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25화 (925/1,064)

925화

“알겠네.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말하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

“내가 할 일이다. 그대가 할 일은 없어.”

“글쎄. 꼭 그렇지만도 않을 거요.”

금방이라도 이야기를 끝낼 것 같던 거한이 멈칫했다.

“무슨 말이지?”

“나도 그렇지만, 그대도 얼굴이 제법 팔렸단 말이지. 아마 그대를 주목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닐 것인데,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해도 모든 시선을 다 떨쳐내기는 힘들 거요.”

“…….”

거한은 침묵했다.

그가 직접 나서서 실력을 보인 것은 단 네 번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네 번만으로 ‘카인을 따르는 거한’의 이야기는 몇몇 이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졌다. 그러니까, 평소 카인을 주시하는 이들 사이에서 말이다.

거한은 맹목적이지만 어리석지 않았다. 카인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대번에 이해했고, 그래서 로브에 가린 얼굴이 굳어졌다.

은밀하게 움직일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확신하지는 못했다. 감시의 눈길을 모두 따돌리고 일을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만에 하나라도, 조금이라도 일이 어그러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역시 혼자서는 힘들다. 생각을 마친 거한이 입을 뗐다.

“계획이 있는가.”

“있지. 나중에 전하께 말이나 전해주게. 내가 그분을 위해 최선을 다했노라고.”

“…그러지.”

카인은 거한에게 이틀간의 시간을 요구했다. 거한은 그마저도 곤란하다는 듯 머뭇거렸으나 일을 망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말에 설득되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거한을 돌려보낸 카인은 그의 측근들을 불러모았다. 엄밀히 말하면 측근이라기보다는 그에게서 뭐라도 받아먹을 것이 있나 기웃대는 이들에 가까웠지만, 카인을 마주한 그들은 그를 수십 년은 따른 심복이라도 되는 것처럼 공손하게 굴었다. 아첨하기 위한 꾸며낸 행동이 아니었다. 눈빛에서부터 진실함이 흘러나왔다.

“여러분이 해줘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를 말입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객관에 몰던의 전령이 머물고 있지 않습니까.”

“예.”

보리스 크렘보르는 판니른의 유력자, 유력 가문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의 부친은 전혀 하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솔롬의 관료들 가운데는 그런 그의 행보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지금은 군터 크렘보르라는 이름 덕에 이렇게 독선적으로 나갈 수 있지만, 언제까지 지금과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의 시대를 대비하는 보리스 크렘보르의 행동이 옳다고 여겼다.

“만나봐야겠습니다. 조용히.”

“예? 하지만…….”

“보리스 공자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상인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상로를 개척하는 것? 신경 쓰이지만 참고 넘길 수 있는 일이다. 살라스가 직접 경고와 중재까지 했으니 눈치도 봐야 하고.

하지만 이건 이야기가 다르다. 살라스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 몰던과 비밀리에 접촉한다는 건 명백한 도발이고 도전이다. 사실관계에 상관없이 보리스 크렘보르는 분명 그렇게 받아들일 것이다. 기껏 잠재운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것과 다름없다.

“괜찮습니다.”

보리스 크렘보르는 누이가 이제 자신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하겠지. 크게 분노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카인이 원하는 바였다.

“나를 믿으세요. 다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에요.”

순간, 카인의 눈에 희미한 빛이 일렁였다. 보는 이가 착각이라고 여길 만큼 희미하고 순간적이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허술한 설명에도 누구 하나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마치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쉽게 수긍하고 물러났다.

* * *

거한, 올가로프는 이곳에 올 때 입었던 로브가 아닌, 더 펑퍼짐하고 허름한 차림으로 성문을 나섰다. 그를 주목하는 이들은 없었다. 덩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눈길을 끌기는 했으나, 전문적인 감시자들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카인이 일을 제대로 했다는 뜻일 터.

‘입만 산 놈은 아니었군.’

