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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29화 (929/1,064)

929화

거침없이 분노를 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후련함을 느꼈다. 함부로 쓸 수 없었던 힘이 들끓는 감정에 호응하며 전방을 휩쓸었다. 눈으로 봤을 때는 그저 거무튀튀한 바람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간 것뿐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음습한 힘은 살아있는 것들의 생기를 크고 작게 갉아먹었다. 가장 먼저 휩쓸린 이들은 탈력감에 휘청거렸고, 뒤이어 휩쓸린 이들은 손아귀에 힘이 빠져 무기를 놓치거나 고쳐 쥐어야 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짧은 순간이나마 전투력을 상실했다는 것이고, 군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푸르륵!

주인의 확고한 뜻을 알았음인가. 군터를 태운 군마는 앞을 가로막은 인의 장벽을 보고도 용감하게 질주했다. 영민한 짐승은 저들이 자신의 주인과 자신을 막아서지 못할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막아!”

누군가의 무의미하고 애처로운 외침이 있었으나, 그것은 부질없는 애원과 다르지 않았다. 군터의 창이 번뜩일 때마다 팔과 머리가 이리저리 날아다녔고, 짧은 혼란이 그치고 제대로 대응을 할 즈음엔 이미 군터와 그의 병사들이 방어선을 반쯤 파고든 후였다.

“…….”

군터는 전방과 좌우에서 좁혀오는 적의 움직임을 감지하고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반쯤은 파고든 것 같지만, 바꿔 말하면 아직도 반은 더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적은 생각보다 강했고, 무엇보다 질겼다. 혼란이 조금은 더 이어지리라 기대했건만, 벌써 태세를 정비하고 반격하려 들고 있지 않나.

다시 한번 창끝에 사기를 모아 흩뿌렸다. 전면에서 방패와 창으로 벽을 세우고 다가오던 적병들이 움찔거렸다. 그 틈을 노려 힘껏 밀어붙였으나 처음처럼 대열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술법의 힘은 느껴지지 않았으니, 병사들이 자력으로 버텨내고 있다는 뜻.

푹!

무심하게 창을 내지른 군터는 창대를 붙잡고 피를 토하는 적병을 보았다. 가슴 한가운데가 꿰뚫리고서도 두려워하거나,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는 대신 창대를 꽉 쥐고서 이쪽을 죽일 듯 노려보는 두 눈. 독기와 살기, 결의로 찬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순간임을 알면서도 저렇게 당당하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고작해야 병졸 아닌가.

‘강하군.’

창을 뽑는 대신 힘껏 밀어 뒤편의 다른 적병 하나까지 찔렀다. 그리고 창대를 꼭 쥔 노력을 비웃듯 한 번에 수월하게 쑥 뽑아냈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사력을 다한 의지는 높게 사지만, 의지만으로는 안 되는 일도 있는 법이다. 군터의 창은 평범한 창이 아니었다. 창 그 자체만으로도 보물, 아니 귀물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손을 댄 것만으로도 악몽을 꾸게 만들 수도 있는.

챙!

좌측. 사각지대에서 날아들던 화살 한 대를 쳐냈다. 대다수의 공격은 그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그러나 뒤편의 사정도 썩 좋지는 않았다. 직접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호흡이 거칠어지고, 기세가 흔들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이제 슬슬 피해가 쌓이기 시작할 것이다. 눈먼 칼과 창, 화살 등에 쓰러지는 녀석들이 생기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서는 자신 역시 목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하고, 그런 각오를 마친 이들이 떼로 몰려있는 곳이 전장이다.

삶과 죽음. 귀족과 천민. 운명과 우연. 모든 것이 난잡하게 뒤섞여 휘몰아친다. 이 순간. 이 장소야말로 가장 격렬하면서도 공평한 세상이 아니겠는가.

“무너뜨려라!”

군터는 자신이 입에서 불길을 토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가슴이, 머리가, 몸 전체가 이리 뜨끈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가 내지른, 보이지 않는 불길은 그의 등만 보며 따르던 수하들에게까지 옮겨붙었다. 방금까지는 존재감과 기백으로 그들을 고양시켰다면, 지금 옮겨붙은 불길은 그들의 이성을 불사르고 전의와 광기를 북돋았다.

