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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928화 (928/1,064)

928화

시온 포트락은 내심 기대했다.

포트락의 이름을 이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는 젊었다. 일군을 이끄는 지휘관으로서는 어리다고 해도 좋을 나이인 그는 전장에서 다소 사치스러운 것들을 추구했다.

군터 크렘보르.

그의 무명을 들었을 때, 군인으로서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굳이 따지자면 호감에 가까웠다. 적이지만, 군인이자 무인으로서 그가 이룬 것들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에 와서 다분히 정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에 더 실망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군터 크렘보르가 느닷없이 눈앞에 적으로서 나타났다.

궁금했다. 저 얼마 되지 않는 병력으로 뭘 하려고 하는 것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 대군 앞에서, 쏟아져 내리는 화살의 비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먼저 움직인 것은 군터 크렘보르였다. 도발이 제대로 먹힌 것인지, 수천의 군마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쏴라!”

적절하게 퍼져있던 궁병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그들이 든 것은 일반적인 활이 아니다. 더 멀리 쏠 수 있게 특수제작된 강궁이며, 그 활시위를 당기는 병사들은 활시위만 최소 10년을 당겨온 정예다.

슈슝!

고르고 고른 인원인 만큼 날아가는 화살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수백 발이 너끈히 넘었으며, 모두 정확하게 날아갔다.

시온 포트락은 이 첫 번째 사격으로 적을 따끔거리게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화살의 비가 반쯤 떨어져 내렸을 때. 정직하게 일직선으로 내달리던 적군이 갑작스럽게 방향을 틀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으면서도 그 역동성에 움찔거릴 정도로 급격한 방향전환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방향만 튼 것이 아니라 한 순간 속도를 크게 늦추면서 방향까지 트는, 그야말로 그림 같은 회피 기동이었다.

‘대단하군.’

마치 한 마리 날랜 짐승 같았다. 상대의 이빨, 혹은 발톱을 피해내고 다시 몸을 틀어 덤벼든다. 수천의 인마(人馬)가 저렇게 한 몸처럼 움직이려면 대체 얼마나 훈련을 해야 할까. 아니, 아무리 훈련한다고 해도 저렇게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훈련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고되고 긴 훈련에 더해 훈련으로 익힌 감각을 완전히 체화시킬 수 있는 실전을 몇 번이고 거듭해야, 그래야만 저 비슷한 움직임이라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저런 기병이 있다면.’

그간 군터 크렘보르가 어떻게 그런 놀라운 승리를 일궈왔는지, 그 승리의 비결을 엿본 것 같았다.

“다시 쏴!”

호령하는 장수들의 목소리에서 미처 다 숨기지 못한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들은 능력도 없이 경력만 쌓여 지금의 자리에 오른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 작고한 부친이 직접 뽑고 키운 실력자들이었다. 경험과 능력 모두,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이들인 것이다.

그런 그들조차 적이 보인 단 한 번의 회피 기동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놀라워.’

어떻게 저런 기병을 길러냈는가. 병사를 조련하는 것도 장수의 중요한 능력이다. 직접 길러낸 것이든, 다른 수하를 통해 길러낸 것이든 저만한 병사들을 거느렸다는 것만으로도 찬사받아 마땅하다.

거기에 앞에서 휘날리는 대장기. 저것이 위장이 아니라면 군터 크렘보르는 선두에서 병사들을 이끄는 것이리라. 스스로 첫 번째 기수가 되어, 가장 먼저 바람을 맞고 있는 것이리라.

‘피가 끓는군.’

시온 포트락이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가 곁에 있던 수하의 눈총을 받았다. 이전에도 몇 번이고 ‘수장의 진중함’을 강조했던 나이 지긋한 수하였다. 부친과 함께한 세월이 자신의 나이보다도 많은.

“화살은 통하지 않을 것 같군.”

“막을 수는 없어도 늦출 수는 있겠지요.”

“그걸로는 부족해. 알지 않나.”

“고집을 피우시려는 것 같습니다.”

노장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지금까지는 이 정도에서 대부분 양보해왔으나,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전장에 나온 이상 누구든 제 역할을 해야지.”

“수장의 역할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나라고 하지 못하라는 법은 없지. 안 그런가?”

“하아.”

미간의 주름이 긴 한숨과 함께 풀어졌다.