사실 놈이 별 볼 일 없는 놈이 아니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애당초, 별 볼 일 없는 놈이 그분과 거래를 논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또한, 놈을 처음 봤을 때부터 받았던 기이한 느낌. 불쾌함과 꺼림칙함 사이에 있는 것 같은 그 기이한 느낌도 녀석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놈에 대한 처분은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질 터.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지금은 해야 할 일만을 생각해야 한다. 신주로 가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 그 하나에만 전념해야 한다.

‘남쪽.’

신주는 존재 자체가 극비다. 그러니 신주의 존재를 넘어, 그 위치까지 아는 이는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는다.

하지만 그가 섬기는 주군은 북부에 있는 신주들의 위치를 몇 알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이 땅에 신주들을 박아넣은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봉인지부터가 감춰져 있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지.’

봉인지에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봉인을 해체하거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거나. 올가로프가 택한 방법은 후자였다. 올가로프는 그의 주군에게 봉인지에 입장하기 위한 열쇠를 받았다. 봉인지에만 닿을 수 있다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그는 말을 타고 밤낮으로 이동했다. 중간에 몇 차례 부랑자 무리와 마주치기도 했으나, 대부분 서로 못 본 척 지나쳤다. 딱 한 번, 한 명이라도 털어보겠다고 덤벼든 무리가 있었으나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머릿수만 믿고 덤벼드는 자들은 올가로프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나흘을 꼬박 이동한 그가 닿은 곳은 황량한 황무지의 한복판이었다. 품에서 주먹만 한 크기의 청동 조각을 꺼낸 그가 신중하게 주변을 살폈다.

‘여기다.’

그가 쥔 청동 조각은 봉인지의 열쇠이며, 동시에 지도다. 청동 조각에 깃든 그의 주군, 아간투스베록의 힘이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다. 바로 이곳에 봉인지가 숨겨져 있노라고.

‘길을 열어주소서.’

올가로프는 청동 조각에 그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술사들 같은 정교함은 없었으나, 그의 기운은 막힘없이 청동 조각에 스며들어 그 안에 본래 자리하고 있던 아간투스베록의 기운을 자극했다.

[나는 이 땅의 정복자이니, 그 무엇도 내 앞에서 거짓될 수 없다.]

아간투스베록의 힘과 의지가 퍼져 나갔다. 육안으로는 무엇도 볼 수 없었으나, 올가로프는 그를 중심으로 흉험한 폭풍이 이는 것을 똑똑히 감지할 수 있었다.

폭풍이 휩쓸고 간 후.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였다. 황량한 땅 한가운데 자그맣게 난 길.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모를 길이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올가로프는 그 길이 현실세계가 아닌 다른 곳과 통하는 길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있음에도 신기루처럼 일렁이며, 매 순간 희미해졌다 뚜렷해지기를 반복하는 광경을 보고 있으면 그것이 실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

망설임은 없었다. 표정을 굳힌 올가로프는 지체하지 않고 그 길에 발을 들였다.

* * *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올가로프가 우뚝 멈춰 섰다.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도 황야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비석의 숲이 사방을 둘러쌌다.

숲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었다. 정말로 사람 하나, 내지는 그보다 더 큰 비석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올가로프는 무심코 그중 하나에 눈길을 주었고, 비석의 표면에 짤막한 글자가 쓰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짤막한 글이 이름을 뜻한다는 것도.

무슨 이름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비석에 이름을 새긴 자가 그의 주군이라는 것만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비석 하나하나, 새겨진 글자 하나하나에서 익숙한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올가로프는 자꾸만 머무는 눈길을 거두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그때, 뒤편에서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사…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인상적이긴 하군.”

“……!”

천천히 돌아선 그가 눈을 부릅떴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자가 신기하다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물론 궁금하겠지. 그런데 안타깝게도 알려줄 생각은 없네. 쓸데없거든.”

