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6화
보로겐 콘실리에의 4군단이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전황이 소강상태를 맞이했다고 하나 타라냐드 전역을 뒤덮은 긴장감은 여전했다.
그런 상황에서,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멕시스의 본대가 주둔한 올도르에 직접 걸음했다.
“경계가 삼엄합니다.”
본래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도시였던 올도르는 현재 오천에 육박하는 군대가 상시주둔하는 군사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본래 모습이 어땠는지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변해버린 이 도시는 외부인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경직되어 있었다. 그것이 성벽 위는 물론, 도시 내 곳곳에서 보이는 병사들 때문인지 아니면 이곳에 앓아누워있는 타라냐드의 주인 때문인지는 몰라도.
“가자.”
그가 예고도 없이 들이다시피 한 탓에, 올도르에 있던 고위 인사들이 마중 나오는 것이 늦었다. 그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각하. 어인 일로 이렇게 직접…….”
“멕시스 공과 급히 나눌 말이 있어서 말이네.”
“예? 하오나…….”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하지만 멕시스 공도 동의한 일이니 경우가 없다고 타박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입만 뻐끔거리는 사내에게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배짱은 없으리라.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지금 바마낙 장군이 와 있습니다. 그가 각하에게 무례하게 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되도록…….”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걸음이 잠시 느려졌다. 사내가 말한 ‘바마낙 장군’이 누군지 떠올린 그의 눈매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살리오 바마낙. 멕시스가 타라냐드에 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멕시스를 섬겨온 가신 가문으로, 당대 가주인 살리오 바마낙은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였다. 그레서 그런지 때때로 급하고 과격한 모습을 보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직접 좋은 말로 타이르곤 했다. 그 모습은 얼핏 보면 그저 윗사람이 수하의 잘못을 타이르는 것 같았지만, 생각이 깊은 이들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살리오 바마낙이 정말 제 성질을 못 이겨 급하고 난폭하게 구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렸을 적부터 귀족으로서의 교육을 받아왔으며 결국 가문의 대까지 이어받은 그가 자기 성질 하나 주체못하는 얼간이일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그런 얼간이를, 오랫동안 충성을 바쳐온 가신 가문이라고는 하지만 그 자이드라 멕시스가 곁에 두고 중용할 가능성은?
‘멕시스의 사냥개.’
이 모든 것을 고려하고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내린 결론은, 살리오 바마낙이 멕시스의 충실한 사냥개라는 것이었다. 주인이 원할 때 미친개처럼 짖고, 맹수처럼 달려가 물어뜯는 충직한 사냥개.
‘본인도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있나 보군.’
사람은 위태로운 지경에 몰릴수록 불안해하며, 불안할수록 믿을 수 있는 자를 곁에 두려 한다. 자신이 약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티브리악 각하.”
예상했던 대로,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곧 굳은 얼굴의 무장과 맞닥뜨렸다. 무장다운 건장한 체구. 감정을 비치지 않는 깊은 눈. 실내에서도 전장의 한복판인 것처럼 무장하고 있는 사내.
“멕시스 공은 안에 계신가.”
“예.”
“이야기는 들었겠지?”
“예. 하지만 조금 기다리셔야겠습니다.”
사전에 약속까지 하고 왔건만 기다리라니. 그러나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불쾌해하는 대신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하루에 얼마나 깨어계시는가.”
“불규칙적입니다. 어느 날은 다 털고 일어나셨는가 싶다가도, 어느 날은 종일 주무시기도 합니다.”
“으음.”
그들이 짧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하얀 법복을 입은 사제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문을 열고 나왔다.
“바마낙 장군. 이분은?”
“멀리서 오신 손님이오. 각하께서는?”
“곧 깨어나실 겁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 절대 무리하셔서는 안 됩니다. 피로를 느끼신다면 곧장 쉬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이오. 고생하셨소.”
사제가 물러가고, 살리오 바마낙과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그러다 잠시 후. 문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시게.”
* * *
몽롱하다. 눈을 감고, 그 몽롱함에 더 취하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다. 그 본능적인 욕구를 이겨내는 것은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자이드라 멕시스는 그의 평생 그러한 본능과 욕구를 눌러온 사내였다. 몸뚱이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기 힘든 지금도 그의 정신은 굳건함을 잃지 않았다.
“드시게.”
사제가 인위적으로 그를 깨웠을 때부터, 자이드라 멕시스는 바깥에 손님이 당도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절대안정을 외치던 사제가 휴식이 필요한 늙은이를 구태여 깨우지 않았을 테니.
“멕시스 공. 힘드실 때 찾아와 면목이 없습니다.”
“무슨 그런 말을. 내가 청한 손님이 아니신가. 몸이 이래서 제대로 맞이하지 못하는 점을 양해해주시구려.”
자이드라 멕시스가 흐릿하게 웃으며 느릿하게 팔을 뻗었다. 지금의 그에게는 그 가벼운 몸짓조차 힘겨워 보였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썩 좋지는 않지만, 좋아지고 있네.”
두 사람의 신분과 지위는 실질적으로 동등하다고 봐야 하지만,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직접적인 첫 만남 이전, 그러니까 서신과 사람을 통해 의견을 주고받던 때부터 자이드라 멕시스를 어른이자 선배로서 대우했다. 덕분에 자칫 긴장과 눈치싸움이 벌어질 수 있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제껏 부드럽게 유지되어왔다.
“중요한 때 이런 꼴이라니. 면목이 없소.”
“시련이란 늘 예기치 않은 때에 찾아오는 법이지요. 그러니 시련이 아니겠습니까. 괘념치 마십시오.”
