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화
분명 실체가 존재한다. 괴물의 발톱, 이빨, 심지어 무기인지 신체의 일부인지 모를 뾰족한 것까지도 물리력을 발휘하고 있으니 그것이 실재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군터의 창이 그것의 머리를 쪼갰을 때, 괴물은 피를 뿌리는 대신 연기처럼 흩어졌다. 쪼갠 것은 머리뿐이었으나 몸뚱이 전체가 비산하여 연기가 되었다가 짐승의 머리 같은 형태가 되어 입을 벌렸다.
이번만은 군터도 제때 반응할 수가 없었다. 그가 단번에 벤 괴물이 둘이고, 연달아 찌른 놈이 하나였다. 그 세 마리가 거의 동시에, 그것도 창을 제대로 휘두를 수조차 없는 가까운 거리에서 그런 식으로 변해버리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콰직!
귀로 들린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군터는 분명히 들었다. 괴물 중 둘은 그를 노렸다. 말 등에 눕다시피 허리를 꺾으며 첫 번째 공격을 피했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두 번째 공격은 주먹으로 응수했다. 연기처럼 변한 괴물에게 주먹질이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군터의 몸은 그가 품은 살의와 본래 지닌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군터의 머리를 집어삼키려는 듯 입을 벌리고 떨어져 내리던 괴물이 주먹에 콧잔등(처럼 보이는 부분)을 얻어맞고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군터는 그렇게 갑작스러운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그를 태우고 있던 군마는 그럴 수 없었다. 그가 들었던, 무언가 으스러지는 듯한 소리는 그의 군마에게서 난 것이었다.
비명은 없었다. 괴물의 이빨이 파고든 것은 살점이 아니었다. 군터는 방금까지 그와 교감하던 용감한 짐승이 죽었음을 곧장 알아차렸다.
숨은 쉰다. 또한 여전히 달리고 있다. 그러나 더는 교감할 수 없었다. 육신이 아닌 영혼이 죽었기 때문이다. 괴물의 이빨은 살점이 아닌 영혼을 파고들었고, 그것을 먹어치웠다.
‘빌어먹을.’
회수한 창을 내질러, 말에 이어 자신에게까지 덤벼드는 짐승의 정수리를 쪼갰다. 그러나 이미 영혼을 잃은 군마는 조금씩 균형을 잃기 시작했고, 군터는 쓰러지는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 * *
길게 늘어선 적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병력. 그런 소수의 병력으로 정면 돌파를 택할 줄이야.
‘대단하군.’
처음에는 그 무모함에 그저 황당하기만 했다. 뭔가 다른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 기대했던 것이 부끄러워질 만큼 저돌적인 돌격이었다. 군터 크렘보르가 자신의 무명에 취해 패착을 저질렀다고 생각했고, 눈을 질끈 감기까지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적 진영 전체가 흐트러졌다. 금방 막히리라 생각했던 무모한 돌격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다. 막히기는커녕, 맞부딪친 적의 방어선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호응해야겠군.”
“예?”
“뭘 그리 놀라나. 아군이 싸우고 있지 않은가. 우리만 여기 편히 눌러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아니. 그러나…….”
안다. 지칠 대로 지친 데다 기세까지 꺾인 군대다. 그들을 이끌고 성벽 아래로 내려간들 제대로 된 전투력을 낼 수는 없을 터.
그러나 흐름이 바뀌고 있지 않은가. 이 고착된 전황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죽더라도 발버둥 치던가, 아니면 가만히 앉아 죽던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는 분명하다. 당장의 안온함을 위해 코앞까지 다가온 끝을 외면한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지금 바로 칼을 물고 죽을지언정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움직여야 한다면 그건 바로 지금이다.”
초췌한 몰골의 귀공자가 칼을 뽑아 들었다. 매일 손을 봤기에 외관상으로는 흠잡을 구석이 없었으나, 말끔한 외관의 칼에서는 숨길 수 없는 피비린내가 풍겼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이 칼이 벤 적의 수만 수십이었다. 지휘관인 그가 직접 벤 적의 수가 수십이라는 말이다.
그는 말로 병사들을 앞세우고 뒤에서 편히 지켜보는, 그런 유형의 지휘관이 아니었다. 고귀한 신분과 드높은 지위를 지녔음에도 줄곧 직접 피를 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군대의 신뢰와 충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는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더욱 빛을 발하는 법.
