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1화
괴물들은 단순했다. 놈들에게 지성이라곤 없었다. 가진 것은 오직 본능뿐. 그렇기에 가볍게 미끼를 던지는 것만으로도 속여넘길 수 있었다. 이를테면, 바로 이렇게.
오-오오!
놈들은 살아있을 때보다 더 빨라진 말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군터가 왼쪽으로 길을 열고 가려는 모양새를 취하자, 놈들은 우르르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군터는 거기서 단번에 방향을 틀어 상대적으로 틈이 벌어진 우측을 돌파했다. 반응하고 움직이는 놈들이 몇 있었으나 작정한 군터의 앞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그렇게 괴물들의 포위 아닌 포위를 뚫어내자 한동안 보지 못했던 적병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괴물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군터를 보고 잠시 당황하던 그들은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전의로 눈을 빛내며 포위를 좁혀왔다.
인간이 아닌 것들과 드잡이질을 하다가 생기와 감정이 드러나는 적을 맞닥뜨리니 상쾌한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과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었다. 군터는 여전히 조금도 속도가 줄지 않은 말과 함께 그를 향한 창칼의 비를 헤치고 나갔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어쩔 수 없는 피로에 몸이 조금씩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으나 그래도 앞서간 아드리안과 합류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느닷없이 강렬한 위기감이 심령에 경종을 울렸다. 군터는 재빨리 몸을 비틀며 위기감의 정체와 맞부딪쳤다.
쾅!
충격에 말과 함께 옆으로 밀려나면서, 군터는 금방 쳐낸 것이 처음 적과 격돌하며 보았던 투창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군터 크렘보르!”
저 멀리. 홀로 강렬한 기세를 풍기는 적장이 천둥처럼 외치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듣던 대로 대단하시군! 수하들을 보내고 홀로 남은 건가? 하하! 오만함인지 자신감인지!”
젊고 힘 있는 목소리. 군터는 다가오는 적장의 정체를 짐작했다.
“보아하니 글베이그의 짐승들까지 뿌리친 모양이군. 대단해. 마음 같아서는 경의를 담아 길이라도 터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을 이해하시오. 이대로 그대를 보낸다면 아무래도 내 꼴이 우습게 되지 않겠소?”
글베이그의 짐승? 그것이 조금 전까지 끈질기게 덤벼들던 짐승들의 이름일까. 군터는 답하지 않았다. 그를 태운 말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시온 토프락일 것이 거의 확실한 젊은 적장은 사나운 패기를 발산하며 그를 따라붙었다.
“어디 한번 어울려 봅시다! 짐승들은 떨쳐냈지만, 나까지 떨쳐낼 수 있겠소?!”
길쭉한 마상검. 검신에 복잡한 문양이 빽빽이 새겨진 것이 외관부터 범상치 않았고, 검에 감도는 기운은 그 이상으로 범상치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검을 쥔 적장 본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카앙!
일합. 군터는 자신이 발산하는 죽음의 기운이 적장에게 닿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떤 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생명이라면 응당 움츠러들어야 할 힘을 앞에 두고도 적장은 조금도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크! 대단하군!”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완력은 확실히 이쪽이 우위였다. 무기를 다루는 기교 역시 마찬가지. 적장은 서로의 무기를 부딪침과 동시에 힘에서 밀린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충격을 흘리려 들었으나 그의 반응은 군터를 앞지르지 못했다.
인상을 구기며 거리를 벌리는 적장. 그러나 찡그린 표정과 달리 눈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사방을 둘러싼 수하들을 믿고 있음이라.
“나를 원망치 마시오! 이곳은 비무대 위가 아니라 전장의 한복판이니까!”
원망? 그럴 리가.
군터는 변명하듯 외치는 적장에게서 주의를 거두고 후방과 우측에서 날아드는 창을 피하고, 쳐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작은 창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 정도 위력이라면 공성용 화살에 버금가지 않을까? 그런 것을 아무런 준비 과정도 없이 날려댄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봐도 터무니없다.
