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4화
키리스트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그에 대한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빠르게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들려온 뜻밖의 소식 덕분에 고민할 필요 자체가 없어진 것이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쓰러졌다…….”
“피로가 쌓인 탓이라고 하더군요.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소문도 그렇게 났고, 자이드라 멕시스 본인도 그렇게 서신을 보내왔다. 며칠만 쉬면 괜찮아질 것이라며 건재함을 알렸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그가 쓰러졌다는 사실만으로도 타라냐드 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그쪽에서는 최대한 입단속을 하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너무 갑작스레 일이 발생한 터라 정보 통제가 생각처럼 잘 안 된 듯했다.
“한 번 쓰러진 자가 두 번 쓰러지지 말라는 법 없지요. 그쪽이 제 역할을 해주지 못한다면 우리만 치고 나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쓰러졌다는 소식은 진군을 멈추는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다. 이것저것 따질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만 놓고 보더라도 여기서 더 나아가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타라냐드는 멕시스의 왕국이나 마찬가지고, 타나랴드의 군대는 멕시스의 사병이다. 현시점, 자이드라 멕시스가 쓰러진다면 그를 대신해 군대를 이끌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없다. 있다면 테리브란에 가 있는 그의 후계자뿐.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갖고 결정한다는 것.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뚜렷하지.’
자이드라 멕시스는 젊은 나이에 가주와 총독직을 물려받았으며, 이제껏 큰 실수 한번 없이 꾸준히 가문을 부흥시켰다. 오랜 시간 타라냐드의 총독으로서, 왕이나 다름없는 권세를 부려온 그의 존재감은 타라냐드 내에서는 절대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대단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안 되는 것이 없었고, 반대로 그가 고개를 저으면 다 됐다 싶었던 일도 한순간에 거꾸러지곤 했다.
그가 건재할 시, 총독이 관여해야 할 만한 타라냐드의 대소사는 신속하고도 효율적으로 처리되곤 했다. 군무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것은 타라냐드의 전선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였다. 자이드라 멕시스 개인의 능력과는 별개로, 절대적인 지휘체계의 존재는 그만큼 큰 힘을 발휘했다.
그런데 지금, 그 구조가 통째로 흔들리려 한다. 물론 자이드라 멕시스가 그의 장담처럼 금방 병을 털고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자이드라 멕시스의 나이가 적지 않고, 한번 이런 식으로 쓰러졌다는 것은 그의 건강이 썩 좋지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즉, 언제든 다시 쓰러질 수도 있다는 거다.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방식의 한계지.’
사실 이쪽이 할 말은 아니다. 판니른 군. 그러니까 크렘보르 역시 군터 크렘보르라는 단 한 명에게 모든 것이 쏠려 있으니까. 오히려 멕시스보다 심하면 심했지, 못하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일이 다 그렇지 않은가? 가정은 무의미하다. 현실은, 자이드라 멕시스가 쓰러졌고 그로 인한 불안감이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쪽에서는 서운해하겠군.”
아드리안이 말했다. 그 말에 시어문드도 동의했다.
“그렇겠지.”
자신이 건재하다고 따로 사람을 보내 강조하기까지 했음에도 이쪽에서 믿지 못하고 발을 멈춘다면 반응이 썩 좋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간 멕시스와 정치적 동맹으로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칫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는 일을, 알량한 믿음 하나만으로 무턱대고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거나, 우리로서는 나쁘지 않습니다.”
우호적인 가문의 불행을 대놓고 기뻐할 수 없어 완곡하게 말했을 뿐, 소리 내어 한껏 웃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황자도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약속을 지켰으면 좋겠지만, 지키지 않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군터는 시어문드와 아드리안에게 키리스트의 제안에 대해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끔뻑인 그들이었으나, 환야의 두 번째 방문과 눈 깜짝할 사이 기이한 공간으로 이동한 일. 그곳에서 키리스트를 만난 일 등을 듣고서는 말없이 입만 떡 하고 벌렸다.
“세상에 이해 못할 일들이 널렸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이건 심하군요.”
