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2화
머리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던가. 싸움에 집중하고 있느라 시간이 적잖이 끌렸다는 것도 잊고 말았다. 그새 적은 기어이 아군을 돌파한 것이다. 설마하니 저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갔던 길을 고스란히 돌아올 리는 없으니, 필시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호응한 것일 터.
‘물러나야 하는가?’
천둥처럼 뛰는 가슴은 당장 끝장을 보라고 외친다. 그러나 이성은 손해를 최소화하고 일단 물러나라고 말한다.
“으으!”
부친이 몇 번이고 강조해 가르쳤던 것을 떠올렸다. 뒤처지지 말 것.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만 하다가 전장의 흐름에 휩쓸리기보다는 비록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빠르게 판단하고 결정한 뒤, 어떻게든 움직일 것.
한 가지만 따져본다. 지금 끝장을 보고자 한다면 저자를 벨 수 있는가? 초월자의 목을 취할 수만 있다면 병사 일만을 잃더라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가능한가?
‘…빌어먹을.’
자신이 없다.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외치지만, 냉정하게 가늠해보면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벨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하다. 불확실한 성공을 위해 수많은 병사들의 목을 거는 모험을 해야 하는가?
‘아니.’
머릿속에 안개가 걷힌다. 시온 포트락은 깔끔하게 판단했고, 결정을 내렸다.
“운이 좋았군.”
마음으로는 단념했으나 힘겹게 뗀 입에서는 절로 으르렁거리는 말이 튀어나온다. 유치한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라도 속풀이를 하지 않으면 군사를 물리지 못할 것 같았기에.
“도망갈 수 있을 것 같나?”
달리던 말의 속도를 줄인다. 순순히 보내주지 않겠다는 듯이. 시온 포트락은 상대의 뻔뻔한 돌변에 순간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괜히 말로 화를 풀려다가 배로 얻어맞지 않았나.
“모험을 해보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소.”
따라올 테면 따라 와봐라. 시온 포트락은 미련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신호에 기수들이 깃발을 들어 올리고, 뿔피리가 여기저기서 퇴각의 신호를 알렸다.
“…….”
군터는 멀어지는 시온 포트락을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 쫓지는 않았다. 길게 벽을 세웠던 병력이 빠르게 결집하고 있다. 혼자서 쫓아 들어가면 이번에야말로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리는 꼴이 될 것이다.
“장군! 무사하십니까!”
아드리안이 혼자 한참이나 앞서 달려왔다. 군터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사람의 외모만 보고 고귀하다는 표현을 떠올릴 수 있을까. 눈앞의 젊은이라면 가능하리라.
그간의 고생을 나타내듯 초췌한 몰골. 그러나 그런 초췌함으로도 숨길 수 없는 기품. 무장답지 않게 선이 부드럽지만 부드러운 외면 안에 고집과 힘이 느껴진다.
이 젊은이가 프란시스 티브리악. 이야기는 많이 들었고, 서신을 주고받은 적도 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다. 그러니까, 티브리악의 가주가 되고 총독이 된 후로는 말이다.
“그쪽도.”
티브리악의 가주이자 한 주의 총독. 신분이나 지위만 놓고 보면 이쪽보다 윗줄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예의를 갖추는 쪽은 프란시스 티브리악 쪽이었다. 연배도 연배거니와, 구원받은 입장에서 뻣뻣하게 나가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래. 숨이 막히는군.’
군터 크렘보르를 직접 본 이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그의 앞에서는 고개를 똑바로 드는 것도, 마음대로 말을 하는 것도 힘들다는 것.
그에게는 사람을 위축시키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아니, 그것을 분위기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존재감. 그래. 이것은 존재감이다. 마치 사람 서너 명 정도가 들어서면 꽉 차는 좁은 방 안에 커다란 맹수 한 마리와 덩그러니 둘이서 들어앉은 느낌. 맹수의 눈길, 숨소리 한 번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 긴장감.
이쪽도 그를 구해줬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피력하는 것 정도가 이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저 무심한 시선을 보아하니 효과가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적장. 포트락의 아들은 사나울 뿐만 아니라 집요한 자입니다. 일단은 물러났지만, 이걸로 끝은 아닐 겁니다. 태세를 정비하고 다시 압박하려 들겠지요.”