아마도 술법이 관련된 힘. 그러니 법구라고 해야 옳을 테지만, 법구를 이렇게 마구잡이로 날려댄단 말인가. 그의 견문이 그리 넓은 것은 아니지라지만 일회성 법구라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두두두!
군터를 태운 말은 빨랐다. 이제껏 군터가 보고 겪은 그 어떤 명마보다도 빨랐다. 몸이 망가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빠르게 달리는 데만 집중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런데 적장은 어떻게든 따라붙고 있었다. 물론 간간이 날아드는, 이 성가신 창들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크윽!”
억지로 버티던 적장이 결국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거리를 벌렸다. 순간 군터는 따라붙을까 고민했으나 기다렸다는 듯 날아드는 창 때문에 생각을 접어야 했다.
‘이 녀석. 상당하군.’
벌써 열일곱 번째. 부나방처럼 달려들었다가 튕겨 나가기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지만, 직접 상대하고 있는 군터는 알 수 있었다. 저놈. 점점 요령이 붙고 있다. 맞받아칠 수 없는 힘을 상대하는 법을 몸과 머리로 체득하고 있는 거다.
범상치 않은 무재다. 세간의 기준으로 보면 천재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감각도 감각이지만 기본적인 신체 능력도 나쁘지 않다. 부딪칠 때마다 크게 밀려나면서도 자세가 흐트러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 그 증거다. 전력을 다해 부딪치는 것 같지만 여력을 남기고 있다는 뜻 아니겠나. 게다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다.’
의도적으로 숨긴 것인지, 아니면 드러내지 않은 것뿐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장에게서 묘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군터는 그것이 각인된 힘이라고 보았지만,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쥬드 포트락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그의 후계자가 범상치 않은 힘을 물려받았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재미있군.’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따끔함. 군터는 번개처럼 몸을 반쯤 회전시켜 지척까지 날아든 창을 낚아챘다. 그리고 즉시 그것을 날아온 방향으로 되던졌다.
* * *
“끄아악!”
비참한 비명. 창에 꿰뚫린 몸뚱이가 뒤로 크게 쏠린다. 두 다리가 말안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터라 말까지 덩달아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런!’
얼얼한 손을 쥐락펴락하며 다시 틈을 노리던 시온 포트락은 눈살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힘. 말도 안 되는 반응이다. ‘사-차드의 쐐기’의 위력은 공성용 노포에 필적한다. 절대 저런 식으로 낚아챌 수는, 하물며 되던질 수는 더더욱 없는 물건이다. 지금까지는 누구나 그리 생각했다. 시온 포트락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상식이 깨진다. 믿을 수 없지만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하.”
웃음이 나온다. 물론 들은 이야기가 있고, 그의 아들인 보리스 크렘보르를 상대한 적이 있으니 그 부친이라면 보통은 아니리라 짐작했다. 그렇지만.
‘이건 정말…상상 이상이군.’
저쪽은 혼자. 이쪽은 따라 달리는 인원만 백을 훌쩍 넘는다. 그런데도 우세를 점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모양새는 사냥감을 쫓는 사냥꾼들인데, 여유는 오히려 사냥감이 부리고 있다.
허세가 아니다. 자신감이다. 그야말로 상리(常理)를 벗어난 자신감. 그러나 웃음은 나오지 않는다. 지금도 손아귀를 찢을 듯 아프게 하는 무지막지한 힘이, 비현실적인 무위가 웃음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잡을 수 있을까?’
움직이기 전이라면 모를까, 일단 움직인 후에는 망설이지 않아야 한다고 배웠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배운 대로 잘 해왔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지금까지는.
쾅!
벌써 몇 번이고 부딪쳤지만, 힘이 떨어졌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어쩌면 떨어졌지만 느끼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상대가 힘이 빠진 이상으로 자신의 힘이 빠진 것이라면 말이다.
우우웅!
그의 검. 틸로크가 낮은 울음을 흘린다. 부친에게서 받은, 제국의 명장이 벼리고 고위 술사 여럿이 힘을 불어넣었다는 명검이 고통스럽다는 듯 울부짖고 있다.