“그나저나 아무리 상대가 상대라고 하지만, 그자가 장군의 침소까지 들이닥칠 동안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요. 대체 이놈들은…….”
시어문드와 아드리안은 각기 다른 부분에서 반응을 보였다. 군터는 아드리안의 분노부터 가라앉혔다.
“그자가 내 곁에 다가오기 전에는 나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했다고 나무랄 필요는 없다.”
“으음.”
여전히 불만스러운 기색을 다 지우지 못하는 아드리안을 뒤로하고, 시어문드는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그의 생각을 늘어놓았다.
“그가 제안했던 것처럼 프레스크에서 멈추시지요. 일단은 말입니다. 그곳에서 멈춘 후, 충분한 시간을 들여 정비하면서 사태를 관망하는 겁니다. 장군께서 해주신 말씀에 따르면, 이 전쟁은 뒤에 서 있는 자들의 대리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샤라트 트라소프의 뒤에는 키리스트가, 자콥 트라소프의 뒤에는 줄카가 있다. 어느 정도까지 손을 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존재감이 곳곳에 드리워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
“밖에 저런 깃발을 세워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습긴 합니다만, 우리로서는 어느 쪽이 승리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자콥 트라소프가 승리한다면 그걸로 좋다. 비록 약속했었던 세습 총독직을 받을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공신을 나열했을 때 앞쪽에 이름을 올릴 정도의 충분한 전공을 세웠으니 황자가 제정신이라면 모른 척하지는 못할 것이다.
반대로 무샤라트가 승리한다면? 키리스트가 했던 제안과 그가 한 말들을 떠올려보면 그건 또 그것대로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이 제국의 분열이라면, 정말로 크렘보르 가문이 왕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에 시어문드가 비아냥거렸다.
“제국의 수호자라는 작자가 제국의 분열을 조장하다니. 그것도 음습하게 뒤에 숨어서 말이야. 참 보기 좋구만 그래.”
“원해서 한 수호자 노릇이 아니라지 않나. 뭔지는 몰라도 황제에게 아주 원한이 깊은 모양이야. 물론, 그자가 한 말이 다 사실일 경우에 말이지.”
그렇다. 이 모든 이야기는 키리스트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시어문드는 처음부터 키리스트가 한 말이 사실인지부터 의심했으나, 군터는 그의 말이 사실일 거라 단언했다. 그리고 어째서 그리 생각하느냐는 시어문드의 물음에 이렇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라고 답했다.
시어문드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진정으로 그리 생각하는 듯 단호한 모습까지 보이는 군터에게 더는 물을 수 없었다. 그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키리스트와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이니, 뭔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교감이 오갔겠거니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시어문드는 이름만 질리게 들었지, 얼굴 한번 직접 본 적 없는 키리스트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따르는 상관은 믿었다.
“그나저나 제국의 분열? 어떻게 분열시킨다는 거지? 무샤라트가 이기면 이 나라가 저절로 찢어진다는 건가?”
아드리안은 이제 황가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마저 잊었는지 황손의 이름을 반으로 잘라 불렀다. 신실한 제국의 신민이라면 분노하거나 기겁하거나 둘 중 하나는 할 법했으나, 다행스럽게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 가운데 그 정도로 제국에 신실한 이는 없었다.
“글쎄. 모르겠군.”
“자네가 모르는 것도 있나?”
“많지. 왜 없겠나. 더군다나 상대는 수백 년을 살아온, 머릿속에 몇 마리의 뱀을 키우고 있는지 모를 괴물이야. 솔직히 말하지. 난 장군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그자가 무샤라트의 배후에서 제국의 분열 같은 망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네.”
“망상이라니. 능력이 있는 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건 망상이 아니라 원대한 목표라고 해야지. 실제로도 반 정도는 성공했지 않나.”
“그래. 어쨌든, 난 그자가 속에 뭘 감추고 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하겠네. 그러니 예측 같은 것은 무의미하지.”
“그럼?”
“관망하되 휩쓸리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쪽만의 확실한 계획을 세워야지.”
아드리안에게서 시선을 뗀 시어문드가 군터를 바라보았다.
