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6화
올가로프와 맞먹는 체구의 사내들이 넷이나 나타났다. 아간투스베록에게 올가포프의 일을 알리고 고작 이틀이 지난 후였다.
아간투스베록이 어디에 주둔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토록 신속하게 다시 전령을 보낸 것을 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머물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아마도 ‘이곳에 올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일정 범위 내로는 들어오지 못했으나, 그 범위 바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심히 궁금했지만, 물어본다고 알려줄 분위기가 아니었으니 호기심은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게 끝인가.”
“그렇소.”
그들은 한밤중에 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고, 자신들을 전령이라 소개한 후 곧장 죄인을 심문하듯 카인에게 질문을 거듭했다.
그들의 질문은 대부분 올가로프의 실종에 관한 것이었는데, 카인은 자신은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투로 일관했다. 올가로프는 그의 임무에 대해 대부분 함구했으며, 마지막에 실종되기 직전에야 자신에게 협조를 구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최선을 다해 협조했다는 것.
카인의 진술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허점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만족하지 못했으나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올가로프는 실패했다. 누군가의 방해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짐작 가는 바는 없나.”
“글쎄. 말했지만, 올가로프는 내게 자신의 일에 대해 철저히 함구했소. 내가 아는 건 그의 임무가 비밀스러운 만큼 위험했으리라는 것. 그리고 이곳엔 그분께서도 신경 쓰실 만큼 거슬리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정도요.”
“…….”
“그분께서 이렇게 신중하고 비밀스럽게 일을 처리하시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소?”
카인은 자신이 아는 것을 저들이, 아간투스베록이 모르리라 생각지 않았다. 헤이모라를 점거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실력자. 아간투스베록이 언급한 그의 적은 필시 그자를 말하는 것이리라.
“어디까지 알고 있나.”
“군터 크렘보르가 전장으로 떠나기 전. 몇 번인가 헤이모라를 오갔다고 들었소. 그리고 그때부터 그 유령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거짓말처럼 끊겼지. 마치 그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금기라도 되는 것처럼.”
“눈치가 빠르군.”
목소리를 내는 건 네 명 중 한 명뿐이었다. 그가 나머지 셋을 대표하거나 이끄는 듯했다.
“만약 그쪽에서 올가로프에게 손을 쓴 것이라면, 당신도 눈여겨보고 있다고 봐야겠군. 그렇지 않나?”
“그럴 수도 있지.”
“그럴 경우, 전하께서는 당신만이라도 데려오라고 하셨다.”
“그건 곤란하오.”
“곤란?”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그가 고개를 슬쩍 꺾었다.
“착각하지 마라. 그분께서 네게 베푸신 것은 호의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언제든…….”
“아니. 그쪽이야말로 착각한 것 같군. 내 말은, 이미 의심을 사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그쪽을 따라 움직인다면 저들의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질 거란 거요. 그렇게 되면…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거한이 침묵했다. 자신들이 있다고 자신 있게 큰소리라도 치고 싶겠지만, 이미 올가로프가 당한 마당이다. 올가로프는 한 명이고 자신들은 넷이라고 해도, 저쪽에서 마음먹고 움직인다면 역시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방도가 있다.”
“그렇겠지. 하지만 위험부담이 상당하겠지. 그렇지 않소?”
거한은 부인하지 않았다. 아간투스베록은 오만하고, 저돌적인 일면을 가지고 있는 듯했으나 그렇다고 어리석은 자는 아닐 터였다. 어찌 됐든 제국의 꼭대기에서 수백 년을 군림한 자가 아닌가. 당연히 최악의 상황도 염두에 두었을 테고, 그에 대한 해법 역시 마련해두었을 터. 그러나 그 해법이라는 것은 피해를 감수하는 모험 정도일 것이다. 그의 적 때문이든,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든 아간투스베록은 이곳에서 그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듯했으니까. 그나마 그 정도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내게 생각이 있소.”
“말하라.”
거한은 올가로프와 달랐다. 올가로프는 내심으로는 어땠을지 몰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어느 정도 동등하게 대우를 해주었다. 그런데 거한은 처음 얼굴을 마주한 순간부터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 태도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불쾌한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저 조금 당황스럽기만 할 뿐.
‘그래. 평범한 전령은 아니다 이 말이군.’
민감한 내용이 오가고 있음에도 나머지 세 명은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있다. 그에 반해 거한은 마치 자신이 이곳의 모든 상황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는 것처럼 거리낌 없이 굴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셋은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고.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봤을 때, 아무래도 이 오만한 거한과 나머지 셋 사이에는 명백한 상하관계가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올가로프가 저 셋과 동등한 지위라고 한다면, 이 거한은 그보다 최소 한 단계 위라는 뜻.
