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3화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군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했다. 그는 군터에게 판니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고, 군터는 그가 헛소리를 늘어놓을 사람이 아니라 판단하고 이곳까지 발걸음했다.
“일전을 벌일 겁니다. 장군께서 활약하시기 더없이 좋은 무대가 될 테지요. 그곳에서 장군은 승리하시고, 적당히 상처 입으시면 됩니다.”
“그 핑계로 돌아가라는 건가? 그런 얄팍한 수작이 통할 거라 보는가?”
핀잔과도 같은 말에,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자신의 무례함을 미리 사과라도 하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제가 살아온 날이 크렘보르 장군에 대면 짧은 것이 사실이지요. 하지만 제가 짧게나마 살아오며 배운 바로는, 어차피 모든 핑계는 얄팍합니다. 핑계가 먹히느냐 먹히지 않느냐는 핑계가 얼마나 얄팍하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이쪽을 존중할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달라지지요. 아무리 그럴듯한 핑계라도 존중할 마음이 없다면 묵살당할 것이고, 반대로 존중할 마음만 있다면 그 어떤 얄팍한 핑계라도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단지 장군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다는 것입니다. 티브리악의 이름으로 말이지요. 거기에 멕시스의 이름까지 더해진다면 더 좋겠군요.”
“…….”
거창하게 말했지만 결국은 이름을 빌려주겠다는 이야기. 군터는 대귀족답지 않게 공손한 말투와는 달리, 그 안에 숨은 공손하지 않은 의도를 뚜렷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분명, 야심 찬 젊은이의 전형이었다. 그 모습은 꾸며낸 말투와는 달리 충분히 대귀족스러웠다.
“군대는?”
“멕시스와 티브리악의 병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이라면 장군의 깃발 아래에서도 충실히 싸울 겁니다. 물론, 장군이 보기에도 만족스러우실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요.”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군터 크렘보르라는 사내가 자신의 병사들을 아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아낀다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적어도 남의 싸움에서 피 흘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길 정도는 된다고 보았고, 그 추측은 아무래도 정확했던 모양이다.
“좋아. 하지만 적이 싸움을 피한다면?”
“그럴 일이 없도록 해야지요.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될 경우, 다른 이유를 들어서라도 장군의 귀향길을 마련해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군터는 비로소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시온 포트락은 제국의 영웅 쥬드 포트락의 아들이자 후계자로서, 누구보다 밝게 빛나는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그 길을 걸어온 그의 머리 위에는 늘 부친의 그늘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이 부친 없이 홀로 세상에 나선 그가 보로겐 콘실리에의 밑에서 복무하게 된 이유였다. 항상 부친의 그늘 안에서만 머물렀던 그가 처음으로 그늘 밖에서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적당한 길잡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보로겐 콘실리에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꽤 좋은 상관이었다. 일단 수하의 공을 탐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랬다.
물론 명문 귀족, 그중에서도 대귀족이라고 하는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체면이라는 것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기에 너저분한 일에 직접 끼는 경우가 드물기는 하다. 하지만 그건 직접 나서서 강탈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자발적인 상납을 거절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수하의 공은 즉 나의 공이라는, 그들만의 상식이 상시 작용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상식은, 그들을 섬기는 이들에게까지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하지만 보로겐 콘실리에는 달랐다. 시온 포트락은 그의 대귀족답지 않은 너그러움 내지는 호의가 자신에게만 해당하는 것인지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호의는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그만이지, 거기서 더 파고들 필요는 없다.
그래. 보로겐 콘실리에는 좋은 상관이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군터 크렘보르가 이곳에 왔다. 대부분의 군대는 여전히 골고스에 머무는 모양이지만, 머리가 이곳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충분하다고? 정말 그런가?
“직접 그자를 상대했다지? 어떻던가?”
저 여유로운 말투는 뭔가. 그토록 주의했던 인물이 이곳에 나타났다는데, 저런 물렁한 반응이라니. 긴장감의 결여? 아니. 그것보다는…….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투로군.’
그래. 딱 그런 분위기다. 전장에 나온 군인이라고는 보기 힘든 모습. 갑자기 이런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그가 변했기 때문일까? 아니. 정말 갑자기인가?
‘상황이 변했기 때문이겠지.’
군대를 책임지는 지휘관으로서, 확실한 것만을 추구하는 성향을 잘못되었다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불확실한 모험을 즐기는 쪽과 비교한다면 오히려 답답하더라도 확실한 쪽이 나으리라. 그런 면에서 보면 보로겐 콘실리에는 나쁘지 않은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나 시온 포트락은 그의 느긋한 전략관(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슴속에 불이 지펴졌기 때문일까? 나쁘지 않은 상관이라고 생각했던 보로겐 콘실리에가 조금씩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자콥 트라소프가 그를 애지중지하면서도 어려워했던 이유를 알았습니다.”
