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화
크렘보르라는 이름은 익숙하다. 최근에 들은 안 좋은 소식들 때문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전에 마주쳤던 적장의 이름이 머릿속에 뚜렷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보리스 크렘보르였던가.’
상당히 저돌적인 녀석이었고,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보니 당시 그 녀석은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휘하에서 싸우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다시 크렘보르라니. 물론 배후에서 나타났다는 적군에 보리스 크렘보르는 없을 것이다. 부친을 대신해 가문에 남았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으니.
그러니까 만약 정찰병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얼마 안 된다는 적이 든 크렘보르의 문장기가 속임수가 아니라면, 그곳에 있는 크렘보르는 놈의 부친일 것이다.
군터 크렘보르.
근래 들어 귀가 따갑도록 들은 이름이다. 그 군세를 거느리고도 골고스에 죽은 듯 박혀 있는 의뭉스러운 자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그가 자콥 트라소프에게 충성하는 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군터 크렘보르는 병사들의 피에 상응하는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골고스에서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도 했다.
지금까지는 그들의 말이 옳았다. 그는 정말로 골고스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보며, 시온 포트락은 안도하는 한편 실망했다. 그가 보기에 군터 크렘보르는 뛰어난 군인일지언정 훌륭한 군인은 아니었다. 비록 적으로서, 서 있는 위치는 다를지라도 제국의 무장으로서 명예와 뜻을 관철하는 데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군터 크렘보르는 일신의 영달에만 전념할 뿐, 이 혼란스러운 제국을 다시금 안정시키겠다는 대의에 몸을 담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것인가.
“최소 2천. 최대 2천 5백. 확실한 것이냐?”
“제가 본 것은 그 정도였습니다. 나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 이상이었다면, 다시 말해 골고스에 주둔 중이던 병력 상당수가 온 것이라면 여기까지 조용히 올 수 있었을 리 없다. 소수의 병력이 최대한 모습을 감추며 이동했기에 지금에서야 그 존재를 알아차린 것일 터.
‘설령 파악하지 못한 병력이 더 있더라도 그 수는 많지 않을 것이다.’
군터 크렘보르라는 이름이 유명한 만큼, 그의 놀라운 전공에 대해서도 알려질 만큼은 알려졌다. 그가 어떻게 싸웠고, 어떻게 승리했는지 같은 것도 다 알려졌다. 그가 어떤 방식의 싸움을 선호하는지도 역시 알려졌다.
군터 크렘보르는 전형적인 맹장이다. 자신의 무력을 신뢰하며, 그 무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방식의 싸움을 선호한다. 자신이 직접 기병 전력을 이끌고 적의 진형을 흔들고, 연달아 본대가 들이받는 식의 싸움. 그가 승리를 거둔 거의 모든 전투가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그런 방식 자체는 특별하지 않다. 무장이라면 종종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 자신이 과신으로 이어져 끝내 실책을 범하는 이들도 흔히 나오곤 한다. 다만 군터 크렘보르가 대단한 것은 그런, 어쩌면 흔하다고 할 수 있는 방식을 고수하면서도 이제껏 결과로 증명을 해왔다는 점이다. 일신의 무력, 그리고 자신과 과신을 혼동하지 않는 냉철함을 겸비하지 않았다면 그럴 수 없었으리라.
‘소수 병력만 이끌고 지원을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연스레 실소가 나왔다. 고작해야 이천. 많아야 거기서 오백 더. 아무리 기병이라고는 해도, 설령 그 병력이 모두 최정예라고 해도 고작 그 정도로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다니? 이쪽의 말머리를 어떻게든 돌려보려는 시도였다면 성공적이라고 해줄 테지만, 이제 어쩌겠다는 말인가. 설마하니 그 병력으로 뭐라도 해보려는 건가? 기병의 기동력을 살려서?
‘만약 그런 것이라면, 너무 오만하지 않은가.’
방심은 하지 않는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긴장은 늦추지 않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의아함에 사로잡혔다. 그간 들어온 무명(武名)이 과장된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오지는 않을 텐데, 다른 계략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시온 포트락은 일단 군을 멈춰 세웠다. 어찌 됐든 뒤를 잡힌 이상 무시하고 움직일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후방에 나타난 적을 보다 면밀하게 파악하고, 혹시 모를 함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 * *
‘일단은…살았군.’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적군이 멈춰 섰다는 보고를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이렇게 될 것이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지원군이 제때 도착하지 못하거나, 혹은 제때 도착하더라도 시온 포트락이 눈이 뒤집혀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면 정말 위험했을 테니.