티브리악의 가주로서, 바크렌의 총독으로서 일개 신흥 귀족에게 꼬박꼬박 예의를 차리는 것이 신경 쓰였으나 연배 높은 선배를 대하는 것이라 애써 위안 삼았다.
“따로 수하를 보내놓았다. 며칠 내로 멕시스의 병력과 함께 당도할 테지.”
“그렇습니까.”
멕시스의 군대가 다른 이의 지휘를 받아 움직인다? 역시 상상이 가지 않는다. 오랫동안 멕시스에게만 충성을 바쳐온 군대다. 그 고집과 자부심은 외인(外人)이 굽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협력을 구하는 정도라면 가능하겠지.’
고집과 자부심이 강할 뿐, 그들도 바보는 아니니 사안의 위급함은 알고 있을 터. 그간은 구심점을 잃고 당황했으나, 이제 군터 크렘보르라는 거물이 당도했으니 일단은 따라 움직여줄 가능성이 크다.
‘멕시스의 군대가 받쳐준다면…일단 숨은 돌릴 수 있겠군.’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일단 안도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동안 자신이 그토록 지원을 요청했음에도 소극적인 시늉에만 그쳤던 멕시스의 군대가 정말 며칠 뒤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때는 분노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고민했다.
‘티브리악의 주인이라고 해도, 아직은 생소한 이름이다 이건가.’
명성 자체는 군터 크렘보르와 비교해도 그리 밀린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단지 유명할 뿐인 이름이라면 의미가 없다. 단순한 유명세보다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 그로 인해 생기는 권위가 더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프란시스 티브리악이라는 이름은 아직 유명세에 어울리는 무게를 갖지 못한다. 유감스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군터 크렘보르의 말대로 며칠 뒤 멕시스의 군대가 모습을 보이기를 바랐다. 멕시스의 깃발을 단 군대를 보면 화는 나겠지만, 어쨌거나 더 이상 피투성이가 된 채로 무릎을 꿇는 꿈 같은 것은 꾸지 않아도 될 테니까.
* * *
“장군. 회군 명령입니다.”
“…….”
시온 포트락은 대꾸 없이 손을 내밀었다. 정갈한 필체로 쓰인 군단장의 서신. 이제까지 잠잠하던 멕시스의 군대가 움직였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몸을 회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개인적인 추측과 함께.
‘일단은 물러나야겠지.’
앞뒤로 협공을 당하기 전에 물러나야 한다. 알지만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바크렌의 어린 총독을 이제야 막다른 곳까지 몰아넣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훼방꾼 때문에 여기서 발을 빼야 한다니.
‘이틀. 아니, 단 하루만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알고 있다. 전장에서의 하루가 얼마나 긴 시간인지는. 단 하루라고 해도 아쉬워할 것 없다는 것 정도는.
“그래서, 각하께서는 어찌하신다더냐.”
“별말씀은 없으셨습니다만, 군터 크렘보르가 이곳까지 온 이상, 아무래도 일단은 물러나서 상황을 살피실 것 같습니다.”
상관의 의중을 멋대로 짐작하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전령은 거리낌이 없었다. 시온 포트락은 못마땅함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전령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부친의 후광을 바란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주어진 것을 거부할 생각은 없다. 더군다나 보로겐 콘실리에는 나쁘지 않은 상관이지만, 전선에 나선 사령관답지 않게 너무 소극적이었다. 그는 승리하는 것보다 지지 않는 것에 더 무게를 두는 지휘관이었고, 그의 그런 전쟁관은 때때로 젊은 무장들에게 답답함을 안겨주었다.
“물러나면, 상황이 변하기라도 한다던가.”
전령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답답함에 흘러나온 혼잣말에 가까웠다.
“소관이 짐작하기로는…군터 크렘보르를 여기까지 끌어낸 것에 의의를 두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하!”
골고스에 둥지를 튼 채 꿈쩍도 하지 않던, 그래서 양쪽 모두에게 불안감을 안겨주었던 문제의 인물. 그자를 밖으로 끌어냈으니 할 만큼은 했다, 이건가.