“이곳 솔롬은 크렘보르의 영지요. 그리고 크렘보르 가문은 당대에 일어난 가문이지. 가주 군터 크렘보르의 공훈으로. 그 이름을 알고 계시오?”
“두어 번 정도. 듣기는 했다.”
거한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삐딱하게 대꾸했다. 카인은 그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 도시에서 그 이름은 절대적이오. 총독도 그의 앞에서는 한 수 접고, 심지어 황자조차도 그를 존중하여 최대한 체면을 살려주려 하지. 대외적으로 그는 황자의 총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다르오.”
“어떻게 다르다는 건가.”
거한은 그제야 흥미가 생긴 듯 카인의 이야기에 조금은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황자가 그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오. 음…역시 표현이 너무 자극적이군. 어쨌든 그만큼 신경을 쓰는 것 같다는 말이오. 유서 깊은 총독 가문들이나, 대귀족들보다도 더.”
“어째서?”
“그건 나도 모르오. 군터 크렘보르는 비할 데 없이 용맹한 무장으로 알려져 있고, 그가 이제껏 쌓아온 전공은 호사가들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댈 정도로 대단하지. 그러나 단지 그게 전부는 아닐 거요. 그게 전부라면 황자가, 제국의 반을 움켜쥐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자가 그토록 신경 쓸 리 없지.”
“거창하게 늘어놓은 것치고는 싱겁군. 그래서 요점이 뭐지?”
“이곳은 그 군터 크렘보르의 영지고, 이곳에서는 황자조차 함부로 굴 수 없다는 거요. 헤이모라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분의 적 역시 마찬가지겠지. 물론 그분의 적은 황자보다 더 위험한 존재일 테지만, 그 역시 이 땅에서는 그분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을 테니까.”
“왜 그리 생각하지?”
“그게 아니라면 지금까지 헤이모라가 이렇게 조용했을 리 없지. 아니오?”
“…아니. 네 말이 옳다.”
이제 거한은 태도를 바꿨다. 하대하는 말투라던가, 내려다보는 시선은 그대로였으나 이전보다 카인의 말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네가 한 이야기는 다 이해했다. 하지만 그래서 뭘 어쩌자는 말이지?”
“말했듯, 이곳에서는 황자도 헤이모라의 적도 함부로 굴 수 없소. 그리고 난 지금 군터 크렘보르의 두 자식 중 한 명을 따르고 있지. 내 자랑 같지만, 측근이라 불러도 될 위치요.”
“알고 있다. 크렘보르의 여식. 실비아 크렘보르였던가?”
“그렇소. 그녀는 야심 찬 여인이오. 비록 후계자 자리는 날 때부터 오라비에게 빼앗겼지만, 그 대신이라고 해야 할까…부친으로부터 이런저런 배려와 선물을 받고 있지.”
“혹, 그녀를 이용하자는 말인가?”
“비슷하오. 지금 내 위치는 운 좋게 공녀의 신임을 얻은 애송이 정도요. 실권이나 기반이라 할 것도 변변찮지. 하지만 시간문제요. 약간의 조력과 시간만 있다면 솔롬에 내 이름을 깊이 기억시킬 수 있소.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운신이 자유로워지겠지. 적어도 지금보다는.”
“바로 그렇소. 나아가 그분의 계획에 보다 크게 일조할 수도 있을 테고.”
“시간과 조력을 이야기했지. 우리더러 네 일을 도우라는 건가?”
“이렇게 생각해보시오. 나를 돕는 것이 곧 그분을 돕는 것이라고. 시간은 조금 더 걸릴 테지만, 위험부담을 안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소? 물론 그래도 내 생각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나도 더 할 말은 없소. 나야 어차피 그분께서 명하시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
거한은 생각에 잠겼다. 빠르고 위험하게 가는 것과 느리더라도 안전하게 가는 것. 어느 쪽이 더 나을지 고민하는 듯했다.
사실 어느 쪽이든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지 조금 더 빠르거나 조금 더 안전할 뿐.
“전하께서 결정하실 일이다.”
“그렇지. 그러니 그대가 그분께 내 생각을 아뢰어 달라는 거요. 그대에게는 그분과 통할 수 있는 수단이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카인이 아간투스베록과 마주할 수 있을 때는 오직 그가 부를 때뿐이었다. 하지만 이 거한은 아간투스베록의 전령이며, 전령들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그런 자라면 아간투스베록과 통하는 어떤 수단이 있지 않을까? 확신에 가까운 짐작이었고, 거한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인해주었다.
“잠시 기다려라. 전하께 아뢰겠다.”
