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7화
“싸움을 걸어올 때는 언제고, 이제 와 강 건너에서 뒷짐만 지고 있는가! 민가를 불태울 악독함은 있으면서 군대와 일전을 벌일 배짱은 없는 것인가! 포트락이라는 이름이 우는구나! 다른 씨에서 난 포트락이라던 말이 사실이었는가!”
살리오 바마낙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힘을 잔뜩 준 그의 목소리는 강 건너에까지 닿았다.
“대단하군.”
시어문드가 헛웃음을 머금었다.
중의적인 말이었다. 살리오 바마낙의 목청이 대단한 것 하나. 저런 노골적이고, 천박하기까지 한 도발적 언사를 당당한 귀족 무장인 그가 거리낌 없이 행하고 있음에 또 하나.
거침없는 성정으로 유명하다더니, 이건 거침없는 정도가 아니라 무식하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아니. 아니지.’
저게 정말 저자 혼자만의 생각일까? 그럴 리 없다.
귀족들은 하나같이 명분과 체면을 중시한다. 그것이 바로 멕시스와 티브리악이 조용한 이유일 터.
주인이 체면, 혹은 다른 이유로 직접 움직이지 못할 때 움직이는 것이 그의 손발이다. 그렇다면 살리오 바마낙이 저렇게 나서는 것도 주인을 대리하는 것이 아니겠나.
‘세상 모든 일이 한 꺼풀만 까보면 다르지 않다더니.’
걸린 것의 크기가 다를 뿐, 골목 싸움과 군대의 싸움이 다르지 않다. 어떻게든 상대를 도발하고, 기만하고, 그럼으로써 승리한다. 고대부터 이어진 절대적인 승리의 공식이건만, 그놈의 체면이 뭔지 대장들은 근엄하게 앉아 헛기침이나 하고 있다. 뒤로는 열심히 ‘손발’을 휘둘러대면서 말이다.
“통할까?”
아드리안이 물었다.
“글쎄.”
“노골적이지만, 꽤나 수위가 높아. 콧대 높은 귀족, 그것도 젊은 무장이 참기는 쉽지 않겠지.”
“아비에게 배운 게 있다면 그래도 꾹 눌러 참지 않겠나.”
“그럼 소용없으리라는 건가?”
“그렇지는 않을 걸세.”
시어문드가 비릿하게 웃었다.
살리오 바마낙은 이제 제국의 영웅까지 대놓고 들먹이며 열심히 도발하고 있었다. 아드리안의 말처럼 너무 노골적인 도발이다. 머리가 있다면 귀를 솜으로 틀어막는 한이 있어도 꾹 참으려 들겠지만, 글쎄.
* * *
“…….”
시온 포트락은 눈을 감고 있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가 있는 군막에 이르러 잠잠해졌지만, 그래도 그 내용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시선이 느껴졌다. 그를 바라보는 이들. 그중에는 상석에 앉은 보로겐 콘실리에도 있었다. 굳이 눈을 마주하지 않아도 그의 복잡한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시온 포트락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간간이 팔짱을 낀 두 팔이 경련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으나 그뿐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후우.’
보로겐 콘실리에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발끈해서 날뛰라기라도 한다면 어떻게든 다독이련만, 저렇게 가만히 눈만 감고 있으니 오히려 이쪽에서 속이 탔다. 보는 사람이 속이 불편해지는 저 인내가 무언의 시위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포트락만 아니었더라도.’
쥬드 포트락이라는 이름은 너무나 무겁다. 제국의 장졸들에게 그 이름은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우러러볼 수 있는 하나의 상징과 같았다. 그 자신의 능력과 업적에 더해, 조정에서 심혈을 기울여 띄워준 결과물. 어쩌면 앞으로 다시 없을지도 모를 걸작. 그 거대한 그림자는 여전히 군영에 짙게 드리우고 있다.
기세를 올릴 때는 좋았다. 시온 포트락은 부친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용맹하게 싸우면서도 상관인 자신의 비위를 거스르려 들지 않았다. 나설 때는 나서고 숙일 때는 숙이는 모습은 이상적인 젊은 무장의 태도 그 자체였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변하고 나니 모든 것이 달라졌다. 용감하지만 겸손했던 젊은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하는 골치 아픈 핏덩이 하나가 남았을 뿐이다.