“정 그러셔야겠다면.”

“더 말리지 않나?”

“말린다고 해도 듣지 않으실 것을 압니다. 신하로서 조언은 해드릴 수 있으나, 주인의 뜻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판단은 스스로 하셔야 합니다. 장군께서 그러셨듯이.”

“…명심하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시온 포트락이 자신의 말에 올랐다. 등 뒤에 닿는 우려가 담긴 시선이 느껴졌다.

“10년만 젊었어도 뒤따랐을 텐데 말입니다.”

“자네라면 그랬겠지.”

“세월이 야속하군요.”

“하하. 나 대신 지휘를 맡아주게. 길게 끌지는 않겠네. 무리할 생각은 없어.”

“그리하겠습니다.”

시온 포트락이 직속 병력을 이끌고 진영을 벗어났다. 그의 말머리가 향하는 곳에는 큼지막하게 피어오른 먼지구름이 있었다.

* * *

히히힝!

또 한 번 쏟아지는 화살을 피하고,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다시 속도를 높인다. 슬슬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는지 말이 크게 씩씩거리며 몸을 들썩였다.

‘그래. 이거지!’

아드리안은 애마의 목 뒤를 가볍게 쓸어주며 즐거워하고, 감탄했다.

벌써 네 번째. 평범한 말이라면, 훈련받은 군마라 할지라도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적어도 그의 눈길이 미치는 범위 내에 대열을 벗어나는 말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훈련의 성과가 아니다. 아니, 성과라면 성과일 수도 있겠으나 훈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전장의 한복판. 쏟아지는 화살비를 바라보면서도 마음은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둔 것처럼 차분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거대한 존재감이 모든 것을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감. 이 무리의 가장 앞에서 달리고 있는 수장.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수천의 병사 위에 드리워, 모든 것을 지우고 평온함만을 안겨준다.

지금 한데 뭉쳐 말을 달리고 있는 이들 모두 알고 있다. 군터 크렘보르와 함께라면, 그의 뒤를 따른다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아무런 고민 없이, 불안 없이 앞만 보고 달릴 수 있다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다. 거기에 그 목적지가 승리에 닿아 있다면.

“읏차!”

다시 한번 방향을 꺾는다. 이번에도 역시 그 어떤 호령도 없다. 가장 앞에서 가장 먼저 방향을 틀면, 그 뒤를 따르는 이들도 자연스럽게 방향을 트는 것뿐이다.

앞을 보지 않는다. 앞서가는 등만을 본다.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 * *

군터의 고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두 눈은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것을 쉴 새 없이 훑었다.

사실 이는 일종의 습관으로, 불필요한 노력이었다. 굳이 눈을 바쁘게 움직이지 않아도 그는 전장의 흐름을, 정확히는 군기를 느끼고 그 흐름을 감지할 수 있었다.

군터는 이 재주를 그리 대단한 능력이라 생각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 이것은 어느 정도의 기감만 지녔다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요령이었다.

마치 사람이 무거운 물건을 들려고 할 때 물건이 올라오기 전에 다리와 허리에 힘이 들어가듯, 전조를 느끼고 그 이후의 일을 예측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고 표출할 수밖에 없는 기운. 그런 사람 수백 수천이 모여 발산하는 기운. 그 기운의 흐름을 감지하는 것. 그리고 예측하는 것.

군터는, 그의 기준으로 그 별로 대단치 않은 재주를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 지금처럼 말이다.

‘움직이는군.’

단단하게 벽을 세운 적. 그 벽의 너머에서 꿈틀거림이 느껴진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쪽의 움직임에 대한 대응이라 짐작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저 노림수를 굳이 정면에서 맞아줄 필요는 없다.

개인의 싸움이건 군대의 싸움이건, 승리하는 방법은 같다. 상대의 노림수를 최대한 피하고, 내 노림수를 적중시키면 되는 것이다.

히힝!

벽 너머에서 느껴지는 꿈틀거림을 피해 말머리를 틀었다. 길게 늘어선 벽 중 그나마 가장 두께가 얕다고 생각되는 곳. 뱀처럼 이리저리 몸을 뒤틀던 창끝은 바로 그곳을 향한다.

