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4화
“젊은 총독의 수완이 제법 괜찮은 것 같습니다.”
시어문드는 적 4군단이 강 건너까지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자 그리 말했다. 군터도 동의했다.
끝장을 볼 것처럼 기세를 피워올리던 애송이가 순순히 물러났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니 작은 포트락과 군단장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는 소문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다만, 장군께서도 아시겠지만…이쪽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불화는 저쪽에만 생긴 것이 아니다. 이쪽도 슬슬 불온한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원인을 따지고 든다면 군터가 이 싸움에 자신의 군대를 쓰고 싶지 않다고 한 것이 문제였다. 골고스에 병력의 상당수를 남기고 왔기에, 동원할 수 있는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군대와 멕시스의 군대뿐. 그러나 전자는 주인이 있으니, 남는 건 주인이 몸져누워있는 멕시스의 군대뿐.
“이럴 때 자이드라 멕시스가 한마디 정도 해주면 좋을 텐데, 영 도와주지를 않는군요.”
자이드라 멕시스의 상태는 아직도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면 무슨 특별한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노환에 피로가 겹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그렇게나 영험하다는 신관들이 쩔쩔매고 있는 이유도 노환이라면 설명이 되지 않겠는가. 제아무리 신통한 능력을 지닌 신관이라고 해도 노환은 어쩔 수 없는 것일 테니까.
어쩌면 쓰러졌던 초기에 건재하다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던 것이 더 큰 문제를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쉬어야 할 때 쉬지 않고 무리를 거듭함으로써 한계에 부딪친 몸을 아예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트려 버린 것이라면, 그래서 아직도 골골대는 것이라면 현 상황을 이해할 만하다.
“조금 번거롭기는 하겠습니다만, 장군께서 적극적으로 나서신다면 어떻게든 다잡을 수 있을 겁니다. 여전히 생각은 없으십니까?”
“따르는 시늉만 하면 족하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쓰러졌지만, 그간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보여준 것이 있었다. 그런 그가 보증하고, 무명이 7황자 진영 전체에 널리 알려진 군터인 만큼 일전을 벌어야 할 때 그가 군대를 지휘한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설 이는 없을 터였다. 설령 있다고 한들 적당히 눌러버릴 수 있을 테고.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낙관론에 근거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전혀 관심이 없으시군.’
시어문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멕시스의 군영 쪽에서 ‘크렘보르 늑대론’이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했음을 알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곧 알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알린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을 테니, 긁어 부스럼일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 * *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멕시스의 군영 쪽에서 이상한 분위기가 돌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듣고는 한동안 조용히 턱만 매만졌다.
좋지 않다. 당연히 좋지 않지만, 사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멕시스의 군대는 멕시스의 것이고, 오랫동안 하나의 깃발 아래 단결해온 이들의 눈에 갑작스레 등장한 외부인이 달갑지 않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물며 그 외부인이 군권에 눈독을 들이는 모양새를 보인다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지.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군터 크렘보르는 용병이다. 판니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대가를 제시하고서 그를 이 판에 끌어들였다. 중요한 순간 남의 손을 빌려야 한다는 것은 마땅찮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군터 크렘보르는 기이한 자였다.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좀처럼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칼 한 자루에 의지해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처럼 순진하게까지 굴었다. 하지만 그 순진함이 사실은 알 수 없는 그만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결과물임을 알게 되면, 가벼웠던 마음은 자연스레 쇳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무거워진다.
군터 크렘보르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세상만사에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감정을 드러낸다. 그 위압감은 또 어떠한가. 의도적으로 기를 죽이려는 것 같지도 않은데, 저절로 말과 생각을 다듬게 만드는 그 위압감은 마치……. 마치…….
“…….”
턱을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크지도, 작지도 않게 뜬 눈이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지금, 그의 마음속에는 거센 풍랑이 일었다.
불현듯 떠오른 어떤 생각이 한순간 그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그래.’
어째서 몰랐을까. 아니, 어째서 떠올리지 못했을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지 않았던가?