결심을 굳힌 그의 명령에, 티브리악의 깃발을 건 군대는 기꺼이 응했다.
* * *
전장은 늘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군터는 그런 전장을 질릴 정도로 누볐고, 그렇기에 온갖 위험과 변수로 가득한 전장조차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 생각이, 어쩌면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
“장군!”
아드리안의 다급한 외침.
군터는 쓰러지는 말에서 뛰어내려 땅을 굴렀고, 뒤편에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다시 한번 몸을 날렸다.
‘꼴이 말이 아니군.’
언젠가부터 어떤 치열한 전투에서도 땅을 구르는 일이 없어졌다. 기병을 노릴 때는 말부터 노리라는 전장의 격언이 있지만, 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에게 말은 그의 수족과 같았고, 그 어떤 지독하고 예측불허한 공격이라도 거뜬히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추레하게 땅을 구를 잃은 거의 없다 봐도 좋았다.
지금까지는 분명 그랬다.
오-오오!
그가 낙마하자, 괴물 중 일부가 기다렸다는 듯 덤벼들었다. 군터는 그것들이 자신을 가장 큰 위험으로 인지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라! 곧 뒤따를 테니!”
고개를 돌리려는 아드리안에게 외치고 땅을 박찼다.
괴물들은 확실히 빠르고 강했다. 이것들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그런 식으로 변해버릴 줄이야. 알았다면 결과는 달랐겠지만, 쓸모없는 핑계일 뿐.
촤악!
군터는 이제 전력으로 창을 휘둘렀다. 확실하게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넘실거리는 죽음을 창에 모조리 쏟아부었다. 괴물들이 연기처럼 변할 틈조차 주지 않고 놈들을 베고, 찔렀다.
그-아아!
끝도 없이 달려드는 괴물들 틈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이제 그는 거의 검은 바람 속에 갇혀 있는 듯했다. 그는 쉼 없이 움직이는 창의 궤적 속에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계속 발을 움직였으나, 점점 답답함이 쌓여갔다.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던 창이 조금씩 어긋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자 그런 답답함은 더욱 커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수아비를 베듯 손쉽게 괴물들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한 번 놈들과 부딪칠 때마다 이는 반발력이 상당했다. 게다가 이 괴물들은 반쯤은 영적인 존재인 듯했다. 한 놈 한 놈을 찌르고 벨 때마다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언젠가부터 전투를 치르며 피로 때문에 곤란해진 적이 없던 군터였으나, 지금은…….
퍼걱!
창대 끄트머리가 괴물의 얼굴을 뭉갰다. 본래부터 흐릿하던 이목구비가 아예 엉망이 되어버렸으나 괴물은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것처럼 곧장 다시 덤벼들었다. 군터는 놈의 뭉개진 얼굴에 주먹을 박아넣고 창을 조금 길게 잡은 뒤 몸을 한 바퀴 거세게 회전시켰다. 창의 궤적에 걸린 괴물들이 피 대신 뿌연 연기 같은 것을 흘리며 사방으로 나뒹굴었다.
“후욱!”
숨이 차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피로인가. 전혀 반갑지 않아야 다행이련만, 군터는 불쾌함이나 곤란함보다는 생소함에 사로잡혔다.
괴물들은 여전히 시야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만한 규모의 술법. 분명 오래 가지 못하리라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적을 너무 얕본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저쪽이 꽤나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지.
뭐가 됐든 곤란해진 것은 마찬가지다. 말이 없으니 길을 내도 뚫고 나갈 수가 없다. 거의 옴짝달싹 못 하는 수준이다. 선 자리에서 버티고 있을 뿐.
콰직!
몸뚱이가 반쯤 잘려나갔으면서도 지독하게 엉겨 붙는 괴물을 떨쳐내고 머리를 짓밟았다. 꿈틀거리던 놈의 움직임이 점차 줄어들고, 군터는 또 한 번 숨을 골랐다.
말만 있다면.
잠깐 숨을 골라도 그 순간뿐. 호흡은 점점 거칠어지고 몸과 창의 움직임 역시 덩달아 거칠어졌다.