“괴롭겠지만, 참으시게.”
“…부단히 노력 중입니다.”
씹어뱉듯 나온 말에 보로겐 콘실리에는 낮게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어갔다. 하필 회의를 소집했을 때 저렇게 설쳐댈 게 뭐란 말인가. 운이 없어도 너무 없다…고 투덜대고 싶지만,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이제 막 시작한 저 ‘짓거리’는 한동안 계속되리라는 것을.
“싸우려면 싸우고, 달아날 거라면 달아나라! 강물이 언제까지 네놈들을 지켜줄 것 같으냐!”
아니나 다를까. 그날부터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말 그대로 시도 때도 없이 유치하고 지독한 도발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는 시온 포트락을 향한 것이었다.
보로겐 콘실리에는 이 노골적인 도발이 시온 포트락뿐 아니라 자신 역시 겨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유치하지만 효과적이군.’
휘하의 젊은 무장을 욕보이고, 나아가 그 부친이자 제국의 영웅인 쥬드 포트락의 이름까지 더럽히고 있음에도 지휘관으로서 손을 놓고 있다. 이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병사들의 마음이 어떠할까.
사실이 어떠한지는 중요치 않다.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이대로 대치한 채 시간을 보내기만 해도 이득을 취할 수 있는데, 점점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정작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쪽은 나였군.’
보로겐 콘실리에는 자신이 아주 오랜만에 시험대에 올랐음을 직감했다. 여기서 뚝심 있게 버티느냐 휘둘리느냐에 따라 작게는 자신의 운명이, 크게는 전쟁의 향방이 바뀔 것이다.
“원신께서 언제까지 너희 얼간이들을 굽어살피시리라 보느냐! 곧 그분께서 뜻을 비추시면 이 땅에 네놈들이 설 자리는 사라질 것이다!”
그는 저 멀리서 작게 들려오는 일장연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어디 마음껏 짖어보아라.’
보로겐 콘실리에는 자신의 무용도, 지모도 어디 내세울 정도는 아니라고 자평했으나 그래도 인내심 하나만큼은 상당한 수준이라 자부했다. 지금이야말로 그 자부심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할 때였다.
* * *
“흠흠! 장군.”
살리오 바마낙은 먼지가 낀 것처럼 텁텁한 목을 가다듬으며 상대를 불렀다. 그러자 상대는 몸도 돌리지 않고 고개만 까딱였다.
오만하기 짝이 없다. 그는 어디 가서도, 누구에게도 이런 취급을 당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분노해야 하건만, 이상하게도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왜일까? 이 오만함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아니면 그저 곁에 선 것만으로도 위축되는 분위기 때문에? 살리오 바마낙은 순간 이유를 짚어보다가 곧 포기했다. 상대는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고, 그는 본론을 꺼내야 했다.
“법보가 준비되었습니다.”
“바로 사용 가능한가?”
“온전히 힘을 발휘하기 위해 한나절 정도의 시간은 필요합니다. 더 서두르려면 서둘 수는 있지만, 그러면 제 위력이 나오지 않는다더군요.”
“그대도 법보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는 모양이군.”
“제가 알기로, 전쟁 당시에도 단 두 번 사용됐던 것이 끝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도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지요.”
법보는 법구와 달리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다. 그것이 지닌 힘 때문이기도 했고, 중요성 때문이기도 했다. 법구는 도구로, 법보는 보물로 불리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도구는 용처에 맞게 쓰면 그만이나, 보물은 그럴 수 없다.
“성능은 확실한 건가?”
“기록이 과장되지 않았다면, 아니 다소 과장되었더라도 작전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기대하지.”
대낮이다. 하늘 가운데 걸린 해가 따스함을 한껏 뽐내고 있건만, 살리오 바마낙은 그 빛을 쬐면서도 서늘함을 느꼈다. 상대가 짤막하게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오싹한 무언가가 기감을 간질였다.
‘이것이 초월자인가.’
단언컨대 이제껏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존재감이다. 외지의 신흥 귀족이 군대를 통솔한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던 자들도 이 자와 일대일로 마주하게 된다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고분고분해지리라.