거한이 눈을 감았다. 동시에 그의 존재감이 한순간에 흐릿해졌다. 평범한 사람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크고, 체구는 어지간한 성인을 아이처럼 보이게 할 정도로 큰 사내의 존재감이 연기처럼 희미해지는 것은 직접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현실감을 느끼기 힘들 정도로 기이한 경험이었다.
‘불려갔군.’
카인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보았다. 타고났으며, 물려받기까지 한 영감은 그의 재주 중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그는 이 영감을 바탕으로 여러 재주를 부릴 수 있었는데,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재주’는 그 여러 재주 중 가장 자신 있는 것이었다.
그는 거한의 몸에서 그의 정신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육신을 벗어난 순간 급속도로 거대해지더니 까마득한 무언가로 변해버렸다.
변했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카인은 그것을 확인하려다 황급히 시선을 거뒀다. 순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아주 잠깐 바라보았을 뿐인데도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육안이 아니라 영감으로 형성된 시각일 뿐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고통스러웠다. 영혼까지 통째로 뒤흔들리는 느낌은, 그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이는 알지 못한다.
카인은 거한의 멍하니 풀린 눈에 초점이 돌아올 때까지 애써 평온함을 연기했다.
“…허락하셨다.”
카인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내심 아간투스베록이 자신을 소환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그는 방금까지 그를 지독히도 괴롭혔던 고통에 감사했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분명 웃음을 참지 못했을 테니.
* * *
자이드라 멕시스는 그가 자신 있게 말했던 것과는 달리 쉽게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일어나기는커녕, 병상에서도 무리해서 업무를 보다가 상태가 더 나빠지기까지 했다. 더욱 안 좋은 것은 그런 와중에도 끝까지 일을 손에서 놓지 않다가 결국 병이 크게 도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당연히 업무보고도 받지 못하게 됐고, 그로 인해 이전까지 유기적으로 이루어지던 전선의 아군들과의 협력도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지원해야 할 때 하지 못하고, 의견을 주고받아야 할 때도 그러지 못하니 이런저런 애로사항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친의 뒤를 이어 무명을 떨치기 시작한 시온 포트락은 그런 이상기류를 놓치지 않았다.
“멕시스의 움직임이 굼떠졌다. 연기라기에는 과해. 아무래도 자이드라 멕시스의 용태가 썩 좋지 않은 모양이야. 직접 업무를 처리하기 힘들 정도로.”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리고 기회일 수도 있지. 신중해야 하지만,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군.”
시온 포트락은 과감하게 승부수를 던졌다. 늘 배후에서 나타날 멕시스의 전력을 우려해 여력을 두고 싸울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엔 후방의 경계를 거두고 전군을 동원해 단번에 몰아쳤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끝장을 보자는 듯 달려드는 포트락의 군세를 상대로 감히 정면에서 받아치지 못하고 크게 물러났다. 근 두 달 동안 필사적으로 사수해 온 요새까지 내어주면서 말이다.
‘틀림없군.’
그 모습을 보며 시온 포트락은 확신했다. 자이드라 멕시스의 병환의 심각한 수준이며, 그는 현재 군무에 신경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투가 다 끝난 후에야 뒤쪽에서 슬그머니 나타난 멕시스의 군세가 그 증거다.
“원신께서 나를 도우시는구나!”
이제껏 전황이 지지부진했던 것은 양방향에서 적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지,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버거워서가 아니었다.
물론 적장을 얕보는 것은 아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확실히 군사를 이끄는 재능이 있다. 머리도 좋다. 상황판단이 철저하여 손해 보는 싸움은 어떻게든 피하려 하니 까다로운 상대다.
하지만 시온 포트락은 자신 역시 그에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거기에 부친이 남긴 군대까지 있으니 제대로 맞붙는다면 열 번 싸워 열 번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싸울 수 있는 판이 깔리지 않아 지금까지 질질 끌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내 판이 깔린 것이다.
‘오래도 끌었지. 끝장을 보자.’
그에게도 젊은 무장 특유의 불같은 기질이 있었다. 다만 꾹 억눌러왔을 뿐.
“타라냐드의 늙은 여우는 병상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다! 다시 없을 기회다! 승리가 눈앞에 있다!”
배후에서 어슬렁거리는 멕시스의 군대를 위협해 몰아낸 후. 시온 포트락은 재차 기세를 몰아 프란시스 티브리악을 몰아붙였다.
그런데 다시 한번 일전을 벌이려던 중. 만일을 대비해서 뿌려 두었던 정찰병들이 뒤편에서 새로운 적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멕시스인가?”
시온 포트락이 신경질적으로 묻자, 정찰병이 고개를 저었다. 먼 길을 달려온 듯, 병사의 안색이 파리했다.
“아닙니다. 멀리서 살필 수밖에 없었으나, 깃발은 분명 크렘보르의 것이었습니다.”
“크렘보르?”
시온 포트락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