이상한 것투성이였다. 권력을 위해 자신의 든든한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외가와도 거리를 두는 황자가, 어째서 듣도 보도 못한 객장 나부랭이에게 그토록 과한 배려를 해주었는가. 능력이 있으니까,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굴러들어온 돌이니까, 등등의 이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 그렇지.’
다시 생각해보면 부족한 이유, 혹은 핑계에 머저리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던 이유는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기에 부족한 것을 부족하지 않다 혼자 납득하며 넘어갔던 거다.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은 채로.
만약 지금 떠올린 것은 그때의 자신에게 이야기했다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을 테지.’
그게 당연하다. 지금의 자신이 이상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지금의 자신이.
그러나 이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이 사실이어야만 지금까지의 모든 것들이 설명된다.
‘초월자.’
사실 아는 것은 별로 없다. 사고방식이 사람과 차이가 있다는 것. 노화가 멈춘다는 것. 즉, 늙어 죽지 않는다는 것. 그 외 잡다한, 추측에 가까운 것들이 가문의 기록으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정보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게다가,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그의 부친과는 달리 직접 초월자를 본 적이 없었다. 군주들이 그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공식적인 활동을 멈추다시피 한 탓이었다.
그렇기에, 군터 크렘보르를 몇 번이고 마주하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하!”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왜인지는 모른다. 꽤 오랫동안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묻어두기만 했던 의문을 드디어 풀었기 때문일까.
물론,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확인해봐야겠다.
‘직접 묻는 것은…아무래도 조금 위험할 수 있겠지.’
군터 크렘보르가 초월자가 맞다고 가정해보자. 그 자신도, 황자도 이제껏 그 사실을 숨겨왔다. 어째서일까. 교단 때문에? 교단이 초월자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전란이 시작된 후 그들은 줄곧 소극적인 태도를 견지해왔다. 황제의 죽음, 혹은 승천 이후로 위축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국 전역에 미치는 그들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대하니, 황자로서는 괜히 트집잡힐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는 편이 초월자를 휘하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면.
‘조심해야겠지.’
값지면서, 동시에 위험한 비밀이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자신이 이 비밀에 가까이 다가서도 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르는 척 가만히 흘려보내기에는 너무나 아쉬웠다.
* * *
사람은 명리를 탐하는 존재다. 그것은 일종의 본능이다. 인간의 몸이 숨을 쉬어야 움직일 수 있듯, 사람의 마음은 명리를 따라 움직인다. 그러므로 사람이 명리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거짓이거나, 제정신이 아니거나.
그런 면에서 봤을 때 군터 크렘보르는 명백한 후자였다. 처음에 그는 괴짜라고 불렸다. 나서야 할 때 나서지 않고, 나서지 않아야 할 때 나서는 그를 보며 사람들은 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세월이 지난 지금은, 그를 아는 자들은 그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이해하기를 포기했다고 봐도 좋다.
입은 거짓말을 할 수 있어도, 행적은 그러지 못한다. 처음에는 그를 꿍꿍이가 있는 음흉한 자, 괴짜라고 평하던 이들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특별하고, 다르다는 사실을.
“고생이 많겠군.”
“예?”
“멕시스 쪽 말이네. 불만이 많다면서.”
“아아.”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시어문드와의 만남을 조금씩 늘렸다. 앞으로의 일을 논하기 위함이었다. 격을 맞추려면 시어문드가 아니라 군터 크렘보르와 만나는 것이 맞지만, 그는 실무를 수하들에게 떠넘기다시피 하고 반쯤 칩거해 있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시어문드를 앞에 두고 전혀 개의치 않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시늉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는 성도 없는 일개 무관과 독대하면서도 전혀 불쾌함을 느끼지 못했다.
왜 안 그렇겠나? 몰랐다면 모를까. 초월자와 독대하는 것은 그로서도 부담이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격이 좀 떨어지더라도 편히 대할 수 있는 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낫다.
그런데 그런 그의 의도치 않은 진정성이 상대에게 꽤 좋게 작용한 모양이었다. 시어문드는 그의 대범함, 혹은 너그러움에 좋은 인상을 받았는지 종종 묻는 말에 상당한 성의를 담아 답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입장이 바뀌었더라면 저희도 그랬을 겁니다.”