‘정말 만만치 않아.’
시온 포트락.
그 ‘포트락’의 아들이라지만 일전에도 한 번 붙어본 경험이 있었기에 조금 느슨하게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다. 방심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한 경험이 있으니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그게 오산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건 최초의 일전을 치른 직후였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시온 포트락은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특유의 사나움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더 심해졌는데, 그러면서도 중요한 순간마다 얼음 같은 냉철함을 보였다. 거기에 휘하의 군졸들도 모두 강병이니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자이드라 멕시스의 지원과 수비하는 쪽의 이점을 적극적으로 살린 덕에 지금까지 버틴 것이지, 야지에서 만났더라면 진작 물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각하. 원군이 온 겁니까?”
“그런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놈이 갑자기 발을 멈출 이유가 없지.”
고전을 거듭하던 와중에 자이드라 멕시스가 쓰러져버렸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한동안 말을 잃고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며칠 후 단순한 과로였을 뿐이라고 서신이 왔지만, 그래도 그의 이마에 잡힌 주름은 펴지지 않았다.
싸움이 한창이다. 이 싸움이 언제 끝날지 기약조차 없는데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던 동맹이 쓰러졌다. 한 번 쓰러진 이가 두 번 쓰러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한번 한계를 보였으니 언제 또 같은 일이 반복될지 알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안 그래도 힘든 와중에 생각지도 못한 불안요소가 등장해버리니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전에 없던 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쓰러지거나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찌 되는가. 생각하고 싶지도 않지만, 난적을 상대하는 데 지금보다 더한 어려움을 겪게 되리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조력이 필요한데, 어디에서 힘을 빌린단 말인가.
조정? 그쪽에 도움을 청한다면 그럴듯한 핑계만 줄줄이 늘어놓으며 속이나 긁을 것이다. 조정을 통하지 않고 황자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방도도 있기는 하나, 설령 그렇게 황자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결국 지원은 테리브란을 통해 이루어질 테니 그 지원이 온전하리라 생각하기는 힘들다. 또한, 그 방법을 택했을 경우 안 그래도 삐걱거리는 조정과의 관계가 더욱 삭막해질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그런 생각들을 거쳐 마지막까지 가서 떠오른 이름은 하나였다. 군터 크렘보르. 그의 도움이 있다면 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분명하게 선을 그어왔다. 자신이 할 일은 이미 마쳤으니 더는 피를 보고 싶지 않다는 입장을 당황스러울 정도로 완고하게 유지해온 것이다. 그런 그를, 아무리 상황이 급변했다지만 쉽게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군.’
상대가 원할 만한 대가를 떠올리기 위해 밤낮으로 궁리를 거듭했으며, 적잖은 대가를 약속해야 했다. 그래도 어쨌든 주사위는 굴려졌으니 이제는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끌어들인 조력자가 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거느린 병력이라고는 고작 기병 이천. 반면 적의 군세는 시온 포트락이 거느린 것만 이만이 넘는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군세와 멕시스의 군대도 있다고는 하지만, 후자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군대조차 믿을 만한 전력은 못 된다는 것이 시어문드의 생각이었다.
“그럼 위험한 것 아닌가? 아무리 장군께서 직접 가신다고 해도…….”
판니른의 군대. 정확히는 솔롬의 군대는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정예군이다. 특히나 기병은 군터가 직접 조련한 병사들로, 그 실력과 충성심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설령 이만이 아니라 이십만을 상대로라도 명령만 내려진다면 망설임 없이 돌격해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믿음과는 별개로 이천이 이십만, 아니 이만을 상대하는 데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아드리안은 그 점을 지적했고, 시어문드는 긍정하면서도 또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생각보다는 괜찮을지도 모르네.”
“그게 무슨 뜻이지?”
“4군단의 대장은 어린 포트락이 아니라 보로겐 콘실리에지. 그러니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상대도 어린 포트락이 아니라 보로겐 콘실리에가 아니겠나.”
“아하.”
시어문드가 군터에게 말했다.