손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희미하다. 차라리 다행이다. 이미 손아귀는 걸레처럼 변했을 테니.
‘그래. 이제야 알겠군.’
이 공기. 이 힘. 이 위압감. 어느 것 하나 살 떨리지 않는 것이 없다. 단언컨대 이제껏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적으로 마주했기 때문일까?
‘아니. 그것만이 아니야.’
그의 부친, 쥬드 포트락은 제국의 관리로서, 귀족으로서 최고에 가까운 위치에 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후계자인 만큼, 시온 포트락 역시 견문이 좁지 않았다.
그는 어렸을 적 잠깐 앞에서 보았던 군주들을 똑똑히 기억했다. 뭣 모르는 아이에게도 그날, 그 순간의 기억은 너무나 인상적이었기에 세월이 적잖이 흘렀어도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그 기억. 그때 느꼈던 형용할 수 없는 기분. 그것이 지금에 와서 문득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군터 크렘보르가 골고스에서 보인 행동은 힘 있는 귀족이 간혹 보이는 단순한 자기 과시 수준을 넘어섰다. 군대를 지닌 자가, 특히나 전시에 그런 행동을 한다면 군주는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콥 트라소프는 군터 크렘보르에게 눈에 보이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가 거느린 군대가 깃발을 바꿔 들까 두려워서? 제국의 반을 지녔다는 이야기를 듣는 자가 설마 그런 새가슴일까? 황제의 핏줄이? 신의 피를 이었다는 황자가?
‘그래. 이제 이해가 되는군.’
당사자를 직접 마주하고, 창칼을 부딪치고 있으니 자연히 알게 된다.
군터 크렘보르가 특별했기 때문이다.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초월자였기 때문에. 초월자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자콥 트라소프였기 때문에.
쾅!
다시 한번 강하게 부딪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금까지와 달리 튕겨 나가지 않았다. 밀리지도 않았다. 검을 쉰 양팔이 덜덜 떨리고 있지만, 끝끝내 버텨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워진 거리. 시온 포트락은 무심하게 가라앉은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연이 있다면 바로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서로의 숨결이 흐릿하게나마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시온 포트락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기이하군. 초월자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세상의 온갖 가치들이 그들에게는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말이야.”
힘들게 뱉은 말인데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애초에 답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지? 그분들의 사주라도 받았나?”
몸이 달아오른다. 그러나 정신은 또렷하다. 심장에 깃든 힘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바란 적이 없는데도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려 하는 것은, 그만큼 이 순간이 위태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무 자신만만하지 마시오. 전장의 열기는 신조차 집어삼키곤 하니까.”
“말이 많아.”
흘러나오는 호흡이 일순간 옅어지더니 방금보다 훨씬 강한 힘이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연달아 날아드는 검은 점 하나. 시온 포트락은 다급히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캉! 하는 소리는 어깨가 빠질 것 같은 고통 뒤에 들렸다.
“윽!”
목이 서늘하다 싶어 허리를 뒤로 꺾었다. 콧잔등을 스치는 세찬 바람이 말 없는 칭찬을 건네고, 주인의 위기를 알아차린 말이 다급히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그때, 이미 검은 창끝은 말의 목 옆을 얕게 스쳤다.
히히힝!
고통에 찬 울음. 시온 포트락은 튕기듯 몸을 일으키며 말의 상처에 눈길을 던졌다.
‘이런!’
상처 자체는 얕았다. 그러나 선명한 죽음의 기운이 얕은 상처를 통해 번져나가고 있었다.
“지독한 힘을 쓰는군!”
얼굴을 붉힌 시온 포트락이 감각 없는 주먹으로 왼쪽 가슴을 두드렸다. 그러자 그의 심장이 한 차례 거칠게 뛰더니, 억눌려있던 힘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몸 전체로 퍼졌다.
“장군!”
그가 새로운 일전을 다짐하며 투지를 불태우는데, 저 멀리서 일단의 병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