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923화 (923/1,064)

923화

한밤중에 잠깐 왔다 간 꿈. 키리스트와의 만남은 그 정도로 순식간이었고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나 환야가 떠나고서도 한참 동안 방 안에 남아있던 서늘함은 조금 전의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알려주었다.

‘어찌할까.’

키리스트와의 만남은 썩 나쁘지 않았다. 줄카는 키리스트가 그의 적이라고 분명히 밝혔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험담을 하지는 않았다. 미치광이라고 딱 한 마디만 했을 뿐. 군터는 그것이 자신에게 키리스트에 대한 선입견을 주지 않으려는 줄카 나름의 배려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배려 덕에 군터는 아무 선입견 없이 키리스트와 마주할 수 있었다.

키리스트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편이었다. 적어도 자콥 트라소프의 것보다는 나았다. 가만히 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더 좋은 대가를 약속하니 말이다.

물론 엄밀히 따져보면 걸리는 것이 없는 건 아니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가 움직이기를 바라는 자콥 트라소프와 마찰을 빚는 걸 감수한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물론 그 정도야 감수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지만, 어쨌든 그 부분에 대해서도 고려하기는 해야 할 터였다.

* * *

“각하. 6군의 피로도가 심합니다. 교대할 수 없다면 충원이라도 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각하! 미라나스에서 온 급보입니다. 이틀 간격으로 일곱 부대의 순찰대가 목격되었다 합니다. 성주는 적의 공습을 예측하고 지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각하! 3군으로부터…….”

“각하!”

자이드라 멕시스는 전쟁 전보다 족히 세배는 늘어난 흰 머리를 쓸어넘겼다. 축축하고 끈적한 느낌이 손 전체로 번졌다. 깨어있은 지 벌써 꼬박 하루하고도 한나절이 넘게 흘렀다.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정신과 달리 노쇠한 몸은 극심한 피로를 호소하며 휴식을 갈구했다.

“미라나스의 성주에게 전해라. 은밀히 정탐해야 할 순찰대가 모습을 노출한다는 것부터 이상하다. 게다가 일곱 부대라니? 일부러 모습을 노출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적의 본대를 확인한 것이 아닌 이상 지원군을 보낼 수는 없다. 신중하게 대처하되, 겁을 집어먹는 일이 없도록 하라.”

“옛!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6군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그대로 지시한 후. 자이드라 멕시스는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이나마 정리했다. 수하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은 윗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이다. 우러르고 의지해야 할 대상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의지해야 할 대상이 흔들리게 되면 그를 의지하던 이들은 불안에 떨기 마련이니.

게다가 지금은 전시. 설령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가슴에 돌덩이가 떨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겉으로는 반드시 의연함을 가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최악의 순간에도 한 줄기 희망을 붙들 수 있다.

“각하. 테리브란에서 온 전갈입니다.”

그는 혀를 차며 서신을 받아들었다. 사흘 만에 온 서신이다. 어리석은 아들 녀석에게 분명 매일 서신을 보내라고 했거늘.

“…….”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좋은 말은 안 쓰여 있네.”

사흘 만에 온 서신이라는 것만으로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일이 잘 풀리고 있으면 제 자랑을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서신을 보냈을 아들 녀석이다. 그런 놈이 이틀이나 무소식이었다는 것은, 그만큼 맡은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한심한 놈 같으니.”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공자도 분명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겁니다.”

“최선? 그런 건 아무 쓸모 없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아.”

최선이니, 노력이니 하는 말들은 결과로 증명해야 하는 순간, 증명하지 못하고 실패한 이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능력 없고 비겁한 이들의 변명.

“그래도 지원은 계속 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너지면 어찌 될지 알고 있기 때문이지. 우리가 얻어낸 것이 아니다. 저들이 내준 것일 뿐.”

자이드라 멕시스가 눈두덩을 문질렀다. 방금 서신을 읽을 때 몇몇 글씨가 흐리게 보였다. 슬슬 이 몸뚱이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음을 느꼈다. 아무래도 조금 눈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무능한 놈만큼이나 거슬리는 부류가 뭔지 아나? 그 무능한 놈을 두둔하는 것들이야. 그러니 내 앞에서 놈을 두둔하지 말게.”

“…송구합니다.”

“조금 쉬어야겠으니 이만 물러가도록.”

“예.”

들어올 때와는 달리 안색이 조금 창백해진 채로 돌아나가는 수하를 보며, 자이드라 멕시스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능력 없는 이가 아니다. 무능한 자였다면 어찌 가까이 두고 부렸겠는가. 그저 그릇된 충성심이 잠시 눈을 가린 것이다. 무엇이 윗사람에 충성인지 오해하고 섣불리 입을 놀렸을 뿐이다.

‘나도 지치긴 한 모양이군.’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이은 격무에 피로가 쌓이고, 그러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까칠한 반응이 나오고 말았다.

‘제때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자이드라 멕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팔목에 찬 수수한 모양의 팔찌를 어루만졌다. 몸에 기운을 불어 넣어주는 효과가 있는 법구였다. 평소 많은 도움을 받는 물건이었으나 지금은 제대로 기능하기는 하는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만큼 그가 지쳐있다는 뜻이리라. 이 법구는 고개 숙인 풀에 물을 줄 수는 있지만, 말라비틀어진 낙엽을 다시 푸르게 만들지는 못하니까.

“각하! 티브리악 각하께서 보내신 전령이…….”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려던 자이드라 멕시스였으나 바깥에서 들려온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에 혀

를 차며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곧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보낸 전령과 대면했다. 어지간한 일은 서신으로 처리하는 그였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신분으로 보나 지위로 보나 그와 동격이었으며, 무엇보다 현재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맹 중 하나였다. 그러니 그에게는 존중을 보여야 한다.