“지위에 비하면 그리 알려진 자는 아닙니다. 콘실리에야 유서 깊은 명문가지만, 콘실리에가 유명하지 보로겐 콘실리에가 유명하지는 않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일군의 머리를 맡은 만큼 무능한 자는 아닐 겁니다. 그러나 파고들 만한 부분이 존재할 것 같습니다. 타고난 기질 자체가 그런 것인지, 아니면 명가의 핏줄로서 비단길만 걸어온 탓에 그리 된 것인지는 몰라도…상당히 조심스러운 면이 있는 것 같더군요.”
시어문드는 이번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보로겐 콘실리에라는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그가 보로겐 콘실리에를 알게 된 것은 골고스에 온 이후였다. 그가 4군단의 군단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보로겐 콘실리에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그 정보들을 토대로 보로겐 콘실리에가 어떠한 인간인지 파악해나갔다.
그리고 낸 결론은, 보로겐 콘실리에가 상당히 신중한 성향의 무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조금 위험하더라도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쪽과 안전하지만 별다른 이득은 볼 수 없는 쪽이 있다면 크게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할 사람이었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런 선택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일군을 거느린 지휘관으로서 불확실성을 덜어내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군을 거느리는 것은 도박판에 앉아 카드나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장은 도박판과는 다르다. 이상한 말일 수 있지만, 전장에서만큼은 과감함이 신중함의 반대가 아니다. 전장에서는 냉철한 계산보다 본능적인 결단이 옳을 때가 종종 있다. 그리고 보로겐 콘실리에 같은 범장(凡將)은 그런 경우가 닥쳤을 때 시험에 들게 된다.
그 시험에서 어떤 답을 내놓느냐는 개인마다 다를 테지만, 시어문드는 보로겐 콘실리에가 내놓을 답을 알 것 같았다.
“잃을 것이 많은 자는 과감해지기 어려운 법입니다.”
보로겐 콘실리에는 그의 평생에 큰 실패를 겪은 적이 없는 명가의 핏줄이었다. 시어문드가 믿는 구석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여기까지 치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상대해야 할 적이 자이드라 멕시스뿐이라는 계산이 있어서였습니다. 그런데 프란시스 티브리악이라는 변수가 이미 한번 나타났지요. 거기에 분명 의식하고 있었을 장군마저 등장하셨습니다. 비록 병력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는 하나, 예상 밖의 상황이 펼쳐진 것은 변함이 없지요. 그는 갈등할 겁니다.”
“그래서?”
“갈등한다고는 해도 그 역시 무장. 게다가 군단을 지휘하는 군단장으로서 겁쟁이 소리는 듣고 싶지 않겠지요. 게다가 그의 휘하에는 포트락의 아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최전선에서 맹활약을 거듭하고 있지요. 그러니 한 번 정도는 이쪽을 가늠해보려고 할 겁니다.”
시어문드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 한 번의 가늠에서 보여주시면 됩니다. 느끼게 해주는 겁니다. 남아서 계속해보는 것보다 여기서 물러나는 편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시어문드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진 듯했다.
작은 포트락이 이끄는 군대는 멈춰선 그대로 말머리를 돌렸다. 멕시스 쪽에 머물던 보로겐 콘실리에의 본대가 움직였다는 보고는 없는 것으로 보아, 작은 포트락은 자신의 병력만으로 한판 붙어볼 심산인 것 같았다. 뭐, 이만한 병력 차가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하긴 하다만.
“조여올 모양입니다.”
적의 군진을 본 아드리안이 나직이 말했다. 병력 차를 과시하려는 것처럼 넓게 벌린 진형은 새의 양 날개 같았다. 얼핏 보면 이쪽을 둘러싸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러나 군터는 아드리안과 생각이 달랐다.
“먼저 움직일 것 같지는 않군.”
“예?”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것 같지 않으냐.”
넓게 벌린 진형은 이쪽을 에워싸기 좋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진형의 두께가 얇아지기도 한다. 즉, 돌파하기가 좀 더 쉬워진다는 거다. 머릿수가 열 배나 되는 적을 상대로 돌파를 떠올린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나, 군터는 어린 포트락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다.
“…….”
그래. 확실하다. 상대는 자신을 알고 있으며, 그렇기에 아주 적절한 방식으로 도발을 걸어오고 있다.
‘대담하군.’
이쪽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들어오라고 유혹한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일 터.
이건 분명 저기 어딘가에 있을 애송이의 도발이고, 도전이다. 이쪽에서는 피할 이유가 전혀 없는.
‘어울려주지.’
군터가 투구를 눌러쓰고 턱 끈을 조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