“난 세월이 흘러가고 있음을 늘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그 흐름에서 한 발자국 정도는 빗겨 서 있다고 생각해왔던 모양이오. 이 몸이 예전의 그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게지.”
자이드라 멕시스가 주름진 손을 두어 번 느릿하게 쥐었다 폈다. 한때는 무엇이든 쥘 수 있을 것 같았던 손이건만, 이제는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일시적으로 기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이라고 자위하고 싶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그가 더 잘 알았다.
“시시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군. 그래. 무슨 일이오? 혹 군권 문제 때문인가?”
“아닙니다. 멕시스 공께서 조치를 해주신 덕에 그쪽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비밀스러운 일에 대해 알게 돼서 말이지요.”
“비밀스러운 일?”
“크렘보르 장군에 대한 것입니다.”
다소 흐려져 있던 자이드라 멕시스의 눈빛이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날카로움을 되찾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무겁게 가라앉아있던 실내의 공기마저 달라진 것 같았다.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여럿 있지 않았습니까.”
“…….”
“아무래도, 공께서도 짐작하시는 모양입니다.”
“같은 의문을 품은 적은 있소.”
“그렇다면?”
자이드라 멕시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종종, 풀지 말아야 할 의문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지.”
“현명하시군요.”
“별로 대단할 것 없소. 나이를 먹으면서 겁만 많아진 것뿐이니까. 어쨌거나,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니 티브리악 공은 뭔가 알게 된 모양이군. 그렇지 않소?”
“그렇습니다.”
“무엇을 알게 된 거요?”
“황제와 교단의 거짓말. 명맥이 끊겼다고 알려진 초월의 길.”
자이드라 멕시스의 등이 펴졌다. 착각이 아니었다. 병색이 완연한 노인이 금방이라도 침상을 뛰쳐나올 것처럼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확실한 것인가?”
“당사자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니나, 예. 저는 확실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
“구미가 당기시는 모양입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확신했다. 흔들리는 노인의 눈은 그 확신에 힘을 더해주었지만, 그런 눈에 보이는 반응이 아니더라도 그는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같은 길을 가더라도 무거운 짐을 진 채 헐떡이는 이에게는 고행일 것이요, 힘겨움 없이 느긋하게 걷는 이에게는 즐거운 여행일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 하루하루를 걱정하며 늙어간 이에게 삶의 끝은 후련함일 테지만 평생을 즐거움, 혹은 도전과 성취로 이어온 이에게 생의 끝이란 미련과 아쉬움. 혹은 두려움일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자이드라 멕시스는 명백히 후자다. 그는 초탈한 노인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욕심이 많고, 그렇기에 덩달아 두려움도 많은 야욕의 노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자이드라 멕시스가 헤이모라에 비밀스럽게 똬리를 튼 줄카와 어떤 식으로든 접촉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필시 용혈을 얻어 죽음을 피하고자 했을 것이다. 삶의 연장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치러야 할지는 일단 접어둔 채로.
“흥미롭군. 아주 흥미로워. 그런데, 자네는 내게 무엇을 바라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저는 우리가 맞닥뜨린 어려움을 타파하고자 할 뿐입니다.”
“내가 더 나서주기를 바라는 건가.”
“공께서 성의를 보이시는 만큼, 그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도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더 좋은 분위기에서 거래를 논할 수 있겠지요.”
“…….”
자이드라 멕시스는 침묵했다. 그러나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그의 침묵이 고민을 내포하지 않음을 알았다. 지금의 침묵은, 말하자면 습관 같은 것일 터다. 그가 할 수 있는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 * *
병석에 누워있던 자이드라 멕시스가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전면에 나섰다. 그는 휘하 무장들에게 ‘크렘보르 장군’이 말에 오를 수 없는 자신을 당분간 대신할 것이며, 그의 명령을 자신의 명령으로 여기고 따를 것을 명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적극적인 협조에, 군터는 자이드라 멕시스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시어문드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장군. 멕시스 총독이 너무 적극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의도가 있으리라 보느냐.”
“그렇지 않겠습니까? 듣자 하니 상태가 호전된 것도 아닌데 수하들을 소집했다고 합니다. 사제의 만류마저 뿌리치고 말이지요.”
“…….”
“티브리악 총독과 관련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공교롭습니다.”
시어문드는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했던 질문들에 대해 곧장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초월자라는 존재에 대해 강하게 집착하는 듯했다고 이야기했다.
“초월자의 특징 중 하나가 영생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알 것 같군.”
“복잡한 꿍꿍이보다는, 그저 장군의 호의를 사려는 듯합니다.”
그런 것인가.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자라도 죽음은 두려운 모양이지. 아니, 어쩌면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자이기에 더욱 두려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피할 방법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되면 더욱 그럴 테지.
“그렇다면 나쁠 것 없군.”
이전까지 타라냐드의 군관들이 특별히 반항적이었던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고분고분했던 것도 아니었다. 시어문드와 아드리안이 때때로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이드라 멕시스가 직접 나서서 교통정리를 했으니, 이제는 좀 나아질 터.
[착각하는 녀석들은 알아서 착각하게 두는 편이 좋아. 특별히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어떻게든 깨닫게 되니까.]
줄카가 흘리듯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었는데, 지금 와서 다시 떠올려보니 그 말이 참 적절하다 싶었다.
* * *
“장군. 다 되었습니다.”
시어문드가 올도르를 세 번째 방문하고서 돌아온 후,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적은 아직 움직임이 없습니다만.”
“오지 않는다면 이쪽이 나설 것이다.”
가장 좋은 그림은 적을 준비를 마친 아군의 앞으로 끌어오는 것이나, 군터는 그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먼저 나서기로 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