실력 이전에, 이 자에게는 사람 같지 않은 면모가 있었다. 위력적이다 못해 신비롭게까지 느껴지는 이 분위기는 함께 하는 이로 하여금 묘한 믿음을 품게 했다.
“오늘 밤. 제장들을 소집하겠다.”
“저희 쪽 인사들에게는 제가 전달하지요.”
* * *
자이드라 멕시스는 그의 호의를(설령 목적이 뚜렷한 호의일지라도) 확실하게 내비쳤다. 그가 움직인 그 날부터 타라냐드의 군관들은 군터의 명령에 두말하지 않고 따랐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타라냐드의 군대에 미치는 절대적인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요청하지 않은 도움까지 선뜻 베풀었다.
법보 발라흐 나크믹. ‘거인의 숨결’이라는 이명을 지닌 보물.
이름만 들었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으나, 그것이 지닌 힘에 대해서 듣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 법보를 내미는 자이드라 멕시스의 군사적 안목과 순발력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예견했었는지도 모른다.
“법보가 힘을 발휘하기 직전에, 적은 반드시 알아차릴 것입니다.”
“상관없다.”
법보, 발라흐 나크믹은 사람 머리 크기의 그릇 같은 형태였다. 짙은 갈색의 외형은 나무 그릇 같기도 했으나, 자세히 보면 나무와는 전혀 다른 재질임을 알 수 있었다. 금속도, 돌도 아닌 뭔지 모를 재질. 아마도 이름 모를 것의 뼈를 갈아 만든.
이 물건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에 깃든 힘은 아직도 강대했다. 본격적으로 들끓기 전이었음에도 그 강력함이 느껴졌다.
‘위태롭군.’
너무나 강력한 힘. 뭔지 모를 재질의 그릇조차도 그 거대한 힘을 담아두기에는 부족했다. 표면에 난 자그마한 실금들은 감당하지 못할 힘을 담은 대가일 것이다. 군터는 몇 번 정도 더 힘을 발휘했다가는 그릇이 버티지 못할 것을 알아보았다.
보면 볼수록 흥미로웠다. 이 그릇에 담긴 힘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거인의 숨결이라고? 그렇다면 정말 신화와 전설 속에나 등장하는 그 거인의 힘이 담겨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대체 그들은 얼마나 강대한 존재였단 말인가. 이렇게나 오래된 힘의 파편조차도 이처럼 강력하다면…….
짧은 상념은 갈색 그릇이 진동하기 시작하면서 끝이 났다. 그릇이 떨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둘러앉은 술사들이 뿌린 피가 은은한 빛을 발하며 점점이 사라져갔다.
쿵!
허공을 부유하던 갈색 그릇이 한순간 추락했다. 땅을 반쯤 파고들 정도로 강하게 내려앉은 그것은 흙과 닿자마자 본격적으로 힘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쩌적!
반쯤 땅을 파고든 법보를 중심으로 땅에 균열이 번져갔다.
거세면서도 은은한 무형의 파동이 물결처럼 일어났다. 그 힘의 움직임을 읽어가던 군터는 어째서 이 법보에 거인의 숨결이라는 이명이 붙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산처럼 거대한 거인이 크게 숨을 토한다. 그의 입에서 처음 흘러나왔을 때는 미풍에 불과했던 바람이 아래로 내려올수록 덩치를 키우다가, 완전히 내려오면서 태풍이 되어 대지를 휩쓴다.
콰쾅!
수십, 수백 마리의 거대한 뱀이 땅을 뒤엎었다. 길게 이어진 울퉁불퉁한 선들은 곧 강가까지 이르렀다.
* * *
“뭐냐?!”
보로겐 콘실리에가 막사 밖으로 뛰쳐나왔다. 갑옷도 못 걸친 채 검 한 자루만 달랑 들고 달려 나온 그는 굉음이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캄캄한 어둠 속. 무언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게 무엇인지 살피기 위해 그는 한껏 눈을 좁혀 떴다.
“저…저…!”
난잡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던 그것의 정체는 물, 강물이었다. 즉, 강이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아니. 설마?’
높이 솟았던 물결이 내려앉는 것과 동시에, 보로겐 콘실리에의 마음도 쿵! 하고 내려앉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