뭐, 따지고 보면 그의 생각이 영 잘못된 것은 아니다. 군터 크렘보르를 끌어냈고, 타라냐드에서 두 명의 총독을 압박하는 중이니까. 여기서 상황이 고착된다고 해도 나쁠 것은 없다. 아니, 오히려 좋은 편이라고 봐야겠지. 그래. 군단장의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그래도 아쉽지 않은가.
승기를 쥘 수 있었다. 그야말로 목전이었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쓰러져 있는 상황에서 프란시스 티브리악을 쓰러뜨린다면 타라냐드를 발아래 두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런 완전한 승리의 목전에서 훼방을 당한 것이다.
‘멕시스의 군대는 오랫동안 한 깃발에만 충성해왔지. 머리를 잃은 그들은 실 끊어진 인형이나 마찬가지. 아무리 그자가 초월자라고 해도 단시간에 상황을 수습할 수는 없을 터. 차라리 이 기회에 전력으로 몰아친다면…….’
초월자는 신이 아니다. 인간을 초월했다고 해도 홀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역사가 증명하지 않던가.
“후우.”
다른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들지만, 그래도 따라야 한다. 군단장은 이미 결정을 내렸고, 명령까지 떨어졌으니.
* * *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예상과는 달리, 시온 포트락은 순순히 물러났다. 소식을 듣고 의외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던 젊은 총독은 곧 이 결정이 시온 포트락이 아닌 보로겐 콘실리에의 것일 거라 말했다.
“시온 포트락이 힘이 넘치는 말이라면, 보로겐 콘실리에는 그를 억제하는 고삐 같은 자입니다.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지만, 의외로 그들은 꽤나 잘 어울렸지요.”
시온 포트락의 과감함과 보로겐 콘실리에의 신중함. 대체로 적절하게 발휘되는 그들의 기질 때문에 지금까지의 싸움이 더 힘겨웠노라고,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이야기했다.
“그는 절대 무리하지 않습니다.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싸움만 하려 하지요. 사실, 성 밖의 군대를 지휘하는 데 어울리는 자는 아닙니다.”
야전에서는 정석적인 움직임보다는 순간적인 임기응변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매번 안전함만을 추구하는 보로겐 콘실리에는 야전 사령관으로서 그리 적합한 인사라 할 수 없다.
바라눔 트라소프도, 그의 뒤를 이은 무샤라트 트라소프도 바보가 아니다. 보로겐 콘실리에가 어떤 자인지 뻔히 알면서도 그런 인선을 꾸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콘실리에는 제국의 팽창기 이전부터 제국의 중심에 있던 무가 중 하나입니다. 세대마다 위장을 배출했고, 그 이상까지 이른 적도 있었지요. 그런 데다, 그 가문은 바라눔 트라소프의 가장 큰 후원자 중 하나입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묻지도 않은 내용까지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보로겐 콘실리에와 시온 포트락이 서로 상극인 기질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까지는 꾸준한 성과를 거두어온 탓에 불거지지 않았던 문제가 불거질지도 모른다며 대담한 추측을 내놓기까지 했다.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뭔가.”
“대장은 보로겐 콘실리에지만, 병사들의 지지를 얻는 건 시온 포트락입니다. 부친의 후광도 있고, 본인이 이제껏 가장 앞에서 싸우며 병사들의 마음을 사기도 했지요. 만약 그들이 부딪치기 시작하면, 그 틈을 노려볼 수 있을 겁니다.”
젊은 총독의 눈에서 그의 야심이 은은히 비쳤다.
“…….”
군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승리를 바라지 않았다. 보로겐 콘실리에가 어떻고, 젊은 포트락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았다.
“난 그대를 구했지. 그러니 이번에는 그대가 약속을 지켜야 할 때라고 보는데.”
“…물론 그럴 겁니다. 하지만 장군을 판니른으로 돌려보내려면, 그만한 명분이 필요합니다.”
“명분?”
“전투 한번.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 후에는 장군이 원하는 대로 될 겁니다. 티브리악과 멕시스의 이름으로 보증하지요.”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