보려 노력했다.
‘빠르군.’
이런 난리 속에서도 무섭도록 빠르고 정확하다. 이미 도강을 마친 선봉이 아니라 뒤따라 건너는 이쪽을 노리는 판단. 필시 적장은 이름난 자일 것이다. 여느 때라면 그런 자와 맞서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모여라! 적이 온다!”
수심이 옅어졌다지만 배도 없이 강을 건너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한두 번 정도는 말의 가슴 높이 정도까지 물이 차올라, 이대로 휩쓸려가는 것은 아닌가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렇게 한바탕 진을 빼고 여기까지 다다랐는데, 이 상태로 곧장 적을 맞는다?
‘굳이 싸움에 응할 필요는 없지.’
강의 수위는 점점 낮아지고 있고, 아군은 계속해서 뒤따라 당도할 것이다. 이 전투는 속도전이라는 것을 몇 번이나 강조한 만큼, 그들도 최대한 서두를 터. 그러니 곧 당도할 아군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쓸어버려라!”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드러냈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그들의 존재와 접근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니. 그 모습을 분간할 수 있게 됐다는 쪽이 더 어울리리라.
‘저자는…….’
가장 앞에서 기세 좋게 말을 달리는 적장. 투구에 일부 가리기는 했으나 드러난 얼굴은 상당히 젊다. 살리오 바마낙의 머릿속에 어떤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쯧! 운이 별로군.’
짐작이 맞다면, 가장 까다로운 상대가 나타난 셈. 살리오 바마낙은 혀를 차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거 시작부터 운이 너무 좋구나! 비록 여물지 못했다고는 해도 포트락의 목이라니!”
“이 목소리……. 너 이놈!”
짐작이 맞았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젊은 포트락은 귀뿐만 아니라 기억력도 상당히 좋은 듯했다. 안 그래도 날카롭던 기세가 광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사납게 변했다.
* * *
“발을 늦추지 마라!”
병사들은 장교들의 독촉에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무릎 높이까지 내려간 강은 더이상 위협적인 장애물이 되지 못했지만, 어둠 속에서 차가운 강물에 발을 담가야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찝찝했다.
“아악!”
앞서가는 동료의 뒤를 따르던 병사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거나, 부드러운 흙을 잘못 밟아서 발이 빠진 것일 거다.
“뭐 하는 거냐, 이 멍청한 놈들! 발이 빠진 녀석이 있으면 일으켜 세워주면 될 것 아니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드리안이 버럭 소리쳤다.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군터와 함께 움직이거나, 그게 아니라도 기병을 이끌고 시원하게 달리고 싶었는데 현실은 제 몸뚱이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녀석들을 챙기고 있어야 했다. 애새끼들을 돌보는 보모처럼 말이다.
“움직여! 발을 멈추지 말란 말이다!”
아드리안의 노성이 개천처럼 변한 강의 한가운데서 메아리쳤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