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5화
“글쎄요. 소관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의 대화에 익숙하지 않을 뿐, 시어문드는 어리석은 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어리석은 이라고 해도 눈치만 있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작스레 주제가 너무 뜬금없고 거창하지지 않았나.
시어문드는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어떠한 확신을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꺼냈으리라 짐작했다. 그리고 그 확신이란 아마도.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뭐하지만, 나는 고귀한 가문에서 나고 자랐네. 덕분에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 접하지도 못할 세상의 온갖 비사들을 자연스럽게 들을 수 있었네.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제대로 된 초월자는 만나지 못했어. 만약 총독직을 조금 더 일찍 물려받았더라면 황도에 가 황제를 뵐 수도 있었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리되지는 않았지.”
시어문드의 표정이 굳었다. 덩달아 경직되는 분위기 속에서,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조용히 몸을 뒤로 기댔다. 그는 염려하지 말라는 듯 옅은 웃음을 지었다.
“방금까지는 짐작이었지. 그런데 이제는 확실히 알겠군. 내 짐작이 맞았어. 그렇지 않나?”
“듣고 싶은 것만 들으시는데, 제가 뭐라 말씀드린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시어문드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그의 무례를 모른 척 넘어 가주었다. 그로서는 충분히 불쾌해할 만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군가의 주사위가 되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세상사가 대부분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본인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착각하곤 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커다란 흐름, 혹은 의지에 휩쓸리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황제가 계시지 않는 이 시대에 새로운 초월자라니. 놀라워. 내 머리로는 받아들였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불신이 남아있다네.”
시어문드는 이제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늘어놓는지 들어나 보겠다는 듯, 계속해서 무례한 태도를 견지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그 또한 개의치 않고 넘어갔다.
“한때, 그러니까 황제께서 스스로 원신의 사도라 칭하시며 그분의 권속들을 세우셨지. 그들이 오늘날의 군주들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 믿네. 아무튼, 외관은 분명 사람과 별다르지 않은데 지닌 힘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던 그들은 당시 초인이라 불리던 구도자들과도 현격한 차이가 있었지. 하여 그들은 초월자라는 별개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네. 즉, 초월자라는 이름은 오직 군주들에게만 허락된 이름이었다는 것이야.”
엄밀히 말하면 최초의 초월자는 황제였다. 그러나 군주들이 초월자라 불리기 시작한 후, 그는 자연히 별개의 존재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군주들을 초월자로 세운 것이 그였기 때문이다. 괜히 군주들을 황제의 권속이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에게 힘을 받기 전까지, 그들은 초월자가 아니었다.
후에 제국의 적들 가운데 특출한 자들이 초월자라 불리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비웃음만 살 뿐이었다.
“제국과 함께 몸집을 불린 교단은 군주들을 신성한 존재로 규정했고, 동시에 초월자에 대한 정보를 금기로 지정했다. 이성이 신성을 침범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거겠지. 무슨 말인지 이해했나?”
“뭘 말입니까.”
“전란이 시작된 이후로 교단이 줄곧 조용히 있었다지만, 그들의 위세는 여전히 제국 전역에 영향을 미치지. 어지간한 귀족 가문은 그들의 기침 한번에도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어. 그런 그들이, 그들이 인정하지 않은 초월자의 존재에 대해 어찌 반응하리라 생각하나?”
“제가 그것을 알아야 합니까?”
“물론 알아야지. 알아야 하고말고.”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뒤로 기울였던 몸을 앞으로 뺐다. 부드럽던 눈매는 어느새 칼집을 나온 칼처럼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평생을 제국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니 잘 모르겠지. 이해하네. 하지만 지금부터는 알아두게나. 그들은 자신들이 인정하지 않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배척해왔네. 이단이라는 이름 아래 쌓여온 죽음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자네는 상상도 하지 못해. 제국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교단의 지하 감옥에 빈자리가 난 적은 없을 걸세. 그리고 그 가득 찬 감옥에서 이단들이 죽어 나가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을 거야. 내 장담하지.”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잠시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골랐다.
“내가 자네를 불러놓고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까닭은, 자네의 주인에게 친구가 필요할 거라는 말을 해주기 위해서라네.”
“…….”
“내 말을 곡해하지 말게. 자네가 들은 것이 전부니까. 난 초월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고, 그러기 위해 자네에게 먼저 말을 꺼낸 거네.”
“어째서입니까.”
“초월자를 사람의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음을 아니까. 그들의 시선은 사람의 것과 다를 테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이익을 공유함으로써 성립될 수 있지만, 초월자는 어떨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네.”
“그래서 소관입니까?”
“그래. 자네는 크렘보르 장군과 오랫동안 함께해왔으니까. 자네라면 내게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 테지.”
그의 말을 믿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어문드의 표정은 처음보다 부드러워졌다.
“그 말씀을 믿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은 하나뿐입니다. 그분께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말씀하십시오. 각하께서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편이 괜한 오해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진실하게라.”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피식 웃었다.
진실하게 말하라고? 간단한 것처럼 말하지만 그게 가장 어렵다. 지금까지 가문에서 교육을 받으며, 여러 사람을 만나며 진실하게 속마음을 터놓은 적은 손에 꼽았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속마음을 숨겨야 한다고 배워왔고, 이제껏 그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랐다. 소위 귀족의 화법이라고 하는 것을 몸에 익혔으며, 거짓과 기만을 다루는 데도 능숙해졌다.
“그러지.”
이번에도 그랬다. 그는 복잡한 속내를 숨기며 흔쾌히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 * *
“…….”
카니악은 몇 걸음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투구 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이 장막처럼 드리운 어둠을 꿰뚫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하께서는?”