“음?”
“군터 크렘보르. 그는 초월자입니다.”
“…뭐?”
푸근하게 풀려있던 보로겐 콘실리에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그 극적인 변화에, 시온 포트락은 영문 모를 즐거움까지 느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잘못 본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자는 분명히 인간을 벗어나 있었습니다. 그자와 마주하고 있으니 아주 어렸을 적, 그분들을 뵈었을 때가 떠오르더군요.”
“그…흐음.”
보로겐 콘실리에는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한 말에도 불구하고, ‘자네가 잘못 본 것이었겠지’ 정도로 못 들은 척 넘기려고 했던 것일까?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정말 그런 생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시온 포트락은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던 실소를 억누르고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다만, 불완전해 보이기는 했습니다. 초월을 이루었으나 그분들과 같은 온전한 초월자가 되지는 못한 것 같더군요. 분위기도 그렇고, 힘도 그랬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자네의 이야기가 맞다면,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야. 이 이야기는 반드시 전하께 보고해야겠군.”
“물론 그래야지요. 하지만 장군. 분명 제가 봤던 그는 불완전해 보였습니다만…다음번에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장군께서도 초월자의 가치를 알고 계실 겁니다. 그들의 힘도 힘이지만, 그 의미는 무겁다는 말로도 부족하지요.”
“하고 싶은 말을 하게.”
“지금이 아니면 다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온전한 초월자가 자콥 트라소프의 품에 안기게 된다면, 그때의 일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군요.”
“자네…….”
“장군도 알고 계시겠지요. 교단에서 금기로 지정한 역사이지만, 알 사람들은 알고 있으니까요. 성전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초월자들마저 전장의 거름이 되었습니다.”
“불경한 언사는 삼가게. 교단의 눈과 귀는 어디에나 있으니.”
“이단심문관들이 들이닥칠까 신경쓰이십니까? 아니면 파문이라도 당할까 두려우십니까.”
방금 교단의 금기를 운운한 말에 대해 불경하다 한 것이 반쯤은 별 의미 없이 상투적인 표현이었다면 지금 시온 포트락이 하는 말은 진정으로 불경하다 할 만한 것이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상관을 조롱하는 듯하지 않은가. 보로겐 콘실리에의 표정이 굳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온 포트락은 상관의 심기가 적잖이 틀어졌음을 알았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의도치 않게 핀 불씨는 초장에 꺼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후에 그 불씨가 얼마나 덩치를 키울지, 무엇을 태울지 알 수 없을 겁니다. 만약 눈에 들어온 불씨를 못 본 척하고 넘긴다면 그것은 책임을 방기하는…….”
“거기까지.”
차가운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보로겐 콘실리에는 숙고해보겠다고 한 뒤 시온 포트락을 내보냈다. 홀로 남은 그의 얼굴은 한동안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 * *
기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보로겐 콘실리에의 4군단이 강을 건너온 이후로 이렇게 조용했던 적은 없었다. 전투가 벌어지든, 그게 아니라도 촉각을 곤두세우게 하는 어떤 움직임이든, ‘일’이라고 할 만한 것이 하루도 빠짐없이 일어났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양측의 장졸들은 오히려 전투가 한창이던 때보다 더 큰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때로는 귀를 아프게 하는 소란스러움보다 숨소리조차 신경 써야 하는 적막이 더 고통스러운 법인데, 지금이 딱 그랬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도 다들, 심지어 말단 군졸들까지도 알았다. 군터 크렘보르의 참전이 많은 것을 바꿔놓으리라는 것을.
프란시스 티브리악을 비롯해 고위 인사들이 크렘보르의 참전을 홍보하듯 떠들어댔기에 이미 타라냐드 근방에는 군터 크렘보르가 이곳에 와 있음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들은 이제껏 성난 야생마처럼 날뛰어대던 작은 포트락이 잠잠해진 것이 군터 크렘보르와 일전을 벌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부상을 입은 것이든, 강적의 출현에 꼬리를 만 것이든. 어쨌거나 하늘까지 닿을 것만 같았던 적장의 기세가 제대로 꺾였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전까지 자이드라 멕시스의 죽음이나 패퇴를 조심스레 입에 담던 그들은 이제 승리를 노래했다. 계절이 바뀌기 전에 보로겐 콘실리에와 작은 포트락이 도로 강을 건너거나 목을 내놓게 될 거라며 큰소리를 치기까지 했다. 비관은 조심스러웠으나 낙관은 코가 빨개진 자들의 주정처럼 거침이 없었다.
으직!
조금씩 형체를 갖춰가던 나무 조각이 한순간에 으스러졌다. 한 손에는 박살이 난 나무 조각을, 다른 한 손에는 자그마한 조각칼을 쥐고 있던 시온 포트락이 한숨을 내쉬며 한 손 가득 쥔 쓰레기를 털었다.