“막아라! 죽어도 막아!”

“죽여라! 눈에 보이는 것들 모두!”

전의와 전의. 살의와 살의가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군터는 그의 창과 숨결, 심지어 시선으로도 죽음을 뿌렸다. 그의 영혼에서 샘솟은 사기가 육신을 가득 채웠고, 그의 뜻에 따라 때로는 화살처럼, 때로는 채찍처럼 적들을 휩쓸었다.

“멀었나!”

군터를 필두로, 그의 병사들이 벌이는 광기 어린 살육을 지켜보던 한 장수가 다급히 외쳤다. 그러자 그만큼이나 다급해 보이는 술사가 입술을 씹으며 답했다.

“거의 다 됐습니다! 조금만 더!”

“더는 버틸 수가 없단 말이다!”

여차하면 그 자신도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뛰어들 준비를 하면서, 장수는 그의 부대에 배속된 전투 술사들을 원망스럽게 쏘아보았다.

“됐습니다! 지금!”

“좋아! 당장 사용하도록!”

“예? 하지만 그러면 아군 병사들 역시…….”

“눈이 있다면 보아라! 지금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있는 것 같나!”

사방에서 전력으로 조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적은 조금 느려졌을 뿐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죽어 나가는 아군의 수는 쓰러지는 적의 세 배, 아니 너덧 배는 되어 보였다. 이대로라면 적이 아군을 돌파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되물은 술사 역시 눈이 있었다. 그가 보기에도 전황은 비관적이었다. 게다가 책임자가 결정을 내렸으니, 그들은 따르면 그뿐이다.

* * *

‘음?’

기계적으로 창을 휘두르던 군터가 순간 움찔했다. 저 앞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크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저쪽에 술사들이 모여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이상 현상은 분명 그들이 술법을 사용하면서 일어난 것일 테고.

‘막을 수 없다.’

술법을 멈추기 위해서는 술사들을 쳐야 하는데, 그들의 위치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술법이 발동되기 전까지 그들을 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어떻게 발휘되는 것인지도 모를 술법을 훼방 놓을 수도 없으니 기운의 흐름을 주시하는 정도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술법이다! 대비하라!”

경고. 하지만 그 어떤 불안이나 긴장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그 짤막한 외침이 술법이라는 소리에 움찔했던 병사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오히려 반응다운 반응을 보인 것은 이를 악물고, 피를 토하며 앞을 막아서던 적병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의구심을 품었을 때, 뒤편에서 휘몰아치던 기운은 이미 사그라들기 시작한 후였다.

‘이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그 기척은 무엇보다 뚜렷하게 느껴지는 기운이 정체 모를 술식을 완성했을 때. 군터는 눈살을 찌푸리며 전방을 주시했다.

허공이 뒤틀렸다.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맑은 물에 핏물이 떨어져 붉게 물들어가는 것 같은 변화의 과정이었다.

자연스럽게 존재하던 허공에 이질적인 선이 생겨나고, 그 선이 급속도로 덩치를 키우더니 쩍! 하고 입을 벌렸다. 군터는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것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소환.’

확실하다. 저것은 소환술이다. 정확히 무엇을 소환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저 술식은 다른 세계와의 경계를 허물고 문을 여는 부류임이 틀림없다.

“온다!”

날 선 긴장감이 등 뒤에서 느껴진다. 적병 중 몇 정도가 움찔하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오―오오!

함성. 아니, 괴성? 뭐라 형용하기 힘든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그리고 바로 그 뒤를 이어 소리의 주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군대.

한순간이지만 그렇게 착각했다. 늑대 같기도 하고 말 같기도 한 짐승. 그 위에 탄 기수. 그러나 기수의 형태는 인간과는 거리가 있었고, 심지어 기수를 태우고 있다고 생각했던 짐승은 탈것이 아니었다.