“전당에 계십니다.”
경계를 서던 병사가 짤막하게 답했다.
‘전당인가.’
편의상 전당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그곳이 정말 전당인지는 모른다. 다만 이곳의 다른 건축물에 비해 종교적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는 데다, 어딘지 모르게 ‘그런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기에 그리 이름 붙였을 뿐.
얼마 전부터, 줄카는 그 전당에서 머물고 있었다. 식사도, 물도 마시지 않고 그곳에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낸 지가 벌써 엿새째. 카니악은 슬슬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으나 그런 마음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기분 나쁜 곳이란 말이지.’
길게 뻗은 계단을 오르며, 카니악은 괜히 한번 몸을 털었다. 벌레가 몸을 기어오르는 것 같은 불쾌함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불쾌함에는 대개 이유가 있다. 형상이 혐오스럽다든지, 공기가 습하다든지, 아니면 다른 개인적인 사유가 있다든지, 어떤 식으로는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곳은 다르다. 카니악은 왜 자신이 이 거대한 건축물에서 불쾌함을 느끼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곳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에 대해 그의 주인에게 고하기도 했으나, 주인은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았다.
전당의 꼭대기.
널찍한 광장 같은 곳의 외각에 사람보다 머리 서너 개는 더 큰 크기의 석상 수십 개가 광장을 둘러싸듯 서 있었다. 저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양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에 이것들을 보았을 때 카니악은 하늘을 향해 기원하고 있는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신은 하늘에 있으니, 기도하는 사람을 표현한 상(像)은 대개 이런 모양이었다. 그러니 카니악의 추측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에는 이 수십 개의 석상이 처음과 달라 보였다. 그것들의 모습은 하늘에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아라얀이 느껴지지 않는다.]
머릿속에 퍼지는 울림. 카니악은 퍼뜩 고개를 들고 광장의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선 그의 주인을 보았다.
[사라졌다.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게 무슨 말인가. 아라얀이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있다. 위험한 임무였고, 어떤 식으로든 방해받을 수 있음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라졌다니?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왜냐하면, 아라얀에게는 용혈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게 가능합니까?”
이제는 아는 자가 드물지만, 용살자라는 이름은 줄카라는 이름보다 앞선 것이었다. 황제에게 줄카라는 이름을 받기 전, 그의 주인은 용을 죽였다. 그리고 쓰러진 용에게서 피를 취했으며, 초월자가 되었다.
용혈에 대해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그리고 그중, 진실을 아는 이는 단언컨대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드물 것이다.
[가능하지.]
용의 피를 받은 자들을 용아라 한다. 그렇게 알려져 있다. 용의 피를 받아 인간에서 벗어난 자들이라고.
하지만 틀렸다. 용아가 받은 것은 용의 피가 아니다. 더 정확하게는, 용아가 받은 용혈은 용의 피가 아니다. 용의 피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나서는군.]
줄카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카니악은 그것이 아라얀이 사라진 것과 관계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뭘 하고 있느냐 물었지.]
“예.”
[이곳은 고대의 흔적이다. 나는 이곳에서 그들의 마지막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지. 그들의 속삭임은 시간이 지날수록 뚜렷해졌다.]
* * *
언젠가, 그는 쿠엘단을 보며 조롱했었다. 어차피 목줄에 걸려 땅을 기어야 하는 처지에 하늘을 보고 별을 보면 무엇 하느냐면서.
그러자 쿠엘단은 마주 웃으며,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그때의 그는 그 대답이 한탄과 희망이 뒤섞인 자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망령들의 속삭임을 듣고 있으니,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다.
망령들의 속삭임. 그들의 원념은 시간이 지날수록 뚜렷해졌다. 웅얼대는 것 같았던 소리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해지고, 그 단계마저 지나자 이제는 소리를 넘어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의 기억. 혹은 그들이 품었던 생각과 마음의 형상화였다.
줄카는 종말을 보았다. 정확히는 이곳에 흔적을 남긴 고대인들. 그들이 보고, 느끼고, 떠올렸던 종말을.
하늘의 별들이 비가 되어 내렸다. 세상 밖에서 온 끔찍한 것들이 몸을 일으키고 세상을 뒤덮었다. 그러자 곧 상상하지 못한 형태의 온갖 죽음이 살아있는 모든 것을 휩쓸었다. 하나의 세상이 끝을 맞이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것이 실재했던 종말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닐지도 모른다.
이곳에 남은 것은 고대인의 원념.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며 흐릿해지고 뒤틀렸을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을 가능성도 있고.
두려움에 미쳐서 이 땅속에 이만한 미궁을, 도시를 만든 자들이다. 그 정도 집념을 품은 이들이라면 미쳤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겠나. 기어이 스스로 다 벗어던지고 사라진 그 녀석처럼 말이다.
[기다리다 지친 모양이야.]
그러고 보면 다 비슷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그 녀석이나 자신이나, 지저분하고 역겹다고 생각했던 녀석들이나. 결국은 모두 끝을 보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등바등 팔까지 뻗는 녀석도 있는 모양이지만.
[불청객이 하나 더 늘었다.]
망령의 원념이 가득한 이 지하 도시에서 정령의 존재감은 없다 싶을 정도로 희미했다. 하지만 줄카는 그 희미한 한줄기 비명을 들을 수 있었다. 천적의 등장에 울부짖는 정령의 소리를.
“예?”
[정령들이 그렇게 말하는군.]
지금도 느껴지는 감정들. 온전히 자신에게만 쏠리던 악의와 두려움이 다른 곳으로도 향하고 있는 것이 생생히 느껴진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