카인은 잔잔하게 웃으며 대꾸하고는 검을 뽑았다. 올가로프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함정이었나? 감히 그분께 맞서려는 거냐.”

“그러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제정신이 아니군. 감히 그런 생각을 품은 것도, 여기까지 나를 따라온 것도.”

올가로프는 카인이 똑똑하면서도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분의 눈을 피하고, 자신을 속인 것을 보면 교활한 놈임은 틀림없으나 여기까지 홀로 뒤를 밟아온 것은.

‘믿는 바가 있기는 하겠지.’

그러나 그게 무엇이든 소용없다.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사지 정도는 잘라주마.”

“그것 참 무섭군.”

카인이 검을 까딱였다.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우습기도 하고.”

“건방진!”

올가로프의 도끼가 눈 깜짝할 사이에 카인의 코앞까지 날아들었다. 그때까지도 카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윽?!”

도끼가 카인의 왼쪽 어깨를 내리찍으려던 순간. 거짓말처럼 그의 몸이 우뚝 멈췄다. 손에 든 도끼 역시 마찬가지.

“이, 이게…….”

“후우.”

카인이 억눌렀던 숨을 토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올가로프는 자신의 얼굴 가까이 천천히 다가오는 검을 보면서도 경련하듯 몸을 움찔거릴 뿐,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몰랐지. 하지만 자네의 주인을 만나고, 자네와 가까이 있으면서 점점 알게 되더군. 이 몸이 지닌 보물에 대해서 말이야. 부끄럽지만, 나라서 가능했던 일이지. 이전 주인 녀석이었다면 계속 아무것도 몰랐겠지만.”

느릿하게 움직이던 검 끝이 올가로프의 목을 깊숙이 찔렀다. 검신을 타고 흘러내린 핏물이 웅덩이를 이룰 즈음, 꿈틀거리던 올가로프의 거구가 무너져 내렸다.

“너무 억울해하지는 말게. 세상이 다 그런 것 아니겠나. 누군가 취하면, 누군가는 잃는 법이지.”

경험을 자부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아온 것은 아니나, 이제껏 그가 봐온 세상은 이 간단한 이치에서 조금도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자, 그럼.’

저 앞.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힘과 존재감이 느껴졌다. 카인은 올가로프에게서 청동 조각을 취한 뒤 남은 길을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눈부신 빛을 발하는 광구(光球) 앞에서, 카인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것이었군.’

그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신주가 무엇인지. 어째서 이것이 이토록 비밀스럽게 지켜져야 하는지.

* * *

[올가로프가 실패했다.]

의혹. 노여움.

카인은 이토록 절대적인 것 같이 느껴지는 존재마저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기뻐했다. 물론 절대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렇습니까.”

[담담하군.]

“저는 그에게 위험하다고 수차례 경고했습니다. 이렇게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지요.”

카인은 상대가 대꾸할 틈을 주지 않으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저는 올가로프를 돕기 위해 정적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실패했다면, 그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겠군.]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울림도, 감정도. 그러나 카인은 아간투스베록이 본 적 없이 분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억지로 가라앉혔음에도 미처 다 지우지 못한 노기가 불똥이 튀듯 일렁이고 있음을 느꼈기에.

[자중하며 기다려라.]

“그전에 헤이모라에서 움직인다면…….”

[기다려라.]

헤이모라라는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음이 분명했다. 기다리라는 울림이 재차 영혼을 뒤흔든 직후, 카인은 그의 방에서 눈을 떴다.

어김없이 두통이 밀려왔다. 이번에는 너무 급하게 눈을 떠서인지 이전보다 통증의 정도가 심했다. 하지만 그런 고통과는 별개로,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역시 알아채지 못하는군.’

처음에는 너무나 두려워 감히 거스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는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위세를 부리지만 자그마한 거짓말 하나도 눈치채지 못했다. 전지전능과는 거리가 먼, 그저 두렵기만 한 존재를 어찌 신이라 부르겠는가.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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