숙련된 기사(騎士)에게 있어 군마란 단순한 탈것을 넘어 전장에서 등을 맞댈 수 있는 동료이자 대신해서 움직여주는 든든한 다리다.
‘서두르지 않으면 완전히 고립되겠군.’
아드리안에게 멈추지 말라고 했다. 괴물들의 주의가 이쪽으로 어느 정도 분산되었다고 하면 어떻게든 돌파할 수는 있을 터. 그건 바꿔 말하면, 지금 서둘러 뒤를 쫓지 않으면 눈에 불을 켠 적들 사이에 홀로 고립될 것이라는 뜻이다.
군터는 점점 어긋나는 창의 궤적에 신경을 쓰면서도 어떻게든 틈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움직이던 시선의 끝에,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말 한 필이 보였다.
‘저건…….’
지금 막 숨이 끊어졌는지, 식어가는 몸뚱이에서 흐릿한 영혼이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군터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흐읍!”
온 힘을 쥐어 짜내어 괴물들을 크게 떨쳐냈다. 그리고 높이 뛰어올랐다.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덤벼드는 괴물들을 뿌리치고 식어가는 말의 몸뚱이 앞에 떨어져 내렸다.
‘아직이다.’
군터가 손을 뻗었다. 육신을 떠나려던 영혼이 그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붙들려 휘청거렸다. 금방이라도 부서지고 찢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영혼. 군터는 두려움에 떠는 영혼에 속삭였다.
‘너는 아직 더 달릴 수 있다. 그래야만 하고.’
흐릿하던 영혼이 잉크에 닿은 물처럼 검게 물들었다. 군터의 의지가 짐승의 영혼에 깃들자 폭풍을 만난 들풀처럼 떨리던 영혼이 안정을 찾았다.
‘일어나라.’
식어버린 몸을 거의 다 빠져 나왔던 영혼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왔던 곳으로 다시 스며들었다.
[…….]
어떤 소리도 없었다. 그 흔한 투레질 소리도, 심지어 숨소리도 없었다. 그저 눈을 뜨고, 다리를 움직여 일어섰다. 기이한 방향으로 꺾여있던 다리가 아무렇지 않게 땅을 짚는 광경은 기이하다 못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군터는 몸을 일으킨 말의 위로 뛰어올랐다. 피와 흙으로 더럽혀진 고삐를 손에 쥐니 비로소 온전해진 느낌이 들었다.
‘달려라.’
고삐를 당길 필요도, 배를 찰 필요도 없었다. 그와 심령이 연결된 말의 영혼은 그의 마음을 읽고 이미 땅을 박찼다. 군터는 이전에는 경험한 적 없었던 진정한 일체감을 느꼈다.
‘이거다.’
슬슬 위태로운 수준에 근접했던 호흡이 금세 가라앉는다. 괴물들은 여전히 어떻게든 이빨과 발톱을 박아넣으려고 안달이 났지만, 홀로 그것들을 상대할 때와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지금은 그것들에 대응하면서도 여유가 있었다. 그를 태운 말이 적절하게 몸을 흔들거나 속도를 조절하면서 괴물들의 공세를 흐트러뜨렸기 때문이다.
‘그래.’
물론 그 과정에서 말도 이런저런 상처를 입었으나 문제는 없었다. 식어버린 몸뚱이는 그 어떤 고통도 느끼지 못하니까. 심지어 영혼에 닿는 공격도 마찬가지. 말 못하는 짐승의 영혼은 이미 군터에게 속해있기에, 괴물의 이빨이 닿는다고 해도 상처 입지 않았다. 결속 자체를 흔들 만큼 강력한 공격이라면 또 모르겠으나, 괴물들의 공격은 그 정도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이거다.’
군터는 평온한 여유 속에서 순수하게 기뻐했다. 지치지도, 쓰러지지도 않는 권속의 존재가 그를 더없이 만족시켰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걸까.
그는 진작 이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자신을 탓했고, 곧 털어버렸다.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됐다.
삶이란 한계. 그 한계를 지닌 생명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한계를 넘어서야, 벗어던져야 한다.
‘이제 알겠군.’
버겁고 답답하게 보이던 괴물들의 벽이 이제는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지치지도, 다치지도, 죽지도 않는 동료와 함께 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군터는 오직 그만을 눈에 담은 수십, 수백의 괴물들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