목적은 적의 섬멸이 아니다. 패퇴시키는 것도 아니다. 저 벽을 뚫고 그 너머에 있는 아군과 합류하는 것이다. 그러니 싸움은 순간이어야 한다.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단번에 돌파한다.

“창수!”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대처할 시간이 부족했을 터인데도 적의 대응은 기민했다. 첨예한 군기를 감지했을 때부터 적이 정예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던 바였으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인상적인 반응속도였다.

군터는 기병 돌격에 맞서는 쪽이 항상 그렇듯, 이번에도 장창병이 먼저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창을 말뚝처럼 세워 기병 돌격의 파괴력을 최대한 죽이고, 그런 연후에 후열에 대기하고 있던 보병이 기세가 죽은 기병을 에워싼다.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적인 대기병전략 아니던가.

그런데 이번에 마주한 적은 전과 달랐다. 창병이 앞에 나선 것은 예상대로였으나, 그들이 쥔 창은 사람 두엇을 늘여놓은 것 같은 긴 창이 아니었다. 기껏해야 팔 하나 길이쯤 될까 싶은 단창이었고, 똑같은 것을 등에 서너 개씩 짊어지고 있었다.

“……!”

그것을 본 순간. 군터는 영문 모를 불쾌함과 불길함을 느꼈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곧바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하기에는 너무 가깝다. 다시 방향을 틀 수도 없다.

이미 수십이나 될까 싶은 창병들은 그 작은 창을 쥔 채 몸을 젖히고 있었다. 저 창은 곧 화살처럼 날아들 것이고, 그러면 이 더러운 감정의 원인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피할 수 없다.’

눈 한번 깜짝할 정도의 시간. 군터는 판단을 끝냈다. 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투창!”

수십 개의 창이 날아들었다. 그것들이 제법 큼지막하게 보일 때까지, 날아오는 창들에서는 별다른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척까지 이르렀을 때. 평범했던 창이 갑작스레 바위라도 된 것처럼 묵직한 기세를 풍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막 쏘아 보낸 화살처럼 빨라지기까지 했다.

그 순간. 군터가 번개처럼 창을 휘둘렀다.

쾅!

창과 창이 부딪치며 났다고 하기에는 너무 둔중한 소리. 그리고 그 이상의 충격이 창을 타고 손으로 번져왔다. 군터는 그 충격을 최대한 흘려내며 연달아 창을 휘둘렀다. 검은 선이 허공에 난잡한 그림을 그리며 방금 같은 소리가 연달아 대여섯 번이나 터져 나왔다.

그러나 날아든 창은 수십. 아무리 군터가 앞에서 신기(神技)를 부렸다고는 해도 그것들을 모두 쳐낼 수는 없었다.

“크악!”

외형은 작은 창이지만 그 안에 실린 무게와 힘은 그 열 배, 어쩌면 그 이상이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가까스로 피한 이들은 무사했으나 그러지 못한 이들은 투석기의 돌을 맞은 것처럼 처참하게 박살이 나고 말았다.

“잔재주를!”

뒤에서 들리는 사람과 말의 비명. 튀는 피와 살점.

군터는 분노에 차 일갈하며, 날아드는 창 한 자루를 맨손으로 낚아챘다. 창에 실린 힘과 무게 때문에 순간 몸이 반쯤 회전했으나, 그는 끝내 낚아챈 창을 붙드는 데 성공했다.

[죽어라. 모조리.]

아주 간만에 살의가 솟구쳤다. 이렇게까지 순수하게 분노한 것이 얼마만이던가. 군터는 낚아챈 창을 그대로 힘껏 던졌다. 솟구친 살의와 악의, 그리고 거기에 자연스레 깃든 죽음의 기운이 자그마한 창에 듬뿍 실렸다.

콰직!

다시 날아간 창이 본래 주인이었던 병사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다. 그러고도 힘이 한참 남아 그 뒤에 서 있던 병사의 명치를 뚫었고, 그 뒤의 땅에 깊숙이 박혔다.

“아아악!”

가슴이 뚫린 병사가 비틀거리며 주저앉더니 피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갑옷 밖에 드러난 그의 목에 검은 실선 여러 가닥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번졌다. 점점 위로 올라간 선들은 곧 얼굴까지 휘감았고, 병사의 비명이 최고조에 이를 즈음에는 그의 눈에서 검은 피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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