짐승과 기수는 한 몸이었다. 그러나 눈은 아래와 위에 다 달려 있었고, 주둥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별개의 존재 같은 둘은 외관으로만 보면 하나였는데, 그 독특한 외관을 보면서도 기이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족히 수백, 아니 수천은 되어 보이는 그것들이.

오오오오―!

마치 기병 돌격이라도 하는 것처럼, ‘틈’을 통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충격적인 광경이 다른 모든 감상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아악!”

“뭐, 뭐야!”

그것들에게 처음으로 휩쓸린 것은 경로상에 있던 적병들이었다. 놈들에게 적과 아군의 구별 따위는 없는 것인지, 놈들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맹렬하게 휩쓸었다.

“미치겠군요.”

질린 듯한 아드리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눈에도 점점 다가오는 괴물들이 보이는 듯했다.

“오래 가지 않는다.”

사기가 꺾일 것을 염려해 대충 주절대는 말이 아니었다. 군터는 조금 전, 술법이 완성되기 전까지 느꼈던 기운의 흐름을 기억했다. 그 정도의 힘으로 저런 괴물을 저렇게 무더기로 소환하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는 것을 지금 눈으로 보고 있지만, 그래서 더 확신할 수 있었다.

소환의 규모가 저렇게 거창한 이상, 소환의 지속 시간은 짧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놈들을 모두 쓰러뜨릴 필요는 없다. 버틴다는 생각으로 조금만 어울리다 보면 알아서 사라질 것이다. 아드리안이 눈으로 놈들의 존재를 볼 수 있듯이 놈들은 분명 실체를 가졌으나 저 틈, 그러니까 문이 닫힌 다음에도 실체를 유지할 수는 없을 테니.

군터는 말의 고삐를 느슨하게 쥐었다. 새로운 적을 맞닥뜨리기 전에 짧게나마 휴식을 주려는 생각에서였다.

“크아악!”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던 적병들이 괴물들의 돌격에는 허무하리만치 무력하게 허물어졌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괴물들이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뒤에서 나타난 것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알아차렸군.’

슬쩍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금방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린 하급 장교. 그의 두 눈이 조금 전과는 달리 암울한 그늘에 잠겨 있다.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리라.

죽음을 각오하고 그 자리에 섰을 테지만, 그 죽음이 이런 식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겠지. 조금 더 숭고한 마지막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잡병의 칼에 목이 베인다거나, 흥분한 말의 발굽에 가슴이 으스러진다거나. 뭐가 됐든, 아군이 소환한 괴물에 의해 짓뭉개지는 최후를 상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다.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대로 흘러가는 법이 드물다.

“도망치지 않나?”

절망하면서도 자리를 지키는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군터가 나직이 물었다. 가만히 있어도 귀가 먹먹해지는 난리판의 한가운데에서, 군터의 나직한 목소리는 그의 귀에 선명하게 틀어박혔다.

그가 눈을 부릅뜨더니 몇 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더니 씹어뱉듯 한 마디를 툭 내뱉었다.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 내가 받은 임무다.”

“봤으니 알 텐데. 그 임무는 개죽음을 당하는 거다.”

“개죽음이 아니다. 적어도 네놈들과 함께 죽을 테니.”

굳은 결의가 느껴지는 말. 그것은 어쩌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으리라.

군터는 피식 웃었다.

“아니. 그럴 일은 없다.”

괴물들이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적 장교가 최후의 공격을 명했고,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병사들과 함께 용감히 달려들었다.

군터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들의 목을 베고, 심장을 찔렀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전의를 불태우던 젊은 장교가 쓰러지기 무섭게 곧바로 들이닥친 괴물들과 맞닥뜨렸다.

오―오오!

선두의 괴물. 네발짐승과 사람을 합쳐놓고 그 형태를 흉악하게 다시 빚으면 이럴까 싶을 괴물이 흉흉한 안광을 빛내며 달려들었다. 그에 군터는 느슨하게 쥐었던 고삐를 바짝 당기며 마주 달려나갔다.

잠시 가다듬었던 기세가 다시금 거세게 폭발하며, 검은 창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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