“장군. 일전에 장군께서는 원하는 건 단지 보리스 공자에게 단단한 기반을 물려주시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 뜻은 지금도 여전하십니까?”
“그래.”
시어문드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에게는 전선의 지휘관 자리가 더 없는 기회처럼 보일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거추장스럽기만 한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시어문드도 개인적으로는 전자에 가까웠다. 그 역시 공명심을 지닌 한 사람의 군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상관은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따를 수밖에.
“프레스크라면 그래도 꽤나 양보한 셈이군요. 우리의 사정을 고려해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쁘지 않습니다. 그 정도면 그곳에서 발이 멈춘다 해도 누구도 장군께 트집을 잡을 수는 없을 겁니다. 당분간은 말입니다.”
그리 말한 시어문드는 얼마간 보급로의 확보와 거점의 신설 등을 핑계로 분주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덧붙였다. 군터는 시어문드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일체의 일들을 시어문드에게 일임했다.
“참. 이게 다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무슨 핑곗거리라도 생겼으면 좋겠군요. 철군이라도 하게 말입니다.”
아드리안이 혀를 차며 툴툴거렸다. 시어문드는 쓴웃음을 지었고, 군터는 고개만 까딱였다. 그 역시 정확히 똑같은 마음이었다.
* * *
레온. 아니, 카인은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되물었다.
“그래서…그 신주라는 것을 찾으러 가겠다는 말이오?”
“그렇다.”
거한은 신주라는 것이 무엇인지 투박한 말솜씨로 설명했다. 말투도 어눌하고, 내용도 부실해서 제대로 된 설명이라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나 카인은 알아들었다. 신주라는 명칭은 처음 들었지만, 이전부터 그것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주라.’
모친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는 신들이 이 땅에 실존했다고 했다. 그들은 대지의 정기를 머금은 존재로, 정령들의 인도자였으며 땅 위에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의 수호자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제국의 군대가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고, 본래 이 땅에 존재했던 모든 나라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던, 모친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려운 존재’들이 신들을 멸했다.
신들은 대지의 정기 그 자체이기에 그들이 사라진다면 자연히 대지 역시 쇠락해야 하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친은 그것이, 신들이 소멸한 것이 아니라 봉인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주라는 것이 바로 그 봉인이로군.’
싸우는 것 외에는 재주가 없어 보이는 이 거한이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한 것인지, 아니면 그 역시 아는 게 많지 않아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카인은 이 시기에 굳이 신주를 들먹이며 자리를 비우겠다는 거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좀 더 그럴듯한 이유를 대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으나 거한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더 해줄 말은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완고하게 버텼다.
“곤란한데. 자네도 알겠지만, 지금은 꽤나 위험한 시기란 말이지.”
본격적으로 국외의 사업을 확장하는 중이었다.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진행해도 될 일이었으나, 카인은 실비아 크렘보르에게 속도를 낼 것을 거듭 권했다. 그녀의 오라비가 언제까지 얌전히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물론 반쯤은 진심이었다. 보리스 크렘보르가 언제 또 마음을 바꿔서 훼방을 놓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어쨌거나, 급하게 일을 처리하는 통에 크렘보르의 후계자는 지금 상당히 예민해져 있을 터였다. 또 한 번 엄중한 경고를 보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전력이 이탈한다면 그건 카인에게 있어 손해 이상이었다.
“알고 있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다.”
“애초에, 그분은 왜 달랑 자네 혼자만 보내신 건가? 대여섯이라도 됐다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을.”
“이 땅에는 그분의 힘이 미치기 힘들다. 거기에 신경 써야 하는 것들도 있지. 전령을 보내신 것만 해도 그분께서는 위험을 감수하신 거다.”
“으음.”
만류한다고 해도 듣지 않을 것을 안다. 거한은 통보를 하러 왔지, 양해를 구하러 온 게 아니었으니.
‘건너오기 위한 준비의 일환인가?’
카인은 거인왕이 길을 열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는 선선히 그러겠노라 했지만, 사실 그는 준비가 될 때까지 거인왕과 마주하는 것을 최대한 미룰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위대한 존재는 그때까지 기다려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