“그런가?”
“타라냐드의 군대는 멕시스 각하의 사병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주인도 아닌 자가 멋대로 이끌려는데 순순히 끌려준다면 그게 오히려 더 문제 아니겠습니까.”
몇 번씩 만나 가벼운 이야기를 주고받았기에, 제법 민감하다 할 수 있는 표현도 이제는 술술 나왔다.
“사병이라. 틀린 말은 아니지.”
세상을 전부 집어삼키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전쟁을 끝내고, 황제는 제국의 거대한 땅을 수십 조각으로 나눴다. 그리고 각지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몇몇 가문들에게 세습 가능한 총독직을 하사했다.
“황자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신다고 해도, 제국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게야.”
“…….”
시어문드는 침묵했다. 자신이 입을 열 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고 판단한 듯이.
“그렇게 조심스러워 할 필요 없네. 머리가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테니.”
“생각에 머무는 것과 입 밖에 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렇긴 하지.”
평민 무관이 대귀족, 그것도 한 주의 총독을 앞에 두고 위축된 기색 없이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면 배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해도 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고를 수 있을 만큼 신중하고 나름대로 생각이 있는 것일 뿐.
“황자 전하는 뛰어난 분이지만, 황제 폐하 같은 신인(神人)은 아니시지. 몇몇 발칙한 이들은 황가에 흐르는 신의 피가 대를 이을수록 옅어질 거라 하더군. 교단에서 들으면 이단심문관을 파견할 테지만, 난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네. 듣는 귀가 없으니 하는 말이네만,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예?”
“이백 년 전. 황제께서 전쟁을 선포하셨을 때, 제국의 기세는 세상을 뒤덮을 정도였다더군. 맞서는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제국은 결국 가로막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정복했지. 내가 그 시대를 산 것은 아니지만, 사서를 읽다 보면 정말 세상 전부를 발아래 둘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 그러나 제국의 말발굽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멈췄지. 어째서 그랬다고 생각하나?”
“황제께서 그러길 원하셨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지. 내 말은, 황제께서 왜 갑자기 전쟁을 멈추셨을까 알겠느냐는 말이네.”
“…….”
“누구도 그분을 이해하지 못했지. 추측도 하지 못했어. 신의 사고방식을 평범한 인간들이 따라갈 수 없었던 거지. 어떤 자들은 팽창만을 반복해온 제국에 휴식과 정비를 위해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떠들어대지만, 진정 그러한가?”
“모르겠습니다. 소관 역시 평범한 인간이라 그런지, 짐작도 가지 않는군요.”
“나 역시 그러하네. 많은 이들이 그렇지. 감히 신의 계획을 가늠하려 하지 않지. 불경이라고 생각하니까.”
시어문드는 왜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조심스러운 기색을 비쳤다.
“어떤 학자들은 전란이 벌어지기 전까지를 신의 시대라 이름 지었네. 그럼 지금, 이 시대의 이름은 무엇인지 알겠나?”
“글쎄요.”
“인간의 시대라 하더군. 교단에서는 불경하다 입에서 불을 토해대지만, 이름을 숨긴 채 참언만 살포해대는 자들을 어찌 잡겠나. 소위 지식인이라 하는 자들 사이에 이 불경한 표현이 떠돈 지도 벌써 1년이 넘어가네.”
“…….”
“어찌 생각하나? 나는 개인적으로 그럴듯하다고 보네만.”
“그렇습니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궁금하다네. 정말 인간의 시대가 온 것이라면, 남아있는 신들은 어찌 되는 것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은가. 인간의 시대가 도래했으니 자연히 신들의 자리는 줄어들거나 사라질 것인데, 그렇다면…….”
“각하.”
가라앉은 목소리. 이제야 알아차린 것인가.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조금 전과 확연히 다른 시선을 담담히 마주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십니까.”
“말했듯, 궁금해졌을 뿐이네.”
조금 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표정.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인간의 시대에, 신은 어떻게 되는가. 어찌하려 하는가. 위험하지만, 제법 흥미로운 주제 아닌가?”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