“그래. 제법 순조로운 모양이군.”

“예. 하지만 아직도 적의 주력은 건재합니다. 포트락의 아들은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겠지. 피가 어디 가겠는가.”

시온 포트락. 부친의 뒤를 이어 무명을 떨치고 있는 젊은 무장은 젊은이들이 혈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흔히 저지르는 실수조차 범하지 않았다. 그는 그 나이대에 어울리지 않는 신중함을 적극적으로 발휘하면서도 기회다 싶으면 과감하게 달려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크렌 총독께서는 그런 자를 잘 제어하고 계시지 않은가.”

“지금까지는 그랬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병사들이 많이들 다치고 지쳤습니다.”

“적들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아시겠지만, 얼마 전 젊은 포트락이 약탈을 허락했습니다. 도시 두 곳과 성 다섯. 마을은 수십 곳이 불탔지요. 적군의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습니다.”

“…….”

그렇다. 그게 문제다. 싸움이 길어질 것을 직감한 시온 포트락은 그동안 금해온 약탈을 전면적으로 허용했다. 그리고 그 결과, 전령의 말처럼 수십 개의 도시와 성, 마을이 불타올랐다.

예로부터 약탈은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하지만 장수들이 그걸 알면서도 약탈에 신중했던 것은 약탈이 그토록 효과적인 만큼, 그 반작용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약탈은 공격해 들어가는 쪽의 전유물이다. 그들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것. 그리고 상대의 것을 빼앗는 것.

같은 말인 것 같지만, 둘은 엄연히 다르다. 둘 중 어느 쪽이 목표인지에 따라 치고 빠지느냐, 아니면 빼앗고 눌러앉느냐가 갈리게 된다. 전자라면 마음껏 약탈을 자행해도 크게 상관없다. 악명이 울려 퍼지겠지만 전시의 악명은 또 다른 명예이니.

하지만 후자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점령군 노릇을 하려면 현지의 민심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그러려면 약탈은 당연히 피해야 한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이제껏 적의 목표가 세력의 확장. 즉, 점령에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지금, 쥬드 포트락의 아들은 그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둘 중 하나다. 정말로 그가 적의 의도를 잘못 짚은 것이거나, 아니면.

“한계에 몰린 것일지도 모르지.”

“그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그런 낌새는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자이드라 멕시스는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었음에 만족했다. 비록 젊은 나이지만, 프란시스 티브리악은 시야가 넓고 생각이 깊었다. 젊은 포트락이 나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활약하고 있다지만, 젊은 티브리악도 그에 못지않았다.

‘애석하군.’

빨리 휴식을 달라며 삐걱거리는 몸은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말해준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이 흥미로운 시대가 너무 늦게 찾아왔음을 한탄했다. 이런 시대가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혹은 자신이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그랬다면 지금 서로 부딪치며 밝게 빛나는 저 두 젊은이처럼 자신 역시 화려하게 꽃을 피우지 않았을까.

허망한 망상일 뿐이지만, 미련을 놓기가 쉽지 않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는 하지만 부족함이 많이 보이는 자식놈이 눈에 밟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가진 것이 더 많을수록 위험한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욕심과 지위는 있으나 능력은 없는 자가 어찌 될지 예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크렘보르 장군이 움직였네. 적도 이제 지금까지처럼 활개치지는 못할 것이야.”

“바로 그 부분 말씀입니다만…….”

이제야 본론인가. 자이드라 멕시스는 프란시스 티브리악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그리고 전령의 입에서 뒤이어 나온 말은 그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해주었다.

“이미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이제껏 침묵을 지키던 분이 뒤늦게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테지.”

“그렇다면 역시 어떤 밀약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군요. 전하와 장군 사이에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

“혹, 알고 계시는 바가 있는지요.”

“아니. 전혀 없네.”

“그런데 어찌…….”

“어째서 이리도 태연하냐고 묻고 싶은 겐가.”

이럴 때가 있다. 특유의 패기로 놀라게 하다가도, 또 어느 순간 이렇게 조급함과 경솔함을 보이곤 한다. 뛰어난 젊은이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우습게도 안도하게 된다. 적어도 아직은 자신이 설 자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노력과 억지는 다르지.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지만 상관없다. 괜찮다. 이 녀석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녀석에게 전해 들은 젊은 티브리악은 이해할 테니.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려고 들면 탈이 나기 쉽지. 어떤 일을 잘한다는 것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을 앞세우지 않는다는 것이야. 여기까지만 전하면 자네 주인은 알아들을 걸세.”

“…말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프란시스 티브리악의 전령이 돌아간 뒤. 자이드라 멕시스는 군터 크렘보르에 대해 생각했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

사람은 비슷하다.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같은 외관도 그렇지만 사실 그보다는 사고방식이 더 비슷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리를 따르고 불리를 피한다는 점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거의 모든 사람의 사고방식은 이러한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알면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를 쉬이 예측할 수 있다.

‘황자가 줄 수 있는 것이라 봐야 총독 자리 정도가 고작. 세습을 약속했겠지만…그걸로 충분했던 것인가?’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했다. 바꿔 말하면, 거의 찾아보기 힘든 극소수는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그리고 군터 크렘보르는 의심의 여지 없이 그 극소수에 속한 이였다. 일반적인 상식과 계산으로 대해서는 안 되는 인물.

‘현 판니른의 총독은 캄브라이의 하수인이지. 캄브라이는 결코 판니른의 지배력을 포기하지 않을 터. 그렇다면…….’

생각을 이어가던 자이드라 멕시스가 돌연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간 억눌렀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던 그는 거친 숨을 토하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루 정도 푹 쉬면 될 것이다. 그 후에 사제라도 불러서 축복을 받으면, 그러면 다 괜찮아지리라.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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