“무지한 놈들의 헛소리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장군을 도발하려는 수작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필시 그렇겠지요.”
늙은 가신의 조언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머리로 아는 것을 가슴도 똑같이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거의 모든 문제는 그 둘이 따로 놀기 때문에 생기곤 하지.’
도발이라. 맞을 것이다. 도발도 이 정도면 꽤 노골적이고 유치한 축에 속한다. 머리가 있는 자라면, 아니 머리를 쓸 줄 아는 자라면 누구라도 이것이 도발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하지만, 도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속이 탄다. 그건 이 유치한 도발이 일정 부분 사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군터 크렘보르에게 위축되었다는 것. 그로 인해 기세가 꺾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찌 안 그렇겠나? 초월자라는 이름의 무게는 그만큼 무겁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아무리 군터 크렘보르가 아직 온전한 초월자가 아닌 것 같다 해도.
“저들은 군단장과 장군의 사이를 흔들어놓으려 할 겁니다.”
그렇겠지. 이 유치한 도발도 본격적인 이간질을 벌이기 전의 사전준비일지 모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넘어가셔서는 안 됩니다.”
“…….”
“계략을 쓰는 자들은 상대가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 초조함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장군께서 마음을 다잡으시고 흔들리지 않으신다면 꾀를 낸 적들이 오히려 더 속을 태울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급한 쪽은 저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타라냐드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좋지만, 그게 아니라도 상관없다. 점령할 수 없다면 불태워라. 그것이 4군단이 받은 명령이었다.
타라냐드를 불태운다는 건 멕시스의 집을 태우는 것과 같다. 초기부터 황자를 따랐던 귀족들과 후에 합류한 귀족들의 밥그릇 싸움은 양쪽이 다 같지만, 갈등의 정도는 자콥 트라소프 쪽이 더 심했다. 왜냐하면, 그쪽에는 구심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자이드라 멕시스라는 확실한 구심점이.
이름값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자이드라 멕시스는 제레이스를 비롯한 몇몇 대귀족 가문들에 꿇릴 것이 없는 자였다. 가문의 위세도 그렇고, 본인이 쌓아온 명성도 그랬다. 그렇기에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은 자연스레 그의 옆으로, 뒤로, 혹은 아래로 섰다. 그리고 그 결과, ‘주류’조차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세력을 이루었고.
갈등이 있더라도 하나가 확연한 우위를 점한다면 문제는 없다. 본격적인 다툼이라는 것은 항상 양쪽이 비등할 때 나타나는 법이니.
타라냐드를 얻을 수 있다면 좋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자이드라 멕시스를 자극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황자, 아니 황손이 북부 전선에 기대하고 있는 것은 그 정도였다. 그러고 보면 보로겐 콘실리에가 소극적으로 구는 것도 영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그는 그 나름대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는 것이었으니. 만약 군터 크렘보르가 초월자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시온 포트락 역시 그의 의사를 존중했을 것이다.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해도 어쨌거나 4군단의 군단장은 보로겐 콘실리에였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콘실리에 가문도 유서 깊은 명문인 만큼, 초월자에 대해서도 알 만큼은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군터 크렘보르가 온전한 초월자가 되어, 골칫거리를 넘어 재앙이 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한다는 것도 알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직까지 망설이는가.
‘직접 전하에게 알려야 하는가.’
황손이라면 사안의 심각성을 알아줄 것이다. 어쩌면 지원을 해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방법은 두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하나는 답을 얻는 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로겐 콘실리에가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포트락의 이름을 이었다고는 해도, 시온 포트락은 그의 부친과 달랐다. 부친이 쌓은 절대적인 명망이 그에게는 없었다. 단적으로, 그는 보로겐 콘실리에에 비해 모든 것이 부족했다. 권력, 명망 등, 그야말로 모든 것이.
만약 자신을 제치고 직접 황손을 움직이려 했음을 보로겐 콘실리에가 알게 된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보복하려 할 것이다. 부친이 물려준 기반마저 아직 온전히 소화하지 못한 시온 포트락으로서는 되도록 그런 부담은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그에게 결심을 부추기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회군이라니요?”
시온 포트락은 자신의 언성이 높아졌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추궁하듯 물었다. 그것이 거슬렸는지, 보로겐 콘실리에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회군이라는 표현은 부적절하군. 진영을 조금 뒤로 물리는 것뿐이야.”
“강을 건너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그 의미를 모르리라 생각지 마십시오.”
“글쎄. 내 생각엔 자네가 내 의도를 상당히 곡해한 것 같은데. 그건 그렇고, 내가 자네에게 일일이 허락을 받고 결정을 내려야 하나?”
늘 푸근하게 내려가 있던 보로겐 콘실리에의 눈꼬리가 날 선 칼처럼 위로 올라갔다. 시온 포트락은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에도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